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알 듯, 동심(童心)은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순수하고 해맑고 투명하고…어쩌고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동심은 외려 너무 순수해서 더러워지기 쉽고, 너무 해맑아 혼탁해질 위험이 있으며, 너무 투명해서 새카매지기 십상이다. 유리 같지만, 그렇기에 자칫 깨지면 흉기가 되고, 자유롭지만 그래서 때로 기성 세계에 혼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감당 못할 동심의 유쾌한 횡포라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2023)은 현재 개봉 중인 영화다. 관객과 비평계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 다수다. 여러 영화제에서의 수상 소식도 들린다. 원작은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1992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이다. 작년에 한국에도 번역됐다. 책이 출간되면서 영화 개봉 홍보도 병행했던 것으로 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다.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제임스 조이스나 프란츠 카프카에 비견되는 작가라 알려졌는데, 2019년에 사망했다. 향년 85세. 1981년 대작 『라나크』(Lanark)로 찬사를 받으면서 데뷔했다. 그 작품은 예전에 번역 출간됐었으나 현재는 절판됐다. 조이스나 카프카를 떠올리게 했을 만큼 평범하고 사실적인 작품을 쓴 작가는 아니다. 원래는 벽화와 판화로 잘 알려진 화가였다. 소설 역시 초현실적인 화풍이 느껴질 정도로 요란하고 현란한 묘사와 상상력이 돋보인다.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도 그런 특징들이 잘 나타난다. 19세기 말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화면의 톤은 숫제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할 정도로 색감이 짙고 비현실적으로 과장돼 있다. 케이블카처럼 공중에 매달린 선을 따라 이동하는 택시가 당시 영국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기구 정도는 떠다녔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소소한 요소들이 만화적인 느낌을 더 극대화한다.
만화 같은 풍경, 만화 보다 더한 난동
이야기 전개 또한 만화 같은 구석이 많다. 소설은 보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구성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지만, 영화는 그중에서도 단선적이면서 분명한 플롯만을 따온 듯하다. 시작은 이러하다. 임신한 여인이 강에 뛰어내려 자살한다. 그 시체를 발견한 괴짜 의사가 뱃속 아이의 뇌를 시체의 머리에 이식해 부활시킨다. 성인의 체격과 외모를 갖춘 괴이한 아이가 그렇게 탄생한다. 언어를 갓 배운 아이처럼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더듬거리며 말하고, 행동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린다. 성질은 괴팍하고 잔인한 정도로 자기 욕망에만 충실하다. 아이의 이름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 시체를 발견하고 부활시킨 의사 갓윈 벡스터(윌렘 대포)의 성을 따왔다.

벨라는 갓윈을 ‘하나님 아버지’라 부른다(Godwin을 줄여 부르니 god이 맞긴 하다). 때론 ‘아버지’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이른바 자신을 탄생케 한 신이자 친부인 셈이다. 언행이 행동 발달장애인이나 다름없기에 외출이 통제된 상태에서 하녀 프림의 시중을 받으며 벡스터의 집 안에서만 놀고, 그 안에서만 사고를 친다. 프림에게 벨라는 애물단지 요물이나 진배없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벨라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천덕꾸러기 아이 서너 명이 한 몸에 살아있다 여겨도 과장만은 아닐 상황. 속이 뒤틀리면 물건과 집기를 내동댕이쳐 부숴버리기 일쑤다. 고드윈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면서 벨라는 점점 말도 행동도 정상(?)에 가까워진다.
대략 이 정도의 탄생 배경을 지닌 벨라가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면서 영화는 점점 황당무계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게 이 영화의 주제이자 재미이다. 보는 내내 입안에 웃음을 야금야금 물게 하다가 갑자기 빵 터지게 만드는 흐름이 눈 뗄 틈 없게 만든다. 빅토리아 시대의 풍속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허위와 모순의 체계를 풍자하고 까발리는 장면들이 연발하는데, 웃음 한번 터질 때마다 스트레스 수치가 뚝 떨어지는 걸 체감하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을 알고 나니 웃겨 죽을 것 같구나!

그 웃음은 일부러 웃기고자 보는 이의 호흡을 비틀어 당착에 맞닥뜨리게 하는 방식이 아니다. 현실 자체를 그저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 내재한 세계의 모순과 인간의 위선을 폭로하는 방식이다. 과거를 배경으로 현재를 짚으며 미래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는 장면들이 압권이다. 그러다 갑자기 진지하고 무거워진다. 벨라가 막 성인 여성의 몸과 의식을 갖추게 되면서 처음 탐닉하게 되는 건 남자와의 ‘뜨거운 뜀박질’이다. 굳이 설명 안 해도 어떤 행위인지 눈치챌 수 있을 거다.
부자이자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벨라를 꾀어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드윈의 저택에서만 갇혀 살던 벨라로서는 일종의 성인식이자 첫 일탈인 셈이다. 던컨과의 ‘뜨거운 뜀박질’에 몰두하고 다종다양한 사람들과 대면하면서 벨라는 인간의 본질과 세계의 질서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방식이 갓 걸음마를 뗀 아이가 천방지축 뛰어노는 꼴이나 다름없다. 소위 ‘우다다놀이’에 빠진 아기고양이를 연상케도 한다. 아, 유쾌하고 즐겁고 무대뽀인 이 아이를 세상은 어찌 받아들일꼬!
벨라가 이른바 ‘상류사회’의 매너와 법도를 아귀아귀 씹어 먹어대는 듯한 장면들도 통쾌하기 짝이 없다. 그저 ‘뜨거운 뜀박질 기술(?)’로 여성들을 희롱하는 걸 낙이자 자랑삼는 던컨은 바로 그 ‘뜨거운 뜀박질 기술(?)로 벨라에게 호되게 당한다. 돈 많고 인물 좋고 학벌 좋은 남성들이 여성을 막 대하면서 대외적으로 예의와 명성을 챙기려 드는 모습은 한국에서도 흔하다. 그런 행태에 보기 좋게 ’뻑큐!‘를 날리는 모습에 여성 관객들은 크게 환호할 만도 할 법하다. 애정 문제에 관한 한, 그 어떤 점잖아 보이는 남성도 닭 쫓다가 지붕 쳐다보면서 침만 질질 흘리는 개처럼 변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는 거니까.
닭 쫓던 개, 닭울음 소리로 울다
개와 닭 얘기가 나온 김에 첨언 하나. 갓윈은 과도한 의학적 탐구로 정신병자 취급받는 인물이다. 그건 갓윈의 아버지 탓이 크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의사였는데 어린 시절 갓윈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여 기형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갓윈의 외형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의 모습과 거의 빼다 박았다. 원작 소설 역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오마주하거나 풍자하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갓윈의 집에는 닮과 돼지, 개와 오리 등을 혼성 교배한 괴상한 동물들이 잔뜩 돌아다닌다. 마지막엔 등장인물 중 하나가 정말 닭처럼 변해 꼬꼬댁거리는 장면도 나온다. ‘닭 쫓던 개’란 속담이 안 떠오를 수 없는 판이다.

줄곧 우스꽝스럽기만 할 것 같던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진지하고 무거워진다. ’뜨거운 뜀박질‘의 본질을 알게 된 벨라가 또다시 몰두하게 되는 건 독서다. 영화 중 벨라가 읽는 책은 미국의 초절주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과 스피노자 등이다(마지막 장면도 벨라가 독서하는 모습인데,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검은 표지일 뿐, 저자도 제목도 적혀 있지 않다. 보기에 따라 이 역시 예민한 암시처럼 판단할 수도 있다). 영화 중반쯤, 벨라는 우연히 굶주려 죽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대오각성한다. 던컨을 몰락케 하는 것도 이 사실과 관련 있다. 벨라는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진짜 성인(’成人‘인 동시에 ’聖人‘)이 된다. 그러면서 세계의 만연한 패악과 맞서게 된다. 두 시간여를 낄낄대면서 보다가 마지막에 눈물이 찬연하게 맺히는 걸 주체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벨라의 진짜 혈통은?

사족 삼아 반복컨대, 이 작품은 원작도 영화도 메리 셸리와의 연관성을 떼어놓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서양문학사에서 아직까지도 희귀한 걸작으로 통한다.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되었고, 아류도 무수하고 변용도 셀 수 없다. 메리 셸리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아내였다. 그녀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된 계기도 문학사에서 유명한 에피소드다. 메리 셸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고드윈(앗 고드윈!?)은 당대 급진적인 아나키즘 사상가였고. 어머니는 페미니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다. 이쯤 되면 <가여운 것들>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 가계(家系)와 떼놓고 보기가 힘들 정도다. 선이든 악이든, 이념이든 행동이든 인간은 끊임없이 유전되는 일개 분자라는 사실 또한 덤으로 각성할 수 있다면, 공부해서 남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