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위기는 곧 기회다’란 상투적인 표현이 가장 빛을 발하게 만든 곳이다. COVID-19가 한창 유행이었던 2020년에 처음 시작한 온라인 상영은 이젠 관객들에게 부천만의 프로그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아시아 권역을 맡았던 김영덕 전 프로그래머의 공석은 남은 이들이 더 의기투합해 끈끈한 팀워크를 발휘하게 해준 기회가 됐다. 전 프로그래머의 공백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남종석, 모은영, 박진형 프로그래머의 숙련된 노하우와 2010년부터 프로그램 팀에서 일하며 아시아권 영화들을 주로 맡았던 든든한 아군 이정엽 프로그램 팀장의 투혼으로 메워진다. 4명의 프로그래머는 올해 AI 영화를 비롯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돌아온 BIFAN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주역이다. BIFAN의 프로그래머 4인을 만나 올해의 BIFAN에 관해 들어보았다.

네 분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오랫동안 함께하고 계시는데요. BIFAN의 꾸준한 성장에 네 분의 팀워크가 한몫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끈끈한 팀워크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박진형 우리의 자랑거리긴 하다. 워낙 오래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너무 잘 안다. 근데 특히 올해는 오래도록 부천을 지켜왔던 김영덕 프로그래머가 이직하면서 공석이 생겼는데, 그때 각자 제 역할을 해주면서 빈자리를 채운 것 같다.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영화제 라인업 결과를 보니 부끄럽지는 않다. 위기를 헤쳐 나가면서 애정이 돈독해졌다. 나만 그런가. (웃음)
남종석 올해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생기고, AI 영화도 있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더 많은 일이 한꺼번에 쏟아지게 됐다. 그래서 공동으로 솔루션을 찾다 보니까 새벽 2시, 3시까지 일하면서 공유하는 게 많았다. 여러 면에서 서로 도왔다.

올해는 전 부문 총 3,418편이 출품되면서 출품작 수가 작년에 비해 20.27% 증가한 수치다.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에 있는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올해 상영작의 경향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남종석 영어권은 꾸준히 80년대와 90년대 영화에 대한 오마주와 민간 설화를 접목한 작품, 포크 호러 장르의 강세가 아직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또 올해는 장르 영화를 다루는 남성 영화감독의 데뷔가 늘었다. 80년대와 90년대 작품을 오마주하면서 자기만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박진형 유럽 쪽은 원래 장르와 아트하우스를 섞는 영화들이 강세였다. 올해 상영작 중에서는 <언데드 다루는 법>과 같은 작품. 근데 최근 들어 유럽 시장이 장르 영화에 좀 더 집중하려는 트렌드를 보이고 있다. 노르딕 장르 인베이전이라고 스칸디나비아 쪽의 장르 프로젝트나 영화들을 묶어서 해외로 홍보하는 일종의 기구가 있다. 저희랑도 협업을 하고 있는데, 그쪽의 개별 영화들이 굉장히 강세를 보인다. 또 상업 호러 영화는 스페인 쪽이 워낙 훌륭하다. 근데 아트하우스 영화가 대세인 몇몇 중유럽의 메이저 영화제라던지 이쪽의 시장에서 이런 흐름을 파악하고 장르영화에 집중해야겠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그다음에는 동남아시아 쪽에서 인도네시아랑 베트남, 캄보디아가 인기를 끄는 건 누구나 인정을 하는 상황인데 약간 한국 영화의 90년대 말이랑 비슷한 상황이다. 중앙정부 지원이 들어오고, 시장 확대 자금이 들어오면서 재능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등장하고 있다. 이 흐름이 앞서 말한 세 나라에서 다 드러나고 있다. 향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또 기본적인 만듦새도 좋아졌다. ‘로컬 관객을 잡아서 박스오피스를 선점하겠다’는 생각에 더해 글로벌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만듦새를 추구하려고 하는 터치가 보인다.
모은영 한국 작품 위주로 말씀을 드리면 단편은 역대 최대 편수를 기록했다. 근데 한국 장르 장편 영화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소소한 일상을 다룬 영화들이 많기 때문에 장르 영화 자체로는 괄목할 만한 영화를 찾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단편은 단편 제작 지원이 있어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구조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장르적인 시도를 많이 하는 단편들이 많았다. 장편은 저희가 오랫동안 발굴하고 지원하면서 좀 공을 들였던 작품들이 다시 영화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정재훈 감독의 <에스퍼의 빛>도 한국의 모든 큰 영화제에서 다 지원받은 작품인데 저희와 함께하게 됐다. 제작과 상영을 묶어서 장르 영화들이 좀 안정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올해는 그 결실을 보게 된 해였다.
이정엽 일본과 대만, 홍콩 등의 중화권에서는 인디 쪽이지만 장르 색이 강하고 괜찮은 호러 작품들이 많았다. 매년 일본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요청은 많다. 수요가 너무 많다 보니까 인디나 독립영화 쪽만 가져오게 되면 그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고, 메이저 영화만 가져오면 부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바라기도 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올해도 충분히 장르적으로 부천과 어울리는 영화들이 많이 출품됐고, 유독 괜찮은 작품은 인디 쪽에 많았다.
모은영 또 올해 아시아권에서 하나의 경향은 일본의 중견 감독이 만든 장르 영화들이 많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장르 영화 쪽에서 신인 감독뿐만 아니라 중견 감독들도 굉장히 튼튼하게 존재하고 있고, 그분들이 상업 구조 안에서 장르 영화를 계속 만들어서 가져온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중요한 경향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올해 매드맥스 섹션은 진짜 완전 터졌다. (웃음)

올해의 빅 게스트는 역시 두기봉 감독과 미타니 코키 감독 두 분인데요. 두 분의 초청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남종석 두기봉 감독의 경우는 2013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두기봉 감독의 매니저에게 한번 농담조로 던진 제안에서 시작됐다. 계속 답을 기다리다가 COVID-19가 생겨버려서 체념했다가 2023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감독님을 만났다. 감독님이 직접 ‘한번 가볼까’라고 얘기하셨고 논의를 진행했다. 이후에 감독님 측에 프로그램을 제시해 드렸는데, 올해 1월에 답이 와서 함께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근데 1차로 보내드린 기획안에 관한 피드백이 있었다. <흑사회>가 워낙 유명하니까 이 작품으로 제안을 드렸었는데, 감독님은 어딜 가든 그 작품의 이야기를 들어서 피곤해하셨다. 그래서 감독님께 추천을 받았는데 그중에 4K로 복원할 수 있는 작품인 <용호방>이 운 좋게도 감독님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었다.
모은영 미타니 코키 감독은 처음에 신작을 소개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었다. 근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 했고, 전작들만 상영하게 됐다. 이 논의도 올해 2월부터 얘기가 돼서 감독님을 모실 수 있었다.
올해 가장 어렵게 가져온 작품은 무엇인가요?
모은영 해마다 가장 공들이는 프로그램은 역시 배우 특별전이고, 올해는 바로 손예진 배우다. <비밀은 없다> <오싹한 연애> 등 올해 상영작 외에도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으면 은근히 우리 영화제와 잘 맞는 배우다. (웃음) 해마다 배우 특별전은 배우 섭외부터 작품 선정, 인터뷰 진행, 책 발간까지 세 달이 걸린다. 이외에도 저작권 해결, 후원, 전시, 홍보 등 다양한 영역의 많은 분과 협업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그만큼 예산도 많이 들고 가장 공들였던 것 같은데, 어느덧 햇수로는 5년째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동조자>를 가져오는 것도 되게 오랫동안 준비했다. 이 시리즈를 꼭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는 일념에서 시작했다. 박찬욱 감독님의 의지도 매우 크셔서 도움을 정말 많이 주셨다. 모호필름에서 전폭적으로 도움을 줬지만, HBO와 쿠팡플레이 모두하고 의논해야 해서 빨리 진행했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정엽 워낙 가져오기 힘들었던 작품들 위주로 말씀해 주셨는데, 오히려 저는 부천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일정이 안 맞아서 고사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들이 있었다. 그런 부분이 아쉬웠다.

COVID-19가 유행한 2020년을 기점으로 온라인 상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데요. 팬데믹이 끝나면서 다른 영화제들이 다시 오프라인 상영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반대로 BIFAN은 온라인 상영을 여전히 고수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정엽 저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 상영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온라인 상영이 다른 영화제와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상황이 나아졌는데도 끌고 가고 있는 것은 내부적으로 되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제는 저희의 반대 지점에서 영화제가 나아가야 될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를 들었다. 부천은 온라인 상영을 중단하면 관객분들이 아쉬워할 정도로 반응이 괜찮다. 다만 해를 거듭할수록 아쉬운 부분은 COVID-19가 유행할 때는 해외 작품들의 많은 협조가 있었는데 갈수록 없어지면서 작품을 수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수도 줄어들고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내부적인 고민이 있지만, 올해도 라인업이 공개되고 나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박진형 시장 상황에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상영이 관객들에게 많은 반응을 이끈 이유는 영화제의 성격, 콘텐츠의 성격, 플랫폼의 관람 패턴이 요인이 됐고, 그리고 수도권 영화제 즉 출퇴근 영화제라는 점이 다 맞아떨어져서 반응이 커진 거다. 첫 해 7천 대로 시작했던 온라인 상영작 관객 수가 매년 5천씩 증가했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단편이다. 입소문이 나서 갑자기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려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극장의 대체품이 아니라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한 순기능이 있는 게 관객들이 너무 좋아해 주신다. 출퇴근하듯이 영화제에 오시는 분들은 보통 1시간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걸려서 오는데, 오는 길에 영화 한 편, 돌아가는 길에 한 편을 본다고 말해 주셨다. 영화제에서도 영화를 관람하면 하루에 3~4편을 보게 된 셈이다. 근데 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시장이 점점 다시 예전의 배급 채널로 돌아가다 보니 영화 편수는 줄게 되었다. 관객들은 이미 온라인 상영을 부천의 중요한 콘텐츠이자 채널로 인식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BIFAN 프로그래머’s PICK!!
아직 매진되지 않은 작품들 중에서 심사숙고해 골랐다!
남종석 프로그래머: <언젠간 달라질 거야>
공상과학 스릴러로 가장한 형제 자매의 불안한 관계를 다룬 비극적 이야기로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모은영 프로그래머: <세입자>
호러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온 윤은경 감독이 바라본 근미래의 서늘한 풍경.
주거와 생존에 대한 극한의 공포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기에 더욱 서글프고 공포스럽다.
박진형 프로그래머: <어바웃 섹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 중 하나를 돌직구로 던지는 영화. 당신의 인생에서 섹스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주성철, 성찬얼, 추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