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에 갇힌 범죄자가 어느 날 꿈을 꾼다. 그의 이름은 말릭(타하르 라힘). 교도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코르시카계 폭력 조직의 두목 루치아니(닐스 아르스트럽)의 급사 노릇을 하고 있는 청년이다. 루치아니가 시키는 대로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는 등 잔심부름꾼에 불과하다. 총 6년 형을 선고받은 말릭은 가족도 없고, 출소 후 미래도 불투명하다. 꿈속에서 말릭은 어두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문득 자동차 앞에 거대한 사슴떼가 나타난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에 부딪친 사슴이 허공에 뜬다. 그리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얼굴이 그 위에 오버랩된다.
왜 제목이 <예언자>일까?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예언자>(2009) 중 한 장면이다. 제62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이다. 여러모로 극찬을 받았지만, 내용은 기존 갱스터 무비의 전개 방식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감옥 안에서의 패권, 나아가 감옥 밖 어두운 갱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밀약과 음모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닥 새롭지 않은 줄거리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 감흥은 짐짓 별다르다.

앞서 언급한 장면 역시 그저 말릭의 불안한 심리를 암시하는 상투적인 장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꿈을 꾼 다음 날, 말릭은 루치아니의 명을 받아(교도소장과 교도관들도 모두 루치아니의 꼭두각시나 진배없다) 하루 동안 외출 허가를 받고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날아가 다른 폭력 조직의 보스와 협상을 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러다가 꿈에서 본 것과 거의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차 안에서 보스의 의심과 위협에 시달리던 중, 사슴이 도로로 달려 나와 차에 부딪치는 것이다. 사슴이 나타나기 직전, 말릭은 버럭 “동물이 나타나요!”라고 외친다.
사슴을 치어 죽인 자동차는 앞 유리가 박살 났으나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차에 타고 있던 조직원들이 길가 숲속에 들어와 사슴을 사냥해 온다. 그러면서 말릭에 대한 보스의 의심이 다소 풀린다. “너 뭐야? 예언자야?” 이 영화의 제목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순간이다. 말릭은 루치아니가 시킨 일을 말끔히 완수한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파리의 감옥으로 돌아온다. 영화 중후반 10여 분 동안 벌어지는 일이다.
시키는 대로, 똑바로 죽여야 해!

<에언자>는 자크 오디아르의 출세작이다. 그는 이민자 문제 및 교육, 또는 비틀리고 상처받은 사람에 대한 영화를 줄곧 만들었다. 프랑스 및 유럽 전역에서 이민자와 난민 관련한 문제가 크게 대두되던 무렵이기도 했다. 법 제도의 불가피하거나 부조리한 측면과 그로 인해 소외된 자들의 암울한 세계를 주로 다루는데, 이 영화 이후 <러스트 앤 본>(2012)으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졌다.
말릭은 어릴 때부터 소년원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면서 교도소로 이감되는데, 첫인상은 어수룩하기 그지없다. 아랍계이지만 무슬림도 아니다. 감옥은 루치아니 패거리가 이끄는 다수의 코르시카계와 무슬림계, 그리고 이집트계 갱들이 줄곧 신경증을 벌이는 아수라판이나 다름없다. 감옥에서마저 말릭은 소외된 외톨이인 셈이다. 루치아니는 바로 그 점을 노린다. 갓 입소한 말릭에게 수감 중인 아랍계 남자 한 명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의 호감을 얻어 접근한 뒤 면도칼로 경동맥을 그으라는 것인데, 조직원 한 명이 살해 방법을 레슨 하듯 자세하게 알려준다. 제대로 죽이지 않으면 말릭이 죽게 된다. 상대를 죽일 때까지 입에 면도칼을 물고 있어야 하는 상황.
그러나 둘이 독대하는 상황에서 살인은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상대가 뜸을 들이는 사이, 면도칼을 입에 물고 있던 말릭의 입에서 피가 흐른다. 불안을 느낀 말릭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살인은 계획한 것과는 완전 다른 방식으로 성공한다. 죽이긴 했지만, 루치아니 일당이 지시한 방식대로는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일견 심상찮게, 작전(?) 짠 것보다 오히려 더 개연성 있게 발생한 돌발 상황이라 크게 눈여겨 두지 않게 되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된다.
문맹 청년, 감옥에서 세계와 인간을 공부하다

살인에 성공한 이후, 말릭은 루치아니의 신뢰와 의심을 동시에 받는다. 이른바, 시험에 드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편의를 다 누리게 되면서 말릭은 점점 더 루치아니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런 전개도 매우 낯익다. 결과적으론 둘의 대결로 압축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예감은 기존 교도소 배경 갱스터 무비에서 숱하게 써먹은 설정이다. 루치아니는 말릭을 계속 이용해 먹으면서도 그가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떠보는 듯한 행위를 무시로 일삼는다. 주로 폭력에 의한 협박이다. 말릭은 꿋꿋이 참으며 루치아니의 급사 노릇을 군소리 없이 지속한다.
말릭은 감옥 안에서 언어를 비롯 경제학 공부까지 매진한다. 19살 애송이에서 세상 돌아가는 원리, 인간의 탐욕과 그것을 지배하는 본성 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말릭은 루치아니의 간교에 넘어가는 듯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는 방식을 터득한다. 그러면서 점점 배포가 커진다. 루치아니에게 모욕을 당한 어느 날 밤, 말릭은 침대에 누워 “개자식! 죽여버리고 말 거야”라며 이를 간다. 이쯤부터 영화의 결말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대략 감이 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19살 어수룩했던 청년 말릭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결국 만기 출소한다.
출소하는 날, 교도소 앞엔 그의 수하가 된 수 십 명의 갱들이 고급 승용차를 몰고 와 말릭을 환영한다. 그리고 같이 수감하다가 먼저 출소해 말릭의 일을 돕던 남자의 아내와 아이가 말릭과 한 가족이 되는 것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녀의 남편은 고환 암을 앓다가 말릭이 출소하기 전 사망했다. 항암치료를 거부한 그는 말릭에게 자신의 가족을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한다. 말릭이 루치아니를 최종적으로 몰락케 하는 일(이 역시 처음엔 루치아니의 지령이었다)에도 목숨 바쳐 동참한 사이였다.
짐승의 순수성으로 인간의 야수성과 맞서다
갱스터 영화치고는 묘하게 포근한 해피엔딩이다. 줄거리를 굳이 끝까지 나열한 건, 결말을 알고 나서 봐도 영화 자체의 밀도만으로도 충분히 두 시간 반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 여긴 까닭이다. 한 애송이가 조직에 빌붙다가 목숨을 건 도박 끝에 우두머리가 되는 영화는 거의 갱스터 무비의 공식처럼 유전되어 왔다.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 또한 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언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보다 묵직하다.

다시, 자동차가 사슴을 로드킬하는 장면. 간혹 있을 수 있는 예지몽일 수도 있는 만큼, 사실적 개연성 차원에서 보자면 억지스러운 장식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단지 사고를 예감한 것 너머의 암시적 메시지를 찾는 것 역시 과잉해석일지 모른다. 허나, 영화를 전체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언뜻 불필요해 보이는 그 장면이 전해주는 여운은 사소하지 않다.
말릭은 처음에 겁도 많고 어수룩한 소년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살벌한 현장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는 사슴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 사슴이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면서 차가운 야수로 변화한다. 사슴의 순수성이 포악한 야수의 간계를 이겨내는 과정엔 모종의 영적 순결함 같은 게 느껴진다. 성경에서 따온 듯한 몇 가지 디테일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갱스터 무비를 빙자한 일종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무학으로 떠돌던 말릭은 감옥 안에서 진정한 인생을 배운다. 살인과 배신과 음모와 짐승 같은 본능만 난무하는 곳에서 말릭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살면서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말릭은 모든 폭력과 비참을 스스로 감내해 낸다. 그런 점에서 루치아니는 그의 스승이자 밟고 나아가야 할 장애인 동시에, 삶의 궁극적 표본을 미리 제시해준 거대한 벽이기도 했다. 말릭은 결국 혼자 힘으로 그것들을 넘어서고 깨부수어 자신만의 삶을 쟁취한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으면 어떻게 될까

첫 살인을 시도하면서 말릭이 루치아니 일당이 지도(?)했던 살해 방식을 그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건 말릭 스스로가 모든 상황을 자신의 방식대로 타개할 수밖에 없다는 최초 암시가 된다. 말릭은 그때 이미 자신의 삶을 예견했던 것일 수 있다. 살인의 도덕적 의미와 마약 거래 및 온갖 불법은 결국 교도소(로 통칭되는 모든 제도)의 허울과 모순을 되짚어 보자는 감독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시쳇말로 감옥을 ‘학교’라 일컫지 않는가. 그 안의 모든 선생들은 결국 제도의 함정이자 시험에 불과할 수 있다. 말릭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예언자’가 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신만의 미래를 열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교’는 아직도 선생의 그림자조차 밟지 말라 이른다. 맞기도 틀리기도 한 말이다. 그림자를 밟으면 선생의 똘마니가 될 수도 있고, 선생의 그림자를 자신의 빛으로 지워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택 역시 학생의 몫. 장학금보다 자발적 파기를 통해 자신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자라면 학교는 정신병원에 불과할 때가 많다. 스스로를 예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