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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세기말의 사랑〉임선애 감독, “우리 영화는 호구들의 사랑”

이진주기자
임선애 감독 (사진 출처=(주)엔케이컨텐츠)
임선애 감독 (사진 출처=(주)엔케이컨텐츠)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 두 번째 결과물이 첫 번째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학생에게는 2학년이, 가수에게는 2집이, 영화감독에게는 두 번째 작품이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특히 이미 한 번의 호평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짓궂은 징크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은 지난 2020년 <69세>로 감독 데뷔를 했다. 노인 성폭행이라는 까다로운 소재를 다룬 이 작품은 국내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KNN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호평을 받은 작품에 선사하는 상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4년 후, 임선애 감독이 <세기말의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세기말의 사랑>은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의 또 다른 ‘첫 번째 작품’에 가깝다. 그는 한 번 맛본 성공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되려 전작의 극단에 서려는 듯했다. 늘 새로운 것을 탐미하고자 눈을 반짝이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을 만나보았다.

 

영화가 드디어 개봉했다. 기분이 어떤가. *인터뷰를 진행한 날이 <세기말의 사랑> 개봉 당일이었다.

영화는 개봉이 꽃인 것 같다. 관객들과 만날 때 ‘역사가 이제 완성이 됐구나’라고 느낀다. 그래서 이제 좀 짐을 덜어낸 느낌도 든다. 어차피 이제 제가 할 건 다 했기 때문에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할 뿐이다. 첫 영화 <69세> 때에는 좋지 않은 평을 보면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하는 야속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좀 담담하다. 오히려 ‘맞아, 그게 좀 문제였어’하며 인정하는 부분도 생겼다. (웃음)

 

‘세기말’이라는 키워드 가져오게 된 모티브는 무엇인가.

원래 이 작품은 한 10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작품으로 쓴 시나리오이다. 그때는 2012년이었다. 그러다 다시 이 영화를 준비할 때 읽어보니까 많이 낡아 있더라. 그래서 고민을 하던 차에 ‘영미’(이유영)의 고백을 유발할 만한 포인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영미는 자기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인데 그 인물이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면 당장 내일 세상이 종말해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1999년 말, 2000년 초를 배경으로 했다. 더불어 영미의 외모를 비하하는 사람들이 칭하는 별명이 '세기말'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안과 설렘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였던 세기말이 영미이랑 잘 맞는 것 같았다.

 

실제 감독님의 세기말은 어떠했나. 비상식량을 사고 파일을 백업했다고 하던데.

그때 22살쯤이었다. 미대를 나왔지만 영화에 대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걸 진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안했다. 새천년이 되면 밀레니엄 버그(일명 Y2K로 컴퓨터가 2000년도를 인식하지 못해 결함이 생긴다는 당시 가설)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 영화 파일과 시나리오를 백업해놨다. 전기, 가스가 끊길 수 있다고 해서 비상식량도 챙겨놨던 걸로 기억한다.

 

2000년 1월 1일은 남동생과 집에서 TV를 보았다. 뉴스에서 새천년에 태어난 첫 아기와 국내에 입국한 사람에게 꽃다발을 수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모든 게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흥미로웠다. 막상 내 삶은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 초반 흑백으로 진행된다. 새천년이 되고나서 컬러로 바뀌는데 그러한 색의 변화를 준 이유가 있나.

<세기말의 사랑>은 무채색의 삶을 살던 영미가 새천년이 되어 컬러풀한 세상으로 나와 자기 색을 찾는 이야기이다. 영미가 교도소를 들어가기 전과 후를 서로 다른 기조로 나누기 위해 흑백과 컬러를 사용했다.

 

영미는 소심하고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면만 있는 인물은 아니다. 머플러 안에서 자신을 욕하는 이들에게 작게 욕을 할 정도의 용기는 있다. 그래서 흑백을 우리의 선입견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다양한 색을 가진 영미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줄곧 신고 나오는 신발 색이 그 왜곡을 느끼게 한다. 흑백 화면 속에서는 어둡고 지저분한 무채색의 신발로 보이는데 출소 후 컬러의 세상에서는 쨍한 핑크색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기말의 사랑>은 전작인 <69세>와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전작이 어둡고 단정한 느낌이라면 이번 작품은 젊고 힙하다. 감독의 의도가 담긴 기획인가.

<69세>는 내가 많이 개입하기보다는 조금 동떨어져서 바라보려 했다. 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찍기보다 뒤통수를 많이 보여준다거나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앵글들이 많았다. 그런 영화의 톤에 맞추어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모티브로 푸른색을 많이 사용했다.

 

<69세>가 끝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할 때 컬러풀한 영화를 하고 싶었다. 안 해본 것에 대한 욕심이 있다. 그래서 레퍼런스로 마리아 스바르보바 작가의 작품을 삼았다. 비비드한 색감이 특징적인데, 그 작품이 <세기말의 사랑>의 색보정 과정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거기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를 보고는 레트로한 색감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영화가 실제 그 시대보다 더 복고적 느낌이 가미될 수 있도록 상상력을 발휘했다.

작가 마리아 스바르보바(사진 왼쪽, 사진 출처=인스타그램 @maria.svarbova)/넷플릭스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사진 출처= 넷플릭스)
작가 마리아 스바르보바(사진 왼쪽, 사진 출처=인스타그램 @maria.svarbova)/넷플릭스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사진 출처= 넷플릭스)

전작 <69세>의 동인(기주봉)과 도영(노재원)은 모두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두 작품에서 모두 비현실적인 남성 캐릭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우연인가.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나 자신에 대해 잘 들여다보고 나니 답을 찾았다. 나는 꽤나 수평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와 남편 모두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그래서 나에게 동인과 도영이 마냥 판타지는 아니다. 만약 내가 가부장적인 남성 캐릭터에 대해 써야 한다면 오히려 스테레오타입의 대사들이 나올 것 같다. 흔히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가부장적인 남성이 아닌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임선애 감독은 <69세>의 ‘동인’이 남편의 이름에게서 따왔다고 전했다. ‘남편이 후에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웃어보이는 임선애 감독에게서 선량함에 대한 믿음이 보였다. “상냥한 사람들에게 무장해제 당해요. 아파트 주차장을 나오는데 저 멀리서 먼저 인사를 해주시는 분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 따뜻함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해요.”

임선애 감독 (사진 출처=(주)엔케이컨텐츠)​
임선애 감독 (사진 출처=(주)엔케이컨텐츠)​

영화에 등장하는 호구1 기훈(김기리)과 호구2 준(문동혁)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는 ‘호구스러움’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감독님이 호구 캐릭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세기말의 사랑> 속 인물들은 대부분이 호구 같다. 유진과 도영, 유진과 영미는 각자 생존과 돈이라는 문제가 걸려 있는 관계이고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관계는, 그리고 사랑은 서로의 결핍된 부분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 완성된다.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호구의 특징은 본인이 호구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세기말의 사랑> 속 인물들은 스스로 호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미 역의 이유영(왼쪽), 유진 역의 임선우
영미 역의 이유영(왼쪽), 유진 역의 임선우

영미 역의 이유영 배우와 유진 역의 임선우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현장에서 두 배우는 어땠나.

이유영 배우를 만나기 전에 그가 가진 특유의 순수함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간 이유영 배우에게서 보지 못한 얼굴을 꺼내고 싶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드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긍정적인 답을 보내줬다. 이유영 배우는 굉장히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이다. 머리로만 떠올렸던 영미에게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 이유영 배우의 연기에서 보였다. 귀여우면서도 뒤틀린, 뭔가 이상한 리액션이 보일 때 ‘영미스럽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임선우 배우를 만났다. 유진 역으로 이유영 배우와 대비가 될 배우를 모시고 싶었다. 그중 임선우 배우가 적격이었다. 이유영 배우는 하얗고 선이 굵은 외모라면 임선우 배우는 짙은 피부색에 선이 가늘다. 목소리 역시 달랐다. 이유영 배우는 하이톤인데 비해 임선우 배우는 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선우씨가 단정하거나 도도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나는 그 안에서 배우의 개구진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유진이 탄생했다. 결과적으로 도화지 같은 두 배우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꺼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전할 관람 포인트를 말해달라.

관객분들이 보시다가 설명이 친절하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것들을 다 해소가 되지 않더라도 인물의 행동이나 인물 간의 관계 안에서 조금 더 살펴봐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