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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잘못된 질문

씨네플레이
〈괴물〉포스터
포스터의 소년들은 왜 관객을 바라볼까?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2023)은 평범한 영화인 3막 구조가 아니라 약간 더 나아가 3.5막쯤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막에선 미나토(소야 쿠로카와)의 엄마인 사오리(안도 사쿠라)가 아들이 당하는 학교 폭력에 대한 의심과 진실 찾기, 그리고 2막에선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추정되는 선생님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입장, 그리고 3막에서는 미나토의 입장이 나오며 어떤 의혹에 대한 실타래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미나토의 상대역인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와의 마지막을 묘사한 것이 3.5막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각 막에선 각자의 입장에서 사건이 풀어진다는 면에서 <라쇼몽>(1950)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쫓다 보면 누가 괴물인지 찾게 된다.

​이 글은 그 당연함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 썼다.


미나토와 요리

​극 중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지나가고 따스한 햇살이 나온다. 두 소년은 풀숲을 헤치고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 소년들의 행복한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까? 시종일관 불안한 분위기를 유지해왔던 영화는 그런 염려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아마, 두 소년이 폭풍이 휘몰아치던 날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아지트인 폐전철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토굴은 물이 넘치고 나무가 넘어지는 등 이미 재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소년들은 기어이 안식처에 도달한다. 그리고 사오리와 호리, 두 어른은 아이들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원래처럼 똑바로 서있는 폐전철이 아니라 90도 방향으로 넘어진 그것이었다. 어른들은 전철을 뒤덮은 진흙을 제거하고 창문을 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다음 컷으로 넘어가면 어른들의 시점 쇼트를 보여준다. 폐전철의 내부는 엉망이고, 빛도 들지 않으며, 을씨년스럽게 비어있다. 아이들은 살아있었을까?

 

어른의 시점 쇼트로 보는 폐전철의 내부는 인물이 없이 소품과 미술적 요소만으로 공포에 가까운 을씨년스러움을 풍긴다. 마치 (2016)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할까?
어른의 시점 쇼트로 보는 폐전철의 내부는 인물이 없이 소품과 미술적 요소만으로 공포에 가까운 을씨년스러움을 풍긴다. 마치 (2016)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할까?


이어지는 장면은 앞서 말한 아이들이 풀숲을 뛰어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다. 아, 아이들은 살아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찾아온다. 그런데 불현듯 아이들이 나눴던 대사가 생각난다, 빅 크런치를 통해 우주의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지면 그래서 자신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달리다가 멈춘 요리가 미나토에게 묻는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걸까?"

"우리는 그대로야"

"다행이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것일까?

요리는 왜 미나토에게 자신이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말했을까? 요리의 아빠는 거짓으로 아들이 이사를 간다고 알렸을 때 왜 하필이면 먼 지역에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겼다고 했을까? 요리는 자신의 성적인 취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정체성을 가졌지만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라기보다는, 여자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장면이 자주 묘사된 것을 보면 아마 요리가 가진 젠더 의식은 스스로를 여자로 의식하는 것에 가까웠을 수 있다. 이는 일본이라는 경직된 사회가 보기엔 큰 금기다. 돈과 명예를 좇는 요리의 아빠는 이런 아들의 성향에 대해서 돼지의 뇌를 가졌으며 이는 큰 병인데 자신이 그것을 고쳐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병도 아니고 인간 이외의 뇌를 가졌기에 벌어진 일도 아니다. 호리와 사오리가 미나토에게 괴물로 다가오고, 약자를 짓밟는 요리의 반 아이들이나 요리의 아빠는 요리에게 괴물로 다가온다. 약자를 배척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적어도 나만은 괴물이 아니라는 얕은 태도는 누군가에게 괴물이 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소년은 태풍이 불던 날, 자신들이 위태할 것을 알면서도 폐전철에 갔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전쟁터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들은 태풍이라는 빅 크런치를 맞이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왕이면 스스로의 편협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른이 가득하고, 다른 모습도 인정해 주며, 고민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곳에서 말이다.

​그렇게 빅 크런치 이후 이들이 다시 태어나면, 그래서 그들도 '평범'해지면 문제가 해결될까? 적어도 미나토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으며, 요리는 그가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냥 일반적 존재로 만난다면 서로에게 우정을 뛰어넘은 감정을 느낀 두 소년의 사랑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괴물이 가득한 환경에 놓여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년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죽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번지점프를 하다〉(2001) 가 연상됐다.
그런 의미에서〈번지점프를 하다〉(2001) 가 연상됐다.


히로카즈 영화의 정수

​그렇다면 아이들의 대화로 그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고 유추해야 할까? 적어도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만약 소년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행복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선사하는 것이다. 반면에 다시 태어나지 못했다는 해석으로 간다면 어떨까? 그동안 관객에게 속내를 보인 캐릭터들에게 예의를 다하여 적어도 그들이 원했던 세계를 한 번은 그려주고 끝을 맺는 판단이 될 것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는 처절하고 연민이 느껴지지만,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바닥에 처한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사회는 살아갈만한 곳이 못 된다는 인상을 결코 심어주지 않는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관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항상 낮은 곳을 바라봤던 다큐멘터리스트 출신인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다.
항상 낮은 곳을 바라봤던 다큐멘터리스트 출신인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다.


관객이 가져가야 할 것

감독의 해석은 차치하고, 관객이 이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1,2 막을 통해 누가 괴물인지 찾는다. 실제로 일본판 포스터에도 누가 괴물인지를 묻고 있으며, 극 중의 요리의 대사에서도 누가 괴물인지 찾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본능적으로 누가 괴물인지 찾는다. 각자의 관점을 가진 사오리나 호리, 혹은 교장 선생(타나카 유코)이나 요리의 무자비한 아빠를 괴물로 지목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맹점이 생긴다. 이 이야기는 누가 괴물인지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 (관객을 포함)에게 스스로를 결코 괴물로 보지 않고 상대방을 괴물로 여기는, 당신은 혹시 괴물이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작가, 사카모토 유지가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든 간에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오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생각해보면 3.5막이라는 독특한 플롯과 맥거핀을 이용해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칸을 받을 만한 수준의 각본인 것이다.

 

포스터의 아이들이 왜 관객을 쳐다볼까? 영화를 관람 후 다시 보면 질문이 들려옴을 알 수 있다.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까?"
포스터의 아이들이 왜 관객을 쳐다볼까? 영화를 관람 후 다시 보면 질문이 들려옴을 알 수 있다.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까?"

급훈

호리가 담당한 교실 한구석에는 급훈이 붙어있다.

当たり前のことを当たり前にやろう : 당연한 일을 당연히 하자.

미나토와 요리는 당연한 일을 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