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라색 거대한 털덩어리 괴물이 순진한 눈으로 웃고 있다. 어린아이가 좋아할 법한 모습이지만, 그 옆에는 털이 덥수룩하게 난 아저씨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고, 한 여자아이가 보라색 털 덩어리를 끌어안고 있다. <이프: 상상의 친구>(이하 <이프>) 포스터를 보면 어린아이를 타깃으로 한 키즈 영화라고 티를 팍팍 내는 느낌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아이들보다는 어른스러운 척을 하느라 지친 어른이들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다.

주인공 ‘이프'는 상상의 친구로, 어릴 때 상상으로 만들어 낸 친구다.(비슷한 사례로, <인사이드 아웃>(2015)의 빙봉이 있다.) 어렸을 때는 그와 자주 놀지만 세계가 넓어지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잊힌다. 아이들에게서 잊혀지고 싶지 않은 이프들이 짝이 될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게 영화의 주요 골자다. 의외의 점은 아이들은 이프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친구들과 노는 게 즐겁다면 굳이 ‘상상의' 친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이프의 진짜 짝은 누구일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들, 바로 어른이들이다. 영화는 ‘어른이'에 초점을 맞춘 이후부터 탄력을 받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보라색 털 덩어리(그의 이름은 블루다)가 하는 말에 왜 눈물이 나는지. <이프>는 처음부터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게 밝혀지자, 감독이 궁금해졌다. 감독 이름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존 크래신스키. 우리에겐 <콰이어트 플레이스> 감독으로 유명하다. 공포영화에서 사운드를 제거한, 새로운 공포영화를 보여준 그가 이런 감성적인 이야기를 꺼내왔다니. 문득 그의 행적이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는데 예측불허한 재밌는 지점들이 많았다. 장르 불문, 배우부터 감독까지. 오늘은 다재다능의 아이콘인 존 크래신스키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별하지만 평범했던 어린 시절
1979년 10월 20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는 간호사, 아버지는 내과 의사인 의료인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평범한 가톨릭 신자였던 크래신스키는 고등학교 때 풍자 연극의 주연을 맡으며 처음 무대에 섰다.(이때 각본가가 고등학교 동창인 B.J. 노박으로, <오피스>의 프로듀서 겸 작가, 배우로 활약한다) 이후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그는 코스타리카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코스타리카의 마누엘 안토니오 국립공원 해변에서 한 여성을 구해주기도 하는 등 다이내믹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한편으론 대학교에서 코미디 그룹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무대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피스>, 물꼬를 트다.

인턴 작가로 시작해, 연기 경력을 쌓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 그는 웨이터 일로 돈을 벌며 닥치는 대로 출연했다. 그러던 중 B.J. 노박과의 인연으로 그는 <오피스>의 오디션 기회가 주어지고, 종이 유통 회사의 지적이고 온화한 영업 사원 짐 핼퍼트 역을 따내는 데 성공한다. 그를 연기하기 위해 크래신스키는 실제 종이 회사 직원들을 인터뷰하며 열정을 드러냈고 그는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에 출연하는 데 성공했다. 종이 회사를 직접 촬영하기도 했는데 이 영상은 오프닝 크레딧에 쓰이며, 나중엔 몇 개의 에피소드를 직접 감독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몸값을 4배 이상 높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조지 클루니가 연출한 영화 <레더헤즈>(2008)의 주연까지 맡으며 배우로서 빠르게 성장한 한편, <브리프 인터뷰 위드 히디어스 멘>(2009)로 감독 데뷔를 한다. 영화는 대중적으로 성공하진 않았으나 그해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상에 노미네이트되며,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존 크래신스키, 성덕이 되다. (feat. 에밀리 블런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수석 비서로 나온 에밀리 역을 맡은 에밀리 블런트. 크래신스키는 영화 속 그의 모습에 반해 70번 이상 작품을 돌려볼 정도로 그의 열광적인 팬이 되었다. 후에 그는 “운이 좋게도 그녀(에밀리 블런트)가 스토커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저와 함께 있어줬어요!”라고 말하며 성덕(성공한 덕후)의 면모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친구를 통해 처음 만난 후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그렇게 2009년 8월에 약혼한 두 사람은 2010년에 비밀리에 결혼하여 할리우드 대표 워너비 부부로 등극했다. 그는 자신이 에밀리 블런트의 남편임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American Tonight Show>에서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었다. 아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공항에 간 그는 입국 심사대에서 아내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직원이 “아내도 내가 아는 배우냐"라고 물었고,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에밀리 블런트예요. 혹시 아세요?”라고 답했다. 직원은 “네가? 진짜 네가?”라고 물으며 꽤나 거칠게 입국 도장을 찍어줬다고.
존 크래신스키의 코미디: <립 싱크 배틀>의 총괄 프로듀서


아마도 쇼츠/릴스를 자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립 싱크 배틀>의 총괄 프로듀서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톰 홀랜드의 Umbrella, 채닝 테이텀의 Let it go 영상이 가장 유명하다.) 2013년, 그는 <Late Night with Jimmy Fallon> 출연을 위한 아이디어 구상 중 <립 싱크 배틀>을 떠올렸고, 이후에 이를 ‘코너' 형태로 발전시켜 큰 성공을 거뒀다. 2016년 7월에는 에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까지 거두며, 그는 코미디 부문의 프로듀서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존 크래신스키의 액션: <13시간>
2014년, 그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알로하>의 주연을 맡았는데, 엠마 스톤, 레이첼 맥아담스, 브래들리 쿠퍼 출연, <바닐라 스카이>의 감독 카메론 크로우가 연출을 맡은 기대작이었다. 하지만 화이트워싱 논란 및 부실한 스토리텔링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 외면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16년, 그가 스크린에 복귀했는데 이번엔 ‘코미디'가 아닌, 제대로 된 액션 영화였다. 마이클 베이가 연출한 전기 전쟁 영화 <13시간>의 잭 실바 역을 맡았는데, 2012년 주 리비아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 적 없는 그의 진지한 액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전직 미 해군 특수부대 연기를 하기 위해 25파운드 근육을 늘리고, 신체 훈련을 받았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그 몸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그는 <13시간>에서 웃통을 벗은 자신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저게 누구지? 왜 영화에서 내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고. 실제로 이전까지 ‘몸매 좋은 핫 가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이후 아마존 프라임의 드라마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에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존 크래신스키의 공포: <콰이어트 플레이스>

2016년, <13시간>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던 그는 돌연 2018년, 포스트 아포칼립스 호러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로 돌아온다. 그는 연출과 각본, 그리고 주인공 리 애보트 역을 맡아 아내 에밀리 블런트와 함께 출연했다. 소리를 내면 공격하는 괴생명체를 피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극의 설정상 극도로 대사를 제한한 채로 음향 효과로 공포를 극대화했다. 개봉 이후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로튼 토마토에서 96% 점수를 얻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3억 4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후 2021년, <콰이어트 플레이스 2>에서는 가족이 다른 생존자를 만나면서 서사를 확장했다. 1편에서 아이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희생, 가족애를 강조했다면 2편에서는 아이들의 성장에 보다 집중해 배경 확대를 충분히 설득한다. ‘소리 내지 말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2편에 이르러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세계관'이 된 셈.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에 개봉하였음에도 북미 누적 수익이 1억 달러를 넘기며 흥행에 대성공하여 명실상부 성공한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존 크래신스키와 MCU
존 크래신스키는 과거 캡틴 아메리카 역에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결국 크리스 에반스가 캐스팅되면서 그는 탈락했지만 그는 “크리스 에반스 좀 봐요. 완전 캡틴 아메리카잖아요”라며 꽤나 쿨하게 받아들였다고.
그는 이전에도 “토르 수트를 입은 크리스 헴스워스를 보고, 나는 슈퍼히어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탈락에 대한 아쉬움이 없음을 드러냈다.
가장 섹시한 남자

유머러스하고 애처가인 그는 <13시간> 이후로 굉장히 몸이 좋아졌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섹시한 남자'의 대표였다. 그는 2006년, 2009년, 2018년, 2019년에 <People>지에서 선정한 가장 섹시한 남자 중 한 명으로, “세일즈맨의 섹시함을 알려주었다. 가장 섹시한 가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프: 상상의 친구>를 제작한 이유

코미디부터 공포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해온 존 크래신스키. 그는 <이프>를 두고 “가장 개인적인 영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내 블런트와 함께 아이들을 관찰하며 두 딸이 부모 도움 없이 갈 수 있는 ‘마법의 세계'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아이들이 그 세계 안에서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봐왔지만, 코로나19가 닥치자 그 빛과 기쁨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고. 그는 “그들의 빛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 아이들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을 느꼈고 이게 ‘성장’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 순간 크래신스키는 아이들에게 현실 세계의 고통과 상관없는, 자신들이 만든 마법의 세계가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프>를 제작했다고 답했다.

재밌는 점은, ‘아이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8살 유년 시절 자신이 만들었던 상상의 친구 ‘샘 브레이스'를 위한 영화기도 하다며 제작 이유를 덧붙였다. 그는 “샘(브레이스)은 제 액션 영화의 파트너이자 코미디 듀오였다"라고 말하며, “그와 함께 많은 일을 겪었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