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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으로 풀어내는 불가능에 대한 사랑, 〈패스트 라이브즈〉

이진주기자
영화〈패스트 라이브즈〉
영화〈패스트 라이브즈〉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금의환향했다. 지난 2월 28일 오후 서울 용산아이파크몰 내 용산 CGV에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언론시사회 및 기자간담회가 진행되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래 현재까지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베를린영화제 등 유수의 시상식에서 75개의 상을 받았고, 200번 이상 노미네이트되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플라워 킬링 문> 마틴 스코세이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대니얼 쉐이너트 감독 등 할리우드 유명 감독들의 극찬이 이어지며 연일 화제를 몰고 있다.


 

영화〈패스트 라이브즈〉기자간담회 현장. 배우 유태오(왼쪽), 감독 셀린 송
영화〈패스트 라이브즈〉기자간담회 현장. 배우 유태오(왼쪽), 감독 셀린 송

 

이날 기자 간담회에는 감독 셀린 송과 해성 역의 배우 유태오, CJ ENM 영화사업부장 고경범이 참석했다. 셀린 송 감독은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에 대해 “영광이다”라고 말하며 데뷔작으로서 로열티가 된 것이 꿈만 같다고 전했다. 유태오 역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에 대해 “과대평가”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셀린 송 감독은 <패스트 라이브즈>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어느 날 밤 한국에서 놀러 온 어린 시절 친구와 나 그리고 남편이 같이 술을 마셨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번역을 해주는데, 나 자신의 스토리를 내가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에서 소재를 떠올렸음을 전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지점에서 시작한다.

 

해성(유태오)와 나영(그레타 리), 두 남녀의 24년에 걸친 사랑과 엇나가는 인연에 대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단순한 서사 구조와 플롯을 가지고 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쌓아가던 12살의 해성과 나영은 나영의 가족이 토론토로 이민을 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나고 나영은 ‘노라’가 되어 뉴욕에서 작가로의 꿈을 키우고 있고 해성은 대학생이 되었다. 우연히 SNS를 통해 연락이 닿게 된 그들은 요동치는 마음으로 연을 이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뉴욕과 서울의 거리는 가까워지려는 그들을 더욱 좌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영과 해성은 단 한마디의 말로 다시 ‘남’이 되었다. 또다시 12년이 났다. 30대가 되어버린 해성은 대뜸 나영에게 간다. 13시간의 긴 여정 끝에 만난 나영의 곁에는 7년째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남편 아서가 있다.

 

영화〈패스트 라이브즈〉
영화〈패스트 라이브즈〉

 

영화는 반복적으로 ‘인연(因緣)’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한글 그대로 발화되는 ‘인연’은 셀린 송 감독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이다. 그는 상응하는 적확한 영단어가 없었다며 “그럼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전했다. ‘전생’이라는 뜻의 제목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해성과 나영, 나영과 아서 등 극 중 모든 관계를 불교적 교리에서 기인한 ‘인연’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10대에 처음 만나 30대가 되어 재회한 둘은 ‘만약’이라는 단어로 서로의 가능성을 재본다. 숱한 가정들은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지라 그들의 애틋함은 공기 중으로 허무하게 흩어진다.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알 법한 나이가 되어버린 그들은 결국 담백한 인사를 건넨다. ‘다음에 만나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헤어진 그들은 정말 다시 만날까? 그들의 만남은 애초부터 이별을 위한 준비였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볼수록 그들의 현재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운명에 고개를 숙인 이들에게 ‘거자필반(去者必反)’은 없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특히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한국계 감독과 배우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셀린 송 감독은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민을 간 한국계 이민자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로 감독 데뷔를 한 그의 아버지는 영화 <넘버3>(1997), <세기말>(1999) 등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송능한 감독이다. 셀린 송 감독은 아버지가 <넘버3> 작업 이후 벤쿠버 영화제를 갔다가 이민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배유 유태오(왼쪽), 그레타 리
배유 유태오(왼쪽), 그레타 리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주인공 ‘해성’과 ‘나영’은 유태오와 그레타 리가 맡았다.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인지도를 쌓은 유태오는 독일 태생의 한국 배우이다. 2009년 영화 <여배우들>로 데뷔한 그는 2019년 한국계 소련 가수 빅토르 초이(최)의 일생을 다룬 러시아 영화 <레토>로 국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한편, 그레타 리는 미국 출생의 한국계 배우이다. 의사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한국에서 만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레타 리를 낳아 키웠다.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뮤지컬을 공부한 그는 뉴욕으로 이주해 배우로 활동했다.

 

영화〈패스트 라이브즈〉
영화〈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에 붙는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영화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동시대적 감정에 집중한다. 이것이 영화 <미나리>(2021), 넷플릭스 <성난사람들>(2023) 등 근래 세계적으로 각광받은 한국계 감독의 작품과 다른 지점이다. 이민 1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2021)와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 등은 명확하게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고충에 대해 논하고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2023)은 분노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되 주요 인물들의 아시아적 배경이 이에 힘을 실어준 경우이다. 한편, <패스트 라이브즈>는 남녀의 어긋난 운명에 대한 애틋함을 따뜻한 화면, 섬세한 연출, 담담한 연기로 담아내 관객의 동의를 받아낸다. 소주와 삼겹살,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의 골목 등은 배경으로서 두 인물 간의 거리감을 부각시키는 제한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패스트 라이브즈〉기자간담회 현장. 배우 유태오(왼쪽), 감독 셀린 송
영화〈패스트 라이브즈〉기자간담회 현장. 배우 유태오(왼쪽), 감독 셀린 송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해보다는 수용이 필요한 작품이다. ‘그렇다 치자’의 정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 특히 국내 관객들의 너그러움이 가장 필요한 곳은 배우들의 한국어 사용의 문제이다. 12살에 북미권으로 이주한 나영 역의 그레타 리는 납득할 수 있다고 해도 한국에서 나고 자라 영어에 익숙지 않은 해성 역의 유태오의 한국어 대사 처리는 다소 어색하게 들린다. 유태오라는 배우의 역사를 돌아볼 때 충분히 훌륭한 정도이지만 국내 관객들에게 해성이 '찐'한국인이라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모두가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끝이 난다. 해성은 한국으로 떠나고, 나영은 남편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내일을 맞을 것이다. 인연은 언제나 과거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