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은 한대수의 노래 ‘멸망의 밤’에서 인용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로즈마리의 아기>(한국 개봉 제목 ‘악마의 씨’)를 발표한 건 1968년이었다. 지금까지도 오컬트 공포영화의 수작이라 평가받는 영화다. 그 무렵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 영화계엔 오컬트 붐이 일었었다. 영화계뿐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서 성행했는데, 월남전 및 자본주의적 사회 풍토에 대한 저항의 한 측면이라 볼 수 있다. 미국 건국의 토대가 되었던 기독교 근본주의에 큰 금을 내는 현상이기도 했다.
아내는 집을 고치고, 남편은 시를 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마더!>(2017)는 감독 스스로가 <로즈마리의 아기>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공언했던 영화다. 포스터에서부터 대놓고 그 영화를 오마주하고 있다. 술에 취한 듯 하룻밤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당시 연애 중이던 제니퍼 로렌스는 대본을 읽자마자 방 밖으로 집어던졌다고 한다. 영화가 개봉하고 평단 및 관객에게서 호불호가 극단으로 갈리는 평가를 받은 이후, 둘은 연인 관계를 청산했다. 영화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연배우와 감독 사이의 연애 가십이라 그냥 듣고 넘길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할까. 이 사실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다 읽고, 혹은 영화를 다 보고 각자 판단해 볼 만하되, 쓸모없는 추측을 떠들어대지는 말기로 하자. 어쨌거나 남의 사생활이다.
<마더!>는 여러 관점, 다양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다. 기독교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빤히 알 수 있을 상징들(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등)이 괴팍하게 변용되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악행이 무자비하게 자행된다. 주인공 부부 관점에서 보자면 등장인물 모두 낯선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모든 낯선 사람들이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게 스토리의 전부다. 하지만 그 가느다란(?) 줄거리에 들러붙은 상징과 은유들은 기괴할 정도로 풍부하다. 가히 스크린을 폭발시켜 버릴 듯한 영상미의 아수라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시인인 남편(하비에르 바르뎀)과 아내(제니퍼 로렌스)는 인적 드문 교외 어느 벌판에 빅토리아 풍으로 지어진 저택에서 단둘이 살고 있다. 나이 차가 많이 나 보이는데, 남편은 살던 집에 화재가 난 이후 자신의 기억 및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한다. 아내는 야무진 손매로 집을 수리하고, 남편은 화재 이후 잘 써지지 않는 시를 쓰고자 애쓴다. 일견, 교외의 한적한 풍경처럼만 보인다. 영화 속에서 둘은 이름이 없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도 모두 무명(無名)이다.
햇빛은 화사하나,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어둡다
첫 장면을 보자. 화사한 햇빛이 드는 침대에서 아내가 잠을 깬다. 옆자리에 남편이 없다. “여보!” 하고 남편을 찾는다. 그러나, 항상 곁에 있는 듯 여겨지는 남편은 아내가 꼭 필요로 할 때 곁을 비운다. 마지막 장면도 똑같다. 남편은 물리적으론 늘 아내 곁을 지키지만, 아내의 마음속 어디에도 (아내가 원하는) 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수한 낯선 사람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궤멸하는 집. 추상화시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은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조용하던 집에 웬 낯선 남자(에드 해리스)가 찾아온다. 자신을 정형외과 의사라고 자처라는 이 남자는 골초에 알코올 중독자다. 남편은 남자를 다정하게 반기지만, 아내는 탐탁지 않다. 그럼에도 남자를 환대하는 남편의 뜻에 거슬리지 않으려 차도 끓여주고 식사도 제공한다. 심지어 잠자리까지 내준다. 남자는 사양하는 듯하지만, 뻔뻔하게 방 하나를 꿰차고선 아내가 만류하는 실내 흡연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래도 남편은 태연하다. 아내는 혼자 분을 삼킨다. 남자는 남편이 자신이 애독하는 시를 쓴 사람이란 걸 알곤 더 뻔뻔스러워진다. 그가 남편을 스토킹하다시피 하는 애독자였다는 건 얼마 안 가 밝혀진다. 남자는 일부러 그 집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던 차에 웬 중년여성(미셸 파이퍼)이 나타난다. 남자의 아내다. 남자보다 더 뻔뻔스럽다. 아이가 없는 시인의 아내에게 갖은 오지랖을 부리면서 주접을 떤다. 아내는 신경증이 극에 달한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그들을 반기고, 음식을 내준다. 의사의 아내는 집안 곳곳을 자기 집인 양 들쑤시고 다닌다. 그러다가 웬 젊은 남성 둘이 나타나 소동을 피우며 싸움박질을 일삼는다. 중년 부부의 아들들이다. 그러다가 동생이 사망한다. 그 아들의 장례식이 또 저택에서 벌어진다. 별의별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은 채 난입한다. 시인 남편이 추도사를 읊고 파티가 열린다. 집은 이미 부부의 것이 아니다. 아내가 꿈꾸던 행복은 풍비박산이다. 여기까지를 임의로 1막이라 나눌 수 있다.
사람은 좀비나 다름없고, 세상은 지옥이다
2막으로 넘어서면 더 극악해진다. 1막 마지막 장면이 흥미로운데, 요란법석 장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물러가자 부부가 다툰다. 아내가 남편의 성적 불능 및 불임 상태를 암시하는 듯한 토로를 하자, 남편이 거칠게 아내를 몰아붙인다. 강압적으로 시작된 교합 중에 아내가 절정을 맛보다. 그러곤 부부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 첫 장면처럼 햇빛이 화사하다. 아내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느낀다. 남편에게 고백한다. 장면이 바뀌면 아내의 배가 만삭이다. 남편은 흡사 뮤즈라도 만난 듯 갑자기 시를 줄줄 써낸다.
영화는 이때부터 더 참혹해진다. 남편은 기필코 새로운 시를 써내고 출판까지 해서 큰 성공을 맛본다. 아내는 항상 남편이 아름다운 시를 다시 쓸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희망이 커다란 재앙이 되어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다.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아기를 뱃속에 품었지만, 그 역시 재앙의 씨가 되고 화근이 된다. 집은 의사 부부의 소동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타인들의 점령지가 되어 난장판으로 변한다. 흡사 좀비 떼가 들이닥친 것만 같은 풍경인데, 언뜻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로즈마리의 아기>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같은 연도(1968)에 첫 개봉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거의 확증처럼 다가온다. 물론, 감독의 작의인지 우연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살인, 질투, 폭력, 상실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부정적 감정 및 행동이 저택을 궤멸시키면서 저택은 전쟁터가 된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군인들이 몰아닥쳐 살상을 일삼는다. 적군도 아군도 없다. 인간 자체가 그저 남을 괴롭히고 혼자 살려고 발버둥치면서도 사랑이니 구원이니 하는 덕목들을 생존의 빌미로 뇌까리는 괴물에 불과하다. 일군의 무리로부터 시인은 위대하다고 칭송되나 정작 자신의 아내를 보살필 줄 모르고, 비교(秘敎) 교주를 빙자한 한 인물은 아내의 아이를 봉헌물 삼으려 한다. 그러다 결국, 광기에 사로잡힌 아내가 저택에 불을 지른다. 지옥이 그렇게 정화된다. 아니, 악몽에서 깬 것이거나 혼자 상상하던 불안이 제풀에 가라앉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지옥의 시간엔 앞뒤가 없다
앞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했었다. 빼박았다 싶을 정도로 똑같은 장면이다. 아내가 “여보!”하면서 엔드크레딧이 오른다. 그것 말고도 비슷하게 반복되는 장면이 또 있다. 불타 잿빛으로 변한 집이 은은한 베이지색으로 변하는 풍경. 영화는 그렇게 시작했다가 그렇게 끝난다. 2시간 동안의 소동을 자연스럽게 열었다 여미듯 그 변화가 천연덕스럽다.
영화 속에서 이성적으로 납득할 만한 시간 순환은 없다. 어차피 모든 게 상징이자 은유로 작용하는 거대한 악몽의 스펙터클이었기에 합리적인 인과를 따질 계제도 없다. 불타서 재가 돼버린 집은 다시 뼈대만 남고, 시를 썼다고는 하나, 영화 속에서 남편이 쓴 시는 한 줄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 같지만, 그 사랑은 늘 빈자리다. 남편은 악마를 끌어모으는 사람이고, 태어난 아이는 또 다른 비극이거나 지옥의 발화점이 된다.
시란 자기 안의 타인을 불러내는 일!

그 ‘지옥’이 무엇을 환유하는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어쩌면 남편이 쓴 시 자체가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의 원본일지도 모른다. 반복건대, 그 시는 단 한 번도 누구에 의해서도 읽혀지지 않는다. 썼다고 하나 보여주지 않고, 누군가 읽었다고 하나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다. 어떤 시인은 ‘시란 자신 안의 타인을 불러내는 일’이라 밝힌 적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하룻밤 만에 썼다고 했다. 시는 가끔 그렇게 쓰여진다. 그러다 금세 잊히기도 하지만, 오래도록 질기게 남아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을 새기기도 한다. 삭힌 채 내버려 뒀던 그 화인이 새삼 불타오를 때 어떤 괴상한 시가 써질 때도 있다. 여기까지만 하자. 이 영화는 길게 말할 게 없다. 아니, 누군가에겐 곱게 새로 지었다가 금세 다 타버렸기에 다시 훑고 여러 번 돌려봐야 할 것 투성이일지 모른다. 모든 좋은 시는 그렇게 재독 삼독,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아무리 이해했다 해도 아침에 깨어난 아내 곁에 “여보!”는 늘 없을 공산이 크다. 장담할 순 없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다. 시란 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