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탐정이 한국에서 법적 허가가 난 건 채 5년이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탐정이 신비스럽게 여겨지는 건지도 모른다. 셜록 홈즈나 필립 말로 같은 멋쟁이 탐정은 아직까지 가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사립 탐정이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셜록 홈즈는 머리가 비상한 신경증 환자이고 필립 말로는 삶의 풍파에 잔뜩 찌든, 페이소스와 아이러니가 뒤섞인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이다.
뭐 이런 거지 같은 탐정이 다 있어?!
그 둘을 원본 삼은 캐릭터는 영화에서도 부지기수다. 코난 도일의 원작은 최근까지도 드라마 시리즈가 제작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원작도 몇 차례 영화화됐는데,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긴 이별>(1973)이 대표적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에선 그 영화의 영향이 짙게 풍긴다.
난해하고 방대하고 괴팍하기로 악명 높은 미국 소설가 토머스 핀천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핀천의 작품 분위기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스토리 전개는 난해하고, 어딘지 허무맹랑하게 방대하며, 괴팍한 유머와 풍자가 무시로 돌출한다. 1970년 LA가 배경이다. 마약에 찌든 사립 탐정 닥 스포텔로(호아킨 피닉스)에게 한 여인이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닥의 전 여자친구였던 샤스타(캐서린 워터스턴)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이상하다.

닥의 몰골은 괴이하다. 지저분하게 기른 머리와 양쪽 턱을 뒤덮은 구렛나룻이 고릴라를 연상케 할 정도다. 그의 동료 같기도, 앙숙 같기도, 배후조종자 같기도 한 LA경찰국 강력반의 ‘빅풋’ 비욘센(조쉬 브롤린)은 대놓고 ‘흰색 원숭이’라 부른다.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맞이한 샤스타가 실재인지 환각인지 닥도, 보는 이도 알쏭달쏭하다. 샤스타가 닥에게 도움을 청한다. 자신의 현재 남자친구인 부동산 갑부 마이클 울프만(에릭 로버츠)의 부인이 자신의 정부와 함께 마이클을 정신병원에 수용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곤 곧 샤스타가 실종된다. 그리고 마이클도 실종된다.
시작부터 괴이한 난맥상이다. 전 여자친구가 현 남자친구를 위해 탐정인 전 남자친구에게 사건을 의뢰한다는 설정부터 수상쩍긴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배배 꼬이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물과 사건의 배치도 끝엔 당시 미국 사회 전체의 교묘한 정치적 음모와 자본의 체스판이 나타난다. 마약과 탐정, 경찰과 범죄라는 기본 설정은 그 방대하고 난해한 지도의 첫 페이지를 들추는 탐조등에 불과하다. 영화는 토머스 핀천 특유의 과대망상적이고도 비(非)건축적인 이야기 축조 방식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약물 요정(?)이 알려주는 이야기
‘약쟁이’가 주인공인 만큼, 그리고 당시 LA에 만연했던 약물 문화를 소재 삼은 만큼, 영화 또한 몽롱하기 짝이 없고, 시간 관계나 인물의 실재성 따위도 혼란스럽다. 소틸레지(조안나 뉴솜)라는 젊은 여성이 닥의 심리 상태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내레이터처럼 불쑥불쑥 등장하는데, 그녀 역시 닥의 환각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소틸레지는 닥의 시점에서만 가끔씩 실재처럼 등장(주로 닥의 자동차 조수석)할 뿐, 요정처럼 재잘거리며 떠도는, 흡사 대마 연기와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닥의 수호천사이기도 하다. 소틸레지는 대체로 불온하고 음울하고 때론 역겨워질 수도 있는 내용을 판타지처럼 가볍게 윤활케 하는 역할도 한다. 사이키델릭한 변박으로 일관하는 영화의 리듬이 그래서 한결 경쾌해진다(부언컨대, 이 글의 제목 또한 소틸레지의 대사에서 따왔다).

영화는 닥의 의식 세계와 실제 사건이 겹으로 중첩되는 장면들이 많다. 그렇기에 보는 이 역시 이게 환각인지 현실인지 감 잡기 어려운 상황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두 시간 반 동안 뭔지 모를 안갯속에서 뚱딴지같은 괴물을 만났다가, 돌이켜보니 그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인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은 착종이 선득하다. 그런데, 또 그 평범해 보이던 사람이 어떤 거대한 정치적 음모와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란 걸 알게 되면서 잠깐 빠져나갔던 얼이 되돌아와 정신 바짝 차리게도 만든다. 영화가 약에 쩐 인물의 의식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개성적인 탐정이 등장하는, 은밀한 범죄 커넥션을 극적으로 파헤치는 영화라 여겼다간 금세 관람을 포기하거나, 쌍욕이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한국 개봉 당시 총 관객 수가 296명이었다. 정식 개봉을 건너뛴 탓이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일차적으론 배우들의 연기력 덕이다. 호아킨 피닉스(잘 알려졌다시피 부모가 히피 출신이다)는 히피 세대의 후줄근하고 순진하며 현실도피적인 인물상을 맛깔스럽게 재연했다. 히피는 베트남 전쟁과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안티테제로 형성된 일종의 기형적 문화 현상이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히피가 머리 자르고 정장을 갖춰 입으며 본격적인 자본주의 투사인 여피로 변신하게 되는데, 그때 마약을 대체해서 대중을 중독시키는 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비롯한 미디어다. 미디어는 당연히 정치적인 기제다. 영화 또한 그 녹을 받아먹으며 성장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건 그 중독의 체계다.
약물 중독자의 뇌를 스캔하는 영화

중독은 마취와 각성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약이든 술이든 매한가지다. 약이나 술이 아니더라도 모든 문화 기제는 중독을 기반으로 삶에 침투한다. 중독은 가속력이 강하다. 한번 빠지면 시공이 남달라지고, 자신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서나 별다른 인식을 갖(은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중독을 교묘하게 유발하고 이용한다. 중독으로 유혹하면서 더 심한 중독을 제어하여 대중의 삶을 전체적으로 컨트롤한다. 그 과정에서 이탈하거나 심하게 중독되거나 또는 중독을 거부하는 자들은 저절로 배제되게 만든다. 거기서 떨어지는 이윤으로 자본의 배를 더 불리고는 또 다른 중독의 매개를 대중에게 전파한다. 예술과 학문과 종교, 광고와 정보 등이 모두 거기에 동원된다. 그 기묘한 시소게임 안에서 대중은 스스로를 환각 대상으로 삼거나, 환각의 매개를 자기 자신이라 착각하게 된다. 토머스 핀천의 소설들이 항상 절묘하게 다루는 사항 중 하나다.
영화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샤스타는 ‘골든 팽’이라는 보트에 갇혀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교부이자’, 즉 ‘Inherent Vice’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해상보험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 요컨대 초콜릿은 녹고, 유리는 깨진다는 사실만큼 특약 없인 보험금도 탈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알쏭달쏭하긴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일차적으로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더 어원적으로 밝히자면 이 영화의 핵심은 단어 그 자체로 설명하는 게 더 적절할 듯싶다. 이를테면 ‘고유하게 내재하는 범죄’. 마약이나 개인적 일탈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 보다 구체적으론 미국이라는 나라가 형성되고 발전하게 된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범죄적 요소에 대한 탐색. 영화는 토머스 핀천의 작품들이 언제나 그랬듯 이 거대한 글로벌세계의 중추에서 무슨 거대한 음모가 사람들을 조종하고 파괴시키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그 속은 참 무시무시하고 역겹고 살벌하지만, 그것의 겉은 참 세련되고 깔끔하고 친절하다. 그에 비하면 진화 덜 된 현대인 몰골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닥은 얼마나 솔직하고 순결한가. 아니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못해서 귀엽고도 멍청한 악마 같은가.

‘가장 확실한 중독은 아무것에도 중독되지 않는 것’이라고?
앞서 이 영화가 로버트 알트만의 <긴 이별>과 비슷하다고 말했었다. 그 영화에서 필립 말로로 분한 장신배우 엘리엇 굴드의 몰골 또한 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커다란 체구에 덥수룩한 머리, 거칠고 빈정대는 듯한 말버릇 등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서 상상하게 되는 우수에 차고 데카당스한 매력을 지닌 댄디 보이 필립 말로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더 설득력 있고 정감 가는 캐릭터였다. 거기에 비하면 닥은 그보다 하위 버전(?)에 가깝다. 머리가 영특하지도 않고, 항상 약에 취해 비실대기만 하는 꼬락서니에 완력도 약해 보인다.

그럼에도 닥에겐 수호천사 소틸레지가 있다. 이성보다는 야성, 합리보다는 본능에 더 충실한 그는 인간보다 짐승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기에 때로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할 짓을 한다. 바로 그런 능력으로 닥은 사건을 해결하고 향후 삶의 변화까지 아울러 보게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 샤스타가 닥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어둡던 화면에 빛이 든다. 닥의 눈가에 빛이 환하게 비친다.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한 얼굴에 겹친다. 시간의 어두운 바닷속에 뜬 등대 같다고나 할까. 이 영화의 기술적, 내용적 핵심은 결국 중첩과 이중과 그로 인한 확대다.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 영화는 겹으로 묶고 통으로 울리게 한다. 심란했던 두 시간 반이 일순간 밝아진다.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이상한 영화다. 그 이상함이 기꺼워 들여다보던 스마트폰을 오랫동안 손에서 놓게 만드는 영화. ‘가장 확실한 중독은 아무것에도 중독되지 않는 것’이라고 누가 귓가에 속삭인다. 영화 속 대사는 분명 아니다. 어라? 내게도 소틸레지가 생긴 건가.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