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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의 카리스마 넘치는 고모, 화림의 무당 대선배 박정자 배우를 아십니까

주성철편집장

 

박정자 배우
박정자 배우

 

김기영 감독이 1970년대 들어 발굴한 배우는 <화녀>(1971)의 윤여정만 있는 게 아니다. 바로 <파묘>에서 파묘를 의뢰한 집안의 고모로 출연한 대배우 박정자 역시 김기영 감독 영화로 스크린에 처음 등장했다. 윤여정이 <화녀>에 이어 이듬해 출연한 <충녀>(1972)에는 특유의 숏컷 헤어스타일과 중저음 목소리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마담 역할의 새 배우가 눈에 띄었다. 호스티스로 일하다 달아난 명자(윤여정)를 잡아다가 “돈은 아무나 버는 게 아냐. 세상은 프로만이 살 수 있어. 넌 나 때문에 살았다. 반반씩 나눠 먹기로 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대신 배신은 안 된다”고 경고하며, 동식(남궁원)의 집으로 들어가게끔 주선하던 마담이 바로 <충녀>로 데뷔한 박정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박정자와 함께 당시 동아방송 산하 DBS 성우극회 1기 성우 동기였던 사미자도 있었다.

〈충녀〉사진 왼쪽부터 박정자, 사미자, 윤여정​
〈충녀〉사진 왼쪽부터 박정자, 사미자, 윤여정​

 

이후 박정자는 <반금련>(1974),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 <흙>(1978) 등 김기영 감독 영화들로 입지를 다졌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에서는 모범수 특사로 어머니 성묘를 가는 숙영(김지미)을 감시하는 교도관 역할로, 대선배 김지미와 열차 안에서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쳤다. 영화 속 열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도죄로 쫓기고 있던 남자 훈(이정길)과 담뱃불을 나눠 붙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특별휴가를 나온 죄수의 감정을 통제하고 정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입에 계속 사탕을 물려준다는 발상도 무척이나 김기영 감독다운 작품이었다. <육체의 약속>으로 그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김지미는 여우주연상, 박정자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육체의 약속〉
〈육체의 약속〉

특히 <이어도>에서는 섬을 지배하는 무당 역할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파묘>에서 화림(김고은)이 대살굿을 하려고 할 때, 마치 그녀가 참관(!)하는 것처럼 현장에 찾아올 때 전율이 일었다. 장재현 감독이 말하길, ‘허리가 끊어진 이야기’를 하는 영화에서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의 허리를 이어주는’ 배우가 바로 박정자인 것.

〈이어도〉 사진 왼쪽부터 박정자, 이화시
〈이어도〉 사진 왼쪽부터 박정자, 이화시

하지만 이후 하길종 감독의 <한네의 승천>(1977), 유현목 감독의 <장마>(1979),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이장호 감독의 <과부춤>(1984),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5) 등 주목할 만한 여러 대표 한국 감독들과 작업했지만,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이 더 확장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1980년대 작품들을 살펴보자면, <만다라>에서 법운 스님(안성기)의 어머니로 잠깐 출연했다. 어려서 아들을 버린 어머니 역할이었고, 뒤늦게 스님이 된 아들을 만나서는 “할 말이 없구나. 죄 많은 여자라서. 피가 뜨거웠던 탓이었어”라고 말했다. ‘엄마를 용서해다오’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고, 그저 한때 자신의 피가 뜨거웠다는 말만 하던 그 모습이 멋졌다.

〈만다라〉
〈만다라〉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굴레 속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양반댁 마님(김용선)와 그 씨받이 대리모 사월(원미경)의 동반된 비극을 그린 <자녀목>에서는, 나라에서 두 차례나 열녀문을 내린 열녀 가문의 노마나님으로 출연했다. ‘자녀목’(恣女木)은 당시 음행을 저지른 여자를 처단하는데 이용한 나무다. 여기서 노마나님은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캐릭터로, 열녀문이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위선과 인습의 상징이었다.

〈자녀목〉
〈자녀목〉

1990년대 이후 <웨스턴 애비뉴>(1993), <말미잘>(1995)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영화배우 활동을 그만두고 연극무대에 집중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드디어 <박수건달>(2013)에 다시 왕무당 역할로 등장했다. 조직으로부터 배신당한 건달 광호(박신양)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벌써 죽었을 놈인데 어째 살았노. 조심히 댕기그래이”라고 말을 꺼낸 뒤부터, 광호는 낮에는 박수무당, 밤에는 건달이라는 이중생활을 하게 된다. 몇 년 뒤 <마스터>(2016)에서도 박정자를 볼 수 있었다. 정관계를 넘나드는 금융사기범 진회장(이병헌)을 잡기 위해 현금이 필요한 지능범죄수사팀장 김재명(강동원)과 박장군(김우빈)에게 “잘못되면 (나의) 재산 절반이 날아간다. 목숨하고 바꿀 수 없는 거야”라며 “(진회장을 잡아서) 내가 세운 법, 내가 지키게 도와야지”라며 선뜻 현금 3조를 빌려주는 ‘큰손’ 신선생 역할이었다. 잠깐 등장한 ‘특별출연’이었지만 강동원과 김우빈을 향해 거침없이 이 새끼, 저 새끼, 라 부르던 모습이 카리스마 넘쳤다.

〈박수무당〉
〈박수무당〉

 

그 외 박정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1989)의 국내 더빙판에서 우르슬라 목소리를 맡았던 성우라는 것이다. 당시 디즈니 본사에서도 ‘우리가 상상한 우르슬라 목소리 그 자체’라며 박정자의 음성과 노래를 격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브라더 베어>(2004) OST 녹음을 시작으로, 이후 30년 동안 <겨울왕국> <모아나> <미녀와 야수>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 더빙을 맡아오면서 디즈니로부터 감사패를 무려 3번이나 받은 배우 정영주도 한 인터뷰에서 “가장 처음 오디션을 본 작품은 <인어공주>의 우르슬라 역할이었다. 하지만 대선배님인 박정자 배우도 지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탈락을 예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정영주는 지난해 개봉한 롭 마샬의 <인어공주>(2023) 국내 더빙판에서 드디어 우르슬라 목소리를 연기했다.

 

〈마스터〉
〈마스터〉

 

<기생충>(2019)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모두가 기다려온 1차 예고편의 내레이터가 박정자였다는 사실도 화제였다. 봉준호 감독이 특별히 부탁해 이뤄진 것으로,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라는 기우(최우식)의 목소리에 이어 “그건 엄연한 범죄입니다”라고 말하고,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기택(송강호)의 얘기에 “과연 그럴까요?”라고 의문을 갖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박정자였다. 그처럼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박정자가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가족희비극, 기생충!”을 외치고 기침을 콜록이며 1차 예고편이 마무리됐다. 영화가 공개되기 한참 전이었기에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개봉 이후 일부 팬들은 영화 속 문광(이정은)이 말했던 박사장(이선균)의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어서 살았던 건축가 남궁현자 선생의 목소리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이후 박정자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2022년 고 강수연 배우의 장례식장이었다.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았던 박정자는 무려 30여 년 전 <웨스턴 애비뉴> 딱 한 편의 영화를 작업한 이후로 강수연 배우와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강수연은) 워낙 총명하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연극무대로 끌어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같이 하자고 한 적도 있었는데, 영화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그러지 못했다”며 고인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처럼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오랜 시간 활발하게 활동한 대배우 박정자를 <파묘>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