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은밀한, 혹은 들키고 싶지 않은 취향이 있다. 여러 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린 감독일지라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자신은 피 튀기는 장르만 만들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로맨스를 향한 열망이 있을 수도 있고, 본인이 만드는 작품만큼은 작가주의 영화만을 고집하더라도 블록버스터를 좋아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기에는 애매해 누군가는 ‘길티 플레저’라고 말할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꽁꽁 숨겨야만 하는 취향은 아닐 터. 특정 취향을 길티 플레저라 칭하기보다는, 모두가 길티 없이 플레저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에 명감독들의 의외의 취향을 전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리스트는 아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코세이지, 에드가 라이트 ♥️ <사막 탈출>(Ishtar, 1987)

남들은 하나도 안 웃기다는데, 나한테만 웃음 포인트가 맞는 영화가 있는가? 혹자에게는 <사막 탈출>이 그런 듯하다. <사막 탈출>은 중동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로, 성공을 꿈꾸지만 재능 없는 두 명의 뮤지션이 얼떨결에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담았다. 워렌 비티와 더스틴 호프만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사막 탈출>은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한 영화로 손꼽힌다. 영화는 지금까지도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는데, <사막 탈출>은 1988년에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을 배출했고, 타임지는 1999년 ‘20세기에 나온 최악의 아이디어 100개’ 중 하나로 <사막 탈출>을 꼽았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사막 탈출>은 극강의 호불호를 낳았고(물론 불호 쪽이 더 크고 ‘호’가 매우 소수지만), 컬트 팬층을 형성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마틴 스코세이지, 에드가 라이트는 <사막 탈출>이 ‘극호’ 였던 듯하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사막 탈출> 속 노래 ‘Hot Fudge Love’를 부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고, 스코세이지가 “많은 사람들이 <사막 탈출>이 웃기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웃기다”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리들리 스콧 ♥️ <뮤리엘의 웨딩>(Muriel's Wedding, 1994)

리들리 스콧이 무려 6번이나 본 영화이자, 타임캡슐에 넣고픈 단 하나의 영화는? 놀랍게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뮤리엘의 웨딩>이다. <뮤리엘의 웨딩>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여성 뮤리엘의 성장기를 담은 영화다. 리들리 스콧은 한 인터뷰에서 “타임캡슐에 넣고 싶은 영화의 한 장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뮤리엘의 웨딩> 전체”라고 답했다. 한편, 리들리 스콧은 <뮤리엘의 웨딩>과는 공통점이 단 한 개도 없는, 여러모로 상반되는 영화 <글레디에이터 II>로 올해 말 극장가를 찾아올 예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 <맥그루버>(MacGruber, 2010)

2010년에 개봉한 영화 <맥그루버> 역시 상업적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만큼은 <맥그루버>의 대사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로 팬이다. 앤 해서웨이에 따르면,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촬영장에서 <맥그루버>를 종종 인용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맥그루버>를 보며 주체할 수없이 웃게 된 순간들이 있다. 영화의 많은 웃음 포인트는 PC하지 않은 것(political incorrectness)에서 비롯되었지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영화 <맥그루버>는 미국의 액션 코미디로, ‘SNL’(Saturday Night Live)의 한 코너를 장편 영화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영화 <맥그루버>는 2021년, 피콕에서 TV 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영화 <맥그루버>의 주연이자 TV 시리즈 <맥그루버>의 제작자인 윌 포르테는 파일럿 에피소드의 대본 리딩에 크리스토퍼 놀란을 초대했는데, 놀란은 이를 거절하며 정성스러운 이메일을 보냈다. “비록 오디세이의 첫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는 없지만, 제 영혼은 여러분과 함께 비상할 겁니다. 여러분이 이미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겠지만, 전 세계가 기다리고, 지켜보고 있습니다”라는. 과연 <맥그루버> 팬다운 스윗한 편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2007)

<송곳니> <킬링 디어> <더 랍스터> <가여운 것들> 등 괴작 혹은 걸작을 넘나드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 왠지 감독 본인도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난해하고 심오한 영화만을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놀랍게도 <본 얼티메이텀>을 ‘걸작’이라고 칭했다. 그는 <본 얼티메이텀>이 최고 수준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갖춘 액션 영화이며, 쓸데없는 대사가 없는 순수한 액션 영화라고 말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말’보다는 ‘이미지’로 작동하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엔터테이닝 영화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미지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그의 필모그래피가 유달리 독특하고 기이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긴 하다.
아리 애스터 <클루리스>(Clueless, 1995)

여러분이 떠올리는 그 <클루리스>가 맞다. 믿기지 않지만, <유전> <미드소마> <보 이즈 어프레이드> 등의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만을 만든 아리 에스터는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 아리 에스터가 <미드소마>를 구상할 때 떠올렸던 것도 전형적인 하이틴 로코의 클리셰였다. 여자 주인공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데, 사실은 ‘좋은 남자’가 여자 주인공의 아주 가까이에 있었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여자 주인공이 나쁜 관계를 모두 버리고 올바른 길을 택한다는 내용. 아리 에스터가 자신의 하이틴 로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언급한 작품이 바로 <클루리스>다. 아리 에스터는 <클루리스>를 “XX 최고의 걸작”(A Fucking Masterpiece)라고 칭했다. 한편, 그가 만든 <미드소마> 역시 이별을 겪은 한 여성이 광신도들의 미드소마 축제에 참여해 심경의 변화를 겪는 이야기이니,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와 얼추 비슷하다고 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