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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이 마주한 디지털 성범죄의 현실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그려낸〈정순〉

추아영기자
〈정순〉포스터 (사진 출처 = 더쿱디스트리뷰션)
〈정순〉포스터 (사진 출처 = 더쿱디스트리뷰션)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선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정순>이 4월 17일에 개봉한다. <정순>은 무너진 일상 속에서도 결코 나다움을 잃지 않고, 곧은 걸음으로 다시 나아가려 하는 ‘정순’의 내일을 응원하는 영화다. 전 세계 19개 영화제에 초청되고, 총 8관왕을 기록하며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화제에 올랐다.


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정순>은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편견을 가시화한 영화 <69세><갈매기>에 이어 다시 한번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소외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다른 두 영화에서는 피해자가 세상과 투쟁하는 방식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정순>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 스스로 치유해가는 인물의 목소리를 담았다. 또 성범죄 피해 당사자를 대하는 주변인의 태도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숙고하게 만든다. 영화 <정순>을 먼저 살펴본 소감과 함께 간담회장에서 전한 감독의 말을 정리했다.


 

정순(김금순)
정순(김금순)


견과류 식품 공장에서 일하며 반복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정순(김금순).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힘들게 키운 딸 유진(윤금선아)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동네 토박이로 살아온 정순의 일상은 평온하다. 공장에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일을 완수하고, 틈날 때마다 동료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딸 유진과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겨준다. 그렇게 중년의 시간을 평범하게 보내던 정순에게 영수(조현우)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삶에는 균열이 생긴다.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찍었던 둘만의 은밀한 영상이 공장 직원들 사이에 유포되면서 그녀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디지털 성범죄 젊은 세대에만 국한된 문제라고 보는 시선 있어”
 

〈정순〉 스틸컷
〈정순〉 스틸컷


<정순>은 중년 여성이 직면한 디지털 성범죄의 현실을 드러낸다. 여타 영화들이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 대상으로 주로 젊은 세대를 그려온 것과 달리 <정순>은 홀로 딸을 키우고 남은 삶을 보내는 중년 여성 인물 ‘정순’이 디지털 성범죄를 마주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담았다. 정지혜 감독이 <정순> 시나리오를 쓴 계기는 그녀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정지혜 감독은 “영화 속 정순처럼 나도 식품 공장에서 생산직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곳에서 근무한 근로자들의 대부분은 중년 여성이었다.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그분들이 겪어왔던 삶의 경험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그때 그분들의 삶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후로 중년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서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료조사를 많이 했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디지털이라는 특성 때문에 젊은 세대에만 국한된 문제라고 보는 시선이 있다. 그런 편견으로 인해 소외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순>을 연출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연기파 배우 김금순 
 

〈정순〉 스틸컷
〈정순〉 스틸컷


딸 유진을 홀로 키워낸 억척스러운 엄마이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타는 소녀 같은 정순 역은 김금순 배우가 맡았다. 김금순 배우는 최근 드라마 <카지노><LTNS>, 영화 <브로커><비상선언><잠> 등 다양한 작품에서 주조연은 물론 단역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전방위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잠>에서는 무당 해궁할매 역을 맡아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등장하는 순간 공간이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고, 해당 장면에서 캐릭터가 선사한 카리스마가 후반부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극찬을 받았다. 정지혜 감독은 김금순 배우의 캐스팅 이유에 대해 “김금순 배우님을 단편 영화 <돌아오는 길엔>이라는 작품에서 처음 봤다. 그 작품에서 김금순 배우의 되게 담담하지만, 현실감을 잃지 않는 연기를 보고 굉장히 감탄했었다. 또 <사바하>에서는 강렬한 무당 연기를 보여주셨고, 단편 영화 <베란다>라는 작품에서는 무료하면서도 서늘한 얼굴을 보여주셨다. 김금순 배우의 다양한 얼굴을 발견하고, 극 내내 많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인물 정순을 잘 소화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생겨서 제안을 드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가해자 대 피해자’라는 기존 구도에서 진일보한 사려 깊은 시선
 

〈정순〉 스틸컷
〈정순〉 스틸컷


<정순>은 영화 <경아의 딸>과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를 마주한 후 달라진 모녀의 관계를 드러내 디지털 성범죄가 피해 당사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 모두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정순>은 기존의 ‘가해자 대 피해자’의 구도에서 더 진일보한 시선을 보인다.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것에 불필요한 플롯을 낭비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순이 받은 심리적 충격과 트라우마,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또 정순과 유진 두 모녀의 서로 다른 대처 방식을 통해 피해 당사자를 둘러싼 주변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가해자 영수의 자필 사과문 제출 이후 정순이 순순히 합의해 주면서 딸 유진과 갈등을 빚는다. 정순은 힘겨운 싸움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련을 극복하려 하지만, 정순보다 사건 해결에 더 주도적이었던 유진은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두 모녀의 대치된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피해 당사자를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정지혜 감독은 “우리 가까이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 주변을 조금 더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돌려주다 
 

〈정순〉 스틸컷
〈정순〉 스틸컷


정순은 영수와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달방을 나설 때마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 앉아 있는 여성 노숙자를 마주한다. 처음에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지만, 노숙자의 존재는 점점 정순의 마음에 걱정으로 자리 잡는다. 극 후반부 영수가 여성 노숙자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본 정순은 그녀에게 패딩을 벗어준다. 이후 오롯이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데에만 전념하던 정순은 스스로 일어서려 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정지혜 감독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여성 노숙자 캐릭터에 대해 “노숙자는 타인의 시선에 쉽게 노출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정순이 여성 노숙자를 처음 볼 때는 타자화해서 바라보다가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저 사람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며 스스로 시선이 바뀐다. 그런 정순의 심리적 지점들을 여성 노숙자 캐릭터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 정지혜 감독은 디지털 성범죄와 여성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를 동시에 다룬 이유에 대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분들이 법적 절차를 거치면서 힘듦을 토로하는 부분 중 하나는 피해자인 자신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작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부분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밝혔다. 덧붙여 “자료 조사를 하면서 피해자 중 법적 절차를 끝까지 가는 선택을 하시는 분이 있고, 그 과정에서 힘들어서 선처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의 영화로 사회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선택뿐만 아니라 이런 다양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