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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의 향을 가미한 바삭한 휴먼드라마, 〈세기말의 사랑〉후기

이진주기자
​〈세기말의 사랑〉〈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세기말의 사랑〉

오해했다. <세기말의 사랑>은 (일반적 의미의)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사랑, 그것도 세기말의 사랑이라면 얼마나 애틋하고 강렬할지 기대하고 들어간 극장에서는 두 여자의 톡톡 튀는 생존기가 펼쳐졌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69세>(2020)로 성공적으로 장편영화에 데뷔한 임선애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또다시 부산을 찾았다. 그리고 1월 24일, <세기말의 사랑>이 전국의 관객들을 만난다. 미리 보고 온 <세기말의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공유한다.

 

무색(無色)과 유색(有色)사이

지난 18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임선애 감독은 <세기말의 사랑>이 “색을 잃은 인물들이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 전했다. 그만큼 영화에서 ‘색’은 중요한 요소이다.

1999년 12월, 소심한 성격에다 못난 외모의 ‘영미’(이유영)는 새천년이 오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불안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착실히 회사에 나와 일을 하는 영미의 유일한 낙은 신입 배송 직원 ‘도영’(노재원)을 훔쳐보는 것이다. 그녀의 짝사랑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미에게는 사랑 고백보다 회삿돈을 슬쩍한 도영의 구멍을 메꿔주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이다.

흑백으로 시작하는 <세기말의 사랑>은 도영의 공금 횡령 방조로 새천년을 교도소에서 맞이한 영미가 세상으로 나오면서 색을 입는다. 임 감독은 이에 대해 “색으로 세기말과 새천년을 나눈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임 감독의 흑백은 선입견에서 출발한다. 회사와 장례식장, 경찰서에서의 영미는 주변의 오해와 무관심 속에 색을 잃었다. 모든 색을 흑과 백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영미는 차라리 종말이 오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홀로 새천년을 맞이한 영미는 그제야 자신을 찾는다. 그때 영미 앞에 껄끄러운 이들이 나타나며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은 1999년 12월의 마지막주에 혹시나 세상이 멸망하지 않을까 불안했다고 한다. 라면과 휴지를 사재기하고 파일을 백업하는 등 행여나 올 마지막을 준비하기도 했단다. 다행스럽게 무사히 새천년을 맞이하며 안도한 임 감독은 학교를 휴학하고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영화를 경험을 하며 얻은 새천년의 마음가짐을 여전히 잊지 않는다.

“영미의 삶은 출소 후 바닥을 쳤지만,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겹 쌓아올린 머플러 속에 얼굴을 감추고 다니던 영미는 출소 후 만난 ‘준’(문동혁)이 염색해준 눈에 띄게 붉은 머리에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처 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사랑의 양태

<세기말의 사랑>의 영미와 유진(임선우)은 보편적 사회 기준에 미달되는 인물이다. 영미는 ‘세기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못난 외모의 소유자이다. 그는 언제나 주눅 들어 있어 싫은 소리 한번 시원하게 하지 못한다. 한편, 연예인 뺨치는 외모의 소유자인 유진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인물이다. 근육병을 앓고 있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결함이 있는 것은 영미와 유진뿐이 아니다. 도영 역시 아버지가 남긴 빚으로 고통을 받고 준은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돈이 없다. 이들에게 삶은 친절하지 않다. 상처 난 이들은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애쓴다.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도영을 사랑한 두 여자는 결국 그를 구해내지 못했다. 시련 앞에 영미와 유진은 자조한다.

“나는 왜 도영이를 구하고 싶었을까?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유진)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 주제넘게.”(영미)

<세기말의 사랑> 중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놓지 않는다. 유진은 준이 자신의 구두를 팔아 돈을 챙긴다는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영미는 가출한 유진의 조카에게 사랑이 담긴 그림을 건넨다. ‘주제넘게’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맞춤형 인물을 구축한 배우 이유영, 임선우

임선애 감독은 배우를 캐스팅할 때 ‘상반된 이미지와 분위기’를 기준으로 했다고 밝혔다. 기존 이미지와의 차별성, 각 배우 간의 대비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게 <세기말의 사랑>에 캐스팅된 이유영, 임선우 두 배우는 영미와 유진을 극에 최적화된 인물로 탄생시켰다.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속 영미와 유진은 톡톡 튀는 극의 성격을 반영하듯 내외적으로 다소 과장된 인물이다. 영미는 툭 튀어나온 덧니로 인해 발음이 어눌한데다 붉은색의 똑단발 머리를 했다. 한편 유진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 사이로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톡 쏘아댄다. 여타 작품에서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캐릭터와는 거리감이 있는 이 두 인물은 <세기말의 사랑>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 이는 이유영, 임선우 두 배우의 몫이 크다.

〈세기말의 사랑〉 영미역의 이유영
〈세기말의 사랑〉 영미역의 이유영

2014년 저예산 예술영화 <봄>으로 데뷔한 이유영은 이 작품으로 밀라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대중들은 이유영의 선명한 갈색 눈동자와 부드러운 말투를 통해 청순가련형 여배우로 기억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그간 다양한 연기를 시도해왔다. <봄>(2014), <간신>(2015)에서는 수위 높은 노출을 감행했을 뿐 아니라 <원더풀 고스트>(2018)에서는 억척스럽고 똑 부러지는 장사꾼을, <디바>(2018)에서는 비밀을 가진 섬뜩한 다이빙 선수를 맡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세기말의 사랑> 속 영미는 이유영에게서 지금껏 보지 못한 얼굴을 보여준다. 이유영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비호감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사랑스러움을 놓치지 않는다.

〈세기말의 사랑〉 유진 역의 임선우
〈세기말의 사랑〉 유진 역의 임선우

배우 임선우는 이번 작품으로 그의 이름을 완전히 각인시켰다. 2017년 <더테이블>로 상업 영화에 데뷔한 그는 이후 단편과 장편, 독립과 상업을 가리지 않고 ‘열일’했다. 2021년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수상한 임선우는 이번 작품에서 찰진 말맛을 보여주었다. ‘지랄 1급’답게 톡 쏘는 대사들이 많은 유진이 분위기를 해치는 인물이 아닌 오히려 극의 재미를 살려주는 캐릭터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지난해 <비밀의 언덕>에 이어 존재감을 입증한 임선우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