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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황정민의 연기가 번뜩였던 순간들

성찬얼기자
〈서울의 봄〉 전두광
〈서울의 봄〉 전두광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잘했을 것이라 예상하지도 못했으리라. 배우 황정민의 이야기다. 최근 개봉해 순항 중인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은 반란군의 수장 전두광 역을 맡았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서 과연 황정민이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으나 그는 전두광을 난세의 간웅인 양 위장한 기회주의자의 얼굴로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의 연기는 심박수나 스트레스 인증 챌린지까지 유행시킬 정도로 절묘했다. 해서 필자가 황정민 했을 때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을 회고하고자 한다. 황정민 하면 떠오르는 대표 캐릭터들(예를 들면 '부라더~' 정청 같은)을 일부러 빗나간 선정을 해보겠다.


<부당거래> 최철기 반장의 표정

​2010년 개봉한 <부당거래>는 여러 모로 특기할 만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이 '액션키드'라는 수식어를 내려놓는 전환점이었고, 검경비리 등 사회밀착형 스토리가 장르적으로 가능하다는 증거였으며, 황정민-류승범-유해진 등 배우들의 합이 영화를 얼마나 빛내는지 입증한 사례였다.​

〈부당거래〉 최철기
〈부당거래〉 최철기

아마도 <부당거래> 하면 대부분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 '다들 열심히들 산다 열심히들 살어' 같은 명대사를 남긴 주양 검사 류승범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필자는 <부당거래>에 황정민-류승범-유해진 세 배우 각자 가장 빛나는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황정민의 빛나는 장면은 주양과 최철기의 술집 장면을 꼽고 싶다.

​이 장면에서 최철기는 자신의 팀과 가족들이 압수수색을 받게 되자, 주양 검사에게 만나줄 것을 부탁한다. 그는 그동안 주양을 동등한 관계로 생각하고 대립각을 세웠으나 주변의 목숨줄까지 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사과한다. 주양은 그런 그를 비꼬고 조롱하지만, 최철기는 입은 옷을 모두 벗고 무릎을 꿇으며 다시금 사과한다.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은 인간 최철기와 지금까지 경찰로서 자부심을 가져왔던 형사 최철기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은 인간 최철기와 지금까지 경찰로서 자부심을 가져왔던 형사 최철기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필자가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황정민의 연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황정민은 최철기가 느끼는 양가감정을 모두 표현하다. 입으로는 '우리 검사님'이라고 말하며 주양을 어르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아니다. 그것은 적의라고 하기엔 부드럽지만, 그렇다고 호의라고 하기엔 냉정하다. 이 장면에서 원하지 않는 사과를 단순하게 표현했더라면, 최철기의 표정은 더 격했을 것이다. 반면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더 부드러웠을 것이다. 황정민은 최철기가 그런 약은 인물이 아님을 안다. 최철기도 승진을 목표로 수사를 조작한 더러운 인간이긴 하지만, 경찰이란 자부심은 확실하다. 그는 적어도 주양처럼 인간관계를 쥐락펴락하는 정치형 인간은 아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최철기의 끓는 속을 완벽하게 가리지도, 그렇다고 완연히 드러내지도 않는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최철기의 움직임도 그렇다. 주양이 한 수도 접어주려고 하지 않자, 망설이지 않고 탈의하기 시작한다.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 뒤로 그의 표정에선 결의와 함께 모멸감이 떠오른다. 발 빠른 행동은 그가 여기까지 각오하고 왔음을 보여주지만, 반면 그 표정은 이런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인간 최철기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낮은 톤의 황정민의 목소리와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류승범의 목소리 대비까지. 작품 전체에서 더 좋은 장면도 많지만, 황정민이란 배우의 장악력과 몰입력은 이 장면에서 가장 크게 절감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김인남의 눈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김인남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김인남

참 클리셰다. 혼자가 된 사내. 숨겨진 가족에게 찾아온 위기. 가족을 찾기 위한 목숨을 건 사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스토리는 구태의연한데, 태국의 열기와 삭막한 두 남자의 기운이 영화를 가득 채우며 자신만의 맛을 갖춘다. 4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관객들 반응 대부분은 여장남자를 연기한 박정민과 '인간 백정' 레이로 열연한 이정재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다. 하지만 역시, 김인남을 연기한 황정민은 딱 한 장면만으로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필자가 좋아하는 장면은 인남이 딸 유민(박소이)의 행방을 뒤쫓는 과정에서 한종수(오대환)를 고문하는 장면이다. 한종수의 차에 몰래 숨어있던 인남은 그가 탑승하자 바로 기절시킨 후 외딴곳으로 차를 몰아 고문하기 시작한다. 정원에서 쓸 법한 가위로 손가락 등을 자르며 신체에 위해를 가하자 한종수는 사건의 경위를 밝힌다. 이후 인남은 종수를 죽인다.

이 장면은 황정민의 연기와 촬영/조명팀의 훌륭한 설계가 적확하게 호응한다. 인남은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한종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 내리쬐는 햇볕 덕분에 안광은 번뜩인다.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꽤 인간적인 목표와 달리, 인남이란 인간은 이미 수라를 헤쳐 나온 짐승과 같음을 황정민과 제작진은 그 장면 하나로 표현한다. 한종수가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와중에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요란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경련하듯 옴짝대는 안면 근육은 이런 비정한 정서야말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중심에 뿌리내렸음을 상시 시킨다.

​고백하자면,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 황정민의 외모에 대해 돌이켜보거나 깊게 감탄한 적은 없다. 외모를 평가하자는 건 아니고, 도리어 그의 연기가 그만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빛이 깊게 내려앉은 그의 갈색 눈을 보는 순간 나 스스로만 몰랐을 뿐, 어쩌면 저 눈에 지금까지 사로잡혀 있었던 거였나, 생각했다. 이상한 비유일 수 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김인남이 한 마리의 늑대이며, 동시에 그 늑대를 사냥하기 위해 숨죽인 사냥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을 가진 황정민과 그 눈빛을 부각시켜준 제작진에게 깊은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개인적으론 ​〈달콤한 인생〉 백사장이 가장 좋다
개인적으론 ​〈달콤한 인생〉 백사장이 가장 좋다

이상 두 장면이 필자가 황정민에 대해 얘기할 때 꼭 거론하는 장면들이다. 독자들이 봤을 때는 다소 시시할지 모른다. 황정민이 더 빛나는 장면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황정민에겐 더 좋은 캐릭터, 더 유명한 캐릭터들이 줄줄이 있으니까. 이번 전두광부터 <수리남> 전요환 목사, <아수라> 박성배, <곡성> 일광, 저~ 멀리까지 가면 <달콤한 인생> 백 사장, <바람난 가족> 주영작 등등. 그럼에도 필자는 이 두 작품, 지금의 황정민 대표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는 이 캐릭터들이 선보인 찰나를 여전히 사랑한다. 배우 황정민이 앞으로도 이처럼 '기적의 순간'들을 선사해주길 바란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