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어머니의 몸속에서부터 일종의 감옥에 갇힌다. 모태가 감옥과 유사하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외부와 격리된 채 태아는 10개월 동안 성장하며 사람의 꼴을 갖추게 되는데,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하나의 분명한 생명체가 된다. 이때, 모태가 감옥이라는 전제에서 봤을 때, 해산은 탈출이고 해방일까. 분명한 태어남이 태아에겐 또 다른 사망 신고 혹은 감금인 것은 아닐까.
내 몸이 내 감옥이야!
무슨 괴상망측한 얘기일까 싶겠지만, 시작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사람은 결국 몸이다. 몸이 망가지고 파괴되는 순간 사람은 죽는다. 그렇다면 죽음 역시 또 하나의 해방이고 탈출일까. 이런 질문은 몸 역시 감옥이라는 설정에서 유효하다. 감옥에서 벗어났더니 또 다른 감옥에 갇히는 유한 순환. 사람은 몸을 가지고 있기에 오욕칠정을 비롯한 모든 감정적 격동을 겪고 그게 곧 삶의 내용이 된다. 그 어떤 이성적 분별이나 도덕적 규범 등도 몸이 한정하는 사람의 기본적 한계에서 벗어나 작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몸은 곧 사람의 굴레이자 짐일지 모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가 사는 피부>(2011)는 그런 전제에서 출발해야 납득이 쉬워지는 영화다. 폭력과 강간, 성도착증과 집착, 성전환과 양성(혹은 다성)이라는 테마를 줄곧 천착해온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부를 답습 혹은 변형하는 실험(?)을 가동한다. 그는 데뷔 때부터 다분히 여성 친화적이고 일반 사회의 섹슈얼리티 개념을 전복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엽기적이고 해괴한 설정들이 주를 이루는데, 대부분 비극적인 내용이다. 그럼에도 다 보고 나면 이상한 쾌감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런 특징은 52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부터 더 섬려하고 포근해진다.
사회의 관습,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계율, 제도가 강요하는 심리적이고도 육체적인 고착에서 잠시 해방된다는 느낌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시적인 해방감이나 일탈을 자극하는 오락거리 정도로 치부하기엔 밀도와 심급이 심상찮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상상적 전복 이상의 삶에 대한 실질적이고도 전면적인 전환을 강조한다. 거기에 동조하든 거부감을 느끼든 어떻게든 반응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반전 없는, 그 자체가 반전인 영화
서두에 전제했듯 사람의 삶이 태생부터 감옥이라면,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는 더 큰 감옥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그 감옥을 부수진 못하더라도 자기 의지로 변형시켜 자신의 굴레와 한계를 천국의 도구 삼아 스스로 즐기라고 종용한다. 주어진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성(性)이나 부모마저 스스로 바꿔 비극마저 황홀한 판타지로 재구성하는 일. 그렇듯 세심하고도 엉뚱기발한 심리적 토대를 배제하고 본다면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스페인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섬세한 소도구들의 진한 물성 말고 별 볼 게 없는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내가 사는 피부>는 프랑스 스릴러 작가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기본 스토리 구조와 인물 설정은 그대로 가지고 왔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소설에서 마지막 반전으로 작용하는 설정이 영화에선 중반부 이후에 미리 까발려진다. 내용 또한 마찬가지. 일종의 복수극인데, 영화에서 복수는 주제를 전하기 위한 단순 수단에 불과하다. 의학 박사인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인공 피부의 발명에 천착하는 괴이한 의사다. 화상 등 피부에 상처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연을 거스르는 모험을 감행하려는 것인데, 당연히 의학계에서 논란이 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인공 피부를 발명하려는 배경에는 단순한 의학적 야망 외 개인적 원한과 상처가 연관돼 있다.

로버트는 수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잃었다. 사고 현장에선 살아남았으나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집에서 요양하던 중 아내는 우연히 창유리를 통해 화상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곤 충격을 받아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로버트 부부에겐 노마(블랑카 수아레스)라는 딸이 있다. 노마는 갓 성년이 될 무렵, 어느 파티에 갔다가 비센테(얀 코르넷)라는 청년을 알게 된다. 둘은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숲속으로 가 성교를 하려고 한다. 서로를 탐하는 듯 스킨십을 나누던 도중에 노마가 갑자기 강력하게 저항하며 비명을 지른다. 당황한 비센테가 노마의 뺨을 때려 기절시키곤 반쯤 벗겨진 노마의 옷을 추스른 다음 도망친다.
영화에서 복수의 객관적 근거는 바로 이거다. 로버트는 비센테를 납치하여 감금한다. 노마는 정신병원에 갇혀있다가 뭔가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려 창문에서 뛰어내려 (엄마처럼!) 자살한다. 로버트는 비센테를 자신의 실험 도구 삼아 여성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면서 미랄랴(마리사 파레데스) 라는 늙은 여인을 비서 삼아 호출하는데, 로버트와 미랄랴의 관계 또한 어딘지 심상찮다. 비센테는 창문 없는 2층 방에 갇혀 거실의 모니터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그 비센테가 로버트의 아내를 똑닮은, 새로 탄생한 여인 베라(엘레나 아나야)라는 사실은 굳이 반전이랄 것도 없으니 숨길 필요도 없다.
감옥에서 벗어나니 더 큰 감옥이 있더라
베라는 온몸에 엷은 살색 천을 두르고 있다. 감금된 상태로 베라는 요가에 몰두하고, 벽에 낙서를 가득 채운다. “나는 숨 쉬고 있다. 나는 숨 쉬는 존재다”는 문구와 감금된 날짜 등이 적혀 있는데, 하얀 벽을 꽉 메운 그 흔적이 흡사 밀실에 뚫어놓은 숨구멍 같아 보이는 것도 과장만은 아닐 거다. 베라는 요가를 통해 갇혀 있는 공간에서 자신의 몸 안으로 탈출하는 힌트를 얻는다. 그러다가 로버트가 집을 비운 사이 미랄랴의 아들인 제카(로베르토 알라모)가 나타난다. 축제에서 호랑이 탈을 뒤집어쓴 채 뛰쳐나온 제카가 모니터를 통해 베라를 발견한다. 짐승 같은 본능뿐 아니라 과거의 환영(이 관계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다)이 폭발해 베라를 겁간한다. 그러다 마침 귀가한 로버트가 권총으로 제카를 살해한다. 베라는 이때부터 밀실에서 해방된다.
더 이상의 내용 설명은 생략하겠다. 얽히고설킨 관계의 미로가 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인 만큼 영화를 보면서 퍼즐 맞추듯 꿰어보는 재미도 있다. 뭐 이런 막장스러운 내용일까 싶지만, 온전하고 무난해 보이는 가족 관계도 들여다보면 내적인 갈등과 심리적 내분에 의한 미로가 심심찮게 발견될 때가 있다. 그러나 대개 감추거나 외면하거나 경시해 온 상처들을 통해 드러나는 민낯은 대체로 참혹하게 뒤틀려 있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괴이한 가족 관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일반 가족의 내적 혼란, 그리고 제도적으로 규정된 가족 질서가 어떤 식으로 사람의 기본적 욕망과 본성을 통제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사람은 몸이 감옥인 만큼, 모두가 죄인이고 상처받은 자이고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다. 역시 서두에 언급한 전제에서 파악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피부는 사람을 외부와 경계 짓는 일종의 괄호와도 같다. 피부 바깥은 모두 타인이고 외부이다. 그렇다고 피부 안쪽이 온전한 자신인 것도 아니다. 피부는, 그리고 그것에 둘러싸인 사람의 몸은 스스로가 아닌, 세계 및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감금된 자의 최전선이자 최후 방어선이다. 피부에 큰 상처가 나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반면에 피부 때문에 가려진 상처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피부 안쪽은 자유의 세계이자, 들어갈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이다. 피부 안쪽의 경계가 무너지면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산 채로 자신의 내장을 볼 수 없는 거다.
욕망은 욕망이기 때문에 좌절된다

노마가 비센테와 숲으로 가면서 걸치고 있던 하이힐과 카디건을 벗어던지는 장면이 있다. 노마가 말한다. “다 벗어버리고 싶어. 옷을 입고 있으면 밀실에 갇혀있는 것 같아!” 그러면서 비센터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 그러다가 비센테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갑자기 발악한다. 피부 안쪽으로 틈입되는 타인의 육체. 벗어버리려 했던 몸이 완강히 닫히는 상황. 곱씹어보면 영화 속 모든 인물이 그러하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하려 하나, 그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와 경계 탓에 스스로를 변형하거나 왜곡시키지 않으면 사랑도 복수도 불가능한 존재들. 가만히 벌거벗은 채 거울을 보자.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이유로 상대를 탐하고 피차 저주하게 되는, 자신에게는 없지만 그렇기에 뭔가를 충동질하고 도발하는 몸의 어느 부위. 다른 쓰임새, 다른 모양으로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는 그것이 혹시 욕망의 무기이자 욕망의 정점을 무력화하는 감옥의 걸쇠 같아 보이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