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작 <무뢰한>(2015) 이후 오승욱 감독은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집중 탐구한 또 하나의 결과물 <리볼버>를 내놓았다. 무려 9년 만의 신작이다.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이 잠적한 범인의 애인으로 그가 떠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면, <리볼버>의 하수영(전도연)은 초반부터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떠난 연인을 탓하기엔, 이번엔 그 역시 죄를 저지른 비리경찰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자다.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회로부터 투명인간으로 지워져 버린 이 여자는 스스로를 구명하려 지금 분연히 일어났고, 자신이 받을 것만을 챙긴다는 오직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해 직진하는 ‘불친절한 수영씨’다.
오승욱 감독은 할리우드 클래식 범죄 누아르의 틀 안에 아파트 개발을 둘러싼 더러운 커넥션, 비리의 온상을 파고 들어 한국식 누아르의 판을 벌린다. <무뢰한>이 전도연의 내뿜는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이었다면, <리볼버>는 오히려 그 에너지를 가두는 데서 오는 배우의 아우라가 영화의 공간을 완전히 지배한다. 표정을 지우고 액션을 자제하는 이 영화의 무브먼트는 연출과 연기가 일정 경지에 도달했을 때만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난이도가 높은 시도다. 오승욱 감독은 전도연을 축으로 한껏 폼 잡고 살다가 제풀에 삐끗하는 나쁜 놈들의 캐릭터 플레이를 때로 비장하게, 화려하게, 우스꽝스럽게 조합해, 괴상할 정도로 매력적인 누아르로 완성해 낸다. 배우 전도연의 매력 “에브리씽”에 반한 감독의 애정이 영화 속에서 숨길 수 없이 대사로 튀어나올 만큼, 감독과 배우의 믿음과 신뢰로 시작해 서로에게 창작의 장을 열어 준 시도에 대해 오승욱 감독을 만나 들어보았다.

하수영이 자신의 떼인 돈을 받기 위해, 그 과정에서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며 꼬이거나, 진행되는 이야기인데요. 이야기의 뼈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예전부터 한 인간이 자기가 받을 몫을 못 받아서, 그걸 받기 위해서 분투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했어요. 약속을 하고 배신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 (전)도연 배우를 만나서 이소룡의 <사망유희>(1978)를 이야기했어요. 5층 석탑이 있는데, 이소룡이 그 석탑을 한층 한층 올라가면서 각 층의 고수들을 만나 자신의 스킬을 다 해서 격파하는 장면을 이야기했죠. <리볼버>를 쓸 때 곁가지들이 더해지면서 달라지긴 했는데, 이야기의 원형은 주인공이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서 진행되는 것이 있죠. 글을 쓰다 보니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한 <빅 슬립>(1946, 국내명 명탐정 필립) 같은 필립 말로의 탐정물처럼 하드보일드적인 성격이 강해졌고, 존 부어만 감독의 <포인트 블랭크>(1967),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 같은 영화의 부분들이 더해지면서, 점점 이야기가 입혀진 거죠. 이야기를 쓰면서 처음 생각한 <사망유희>의 5층 석탑 구조는 없어졌지만 전 계속 그런 얘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수영이 만나는 인물이 굉장히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구상을 했어요. 이런 생각들이 점점 더해져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하수영은 범죄의 대가로 약속한 7억의 돈과 아파트 한 채를 받겠다는 목표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요. 이 영화가 보통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빌런과 맞서 그들을 처단하거나 단죄하는 것과는 결이 달라지는 부분인데요.
전도연 배우와 같이 일을 하고, 배우를 대상으로 글을 쓰면서 생각했던 것과 맞물려 있는 지점이 있어요. <무뢰한> 이후 전도연 배우를 만나면서 느낀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가 이타심이었어요. 옆에서 본 사람 전도연은 타자에 대한 동정심, 연민, 자기 동일시 이런 것들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길복순>(2023)에서 칼을 휘두르는 전도연 배우의 모습도 너무 멋있지만, 이번엔 그것과는 또 다른 지점을 보여주자는 생각이 있었죠. 배우가 연기하는 이 캐릭터가 주인공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고, 그 품위 있는 주인공이 쭉 움직여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수영을 만들어 갔던 것 같아요.

주인공이 비리경찰로 윤리적 과오를 범한 비도덕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하수영의 태도, 캐릭터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중요하게 풀어야 할 문제였을 텐데요.
하수영은 물론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배신을 당했고, 이제 또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되는 그런 처지가 됐죠. 죄지은 인간이라는 굴레를 갖고 가는 사람이잖아요.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작품을 되돌아보면 항상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았어요. <킬리만자로>나 <무뢰한>때도 그랬지만, 전 어릴 때 본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 같은 책에서, 또 그 당시에 봤던 일본 만화책에서도 굉장히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모두 죄를 지은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얘기잖아요. 저는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죄를 짓지 않고 뭔가를 해냈을 때,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면모가 드러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인간들을 늘 그리고 싶었고 이번에 그 생각이 좀 더 구체화되었어요.
하수영의 손에 리볼버 권총을 쥐어줬다는 점에서, 관객들이 하수영의 선택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들고 궁금하게 하는 지점인데요.
제목이 리볼버지만, 총의 사용에 아주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어요. 의외로 <리볼버>라는 제목의 다른 영화를 보더라도 총기난사를 하거나, 총을 막 쏘는 영화가 별로 없더라고요. 오히려 총기 난사는 제 데뷔작인 <킬리만자로>에 많죠. 총 한 발을 가지고도 안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걸 목표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해 보는 게 더 재밌겠다, 관객들에게 좀 더 색다르고 재밌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그 부분에 신경을 썼어요.

<리볼버>라는 제목을 처음 떠올리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좀 황당할 수 있는데요. (웃음) <리벤지>라는 영화 제작발표회를 갔는데, 제가 그걸 ‘리볼버’라고 읽었어요. “제목 진짜 죽인다!” 이러는데 옆에 계신 감독님도 그걸 제목으로 해보면 좋겠다 하셨어요. 총알구멍 다섯 개가 있는데, 거기 5인의 인간들 얼굴이 박혀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리볼버를 하되, 총알을 많이 안 쓰고 오히려 지키는 쪽으로 해보자 생각하게 된 거죠.
전도연 배우와는 <무뢰한> 이후 9년 만에 다시 합을 맞췄는데요. 그간 함께 하면서 발견한 변화의 지점도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엔 확실히 팀워크가 좀 생긴 것 같아요. 서로 좀 많이 아는 것이 생긴 거죠. 전작을 같이 하면서 서로 대화의 방식을 알게 됐고, 동지적인 믿음이 생겼다는 생각을 했어요. 3회차쯤 촬영을 하는데 도연 배우가 그러더라고요. 본인이 연기한 것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잘 파악해줘서 신뢰가 가고 그래서 마음껏 연기할 수 있겠다. 그런 말이 굉장히 동지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 말에 굉장히 기분이 좋더라고요. 촬영장에서는 선장 같았어요. 제가 촬영을 하고 있으면 배우들한테, “분명 이러이러 해서 감독님이 다시 찍으라고 할 거야. 이 감독님 정말 변태다” 하면서 농담을 해요. 그러면 “네, 그런 이유로 다시 찍어야 합니다” 하고 자연스럽게 촬영을 더 가는 거죠. 그렇게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서 현장 진행을 도와주는 걸 느꼈어요. 스태프들을 너무 잘 챙겨주는 배우였고 스태프들이 굉장히 사랑하는 배우였어요. 존경하고, 존경받을 만한 배우라는 생각을 이번에 더 하게 된 것 같아요.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이번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직진하는 하수영의 피폐한 얼굴이 전도연 배우의 마스크와 잘 어우러집니다. 그걸 과감하게 클로즈업으로 포착해 낸 연출, 화면이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데요.
이건 대화의 영화인데, 계속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그러니 좀 더 클로즈업을 과감하게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그리고 <무뢰한> 때도 느꼈던 게 전도연 배우에게 카메라를 클로즈업으로 다가갔을 때 굉장한 것이 있어요. 눈썹 하나하나 떨림에도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죠.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후, 배우 본인이 각 상황에서 차별화를 가지고 연구를 많이 하셨고, 정말 카메라가 갖다 대기만 해도 장면이 나온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작업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런 클로즈업이 과하다는 생각도 많이 안 들었던 것 같고, 편집 때도 얼굴과 얼굴을 붙이는 것에 재미가 있었고요. 물론 너무 과하게 하지는 않으려고 그 선을 지키려고 했죠.
모든 이로부터 배신 당한 하수영에게 출소 후 나타난 의문의 인물이자, 조력자이기도 한 정마담(임지연)의 등장이 주는 파장이 극에 생기를 더하는데요.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정마담이 하수영의 단순한 조력자라고 보기에는 힘들고 훼방꾼 일 수도 있는 거다. 로빈이라는 존재가 배트맨에게 조력자나 조수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좀 대등한 관계이죠. 또 2대 로빈은 죽게 되어 배트맨에게 굉장히 큰 죄의식을 남겨주기도 하죠. 하수영과 정마담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만나긴 했지만, 호시탐탐 한번 뒤통수 쳐볼까 하는 마음도 있어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차곡차곡 쌓이기도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캐릭터의 관계를 만들어 나갔어요.

마치 여성 버디물처럼, 이 두 캐릭터의 케미스트리가 영화의 전개에 중요하게 작용하는데요. 남성들이 주축을 이루는 세계에서 여성과 여성이 조력하는 구도가 의미는 어떤 것이었나요.
성별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전도연 배우가 주인공인데 상대 캐릭터가 남성이 될 경우 오히려 흥미가 떨어지겠다 (싶었어요). 쓸데없는 로맨스를 만들어야 될 것 같았어요. 그 불편함을 좀 없애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게 싫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둘이서 이렇게 담백하게 가는 게 훨씬 재밌고 멋있어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신흥지역 아파트 개발의 비리가 파헤쳐지는 가운데, 캐릭터들이 활동하는 것에 무속, 그리고 사찰 같은 요소들이 끼어드는데요. 클래식한 누아르의 뼈대에, 배경이 주는 한국적인 정서가 결부되면서 <리볼버>만의 새로운 누아르의 무대가 만들어졌는데요. 캐릭터들의 활동 영역으로 이런 요소들이 가지는 중요성은 무엇인가요.
이들의 아파트는 새로 개발된 도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강남’이라는 지역에서 옮겨지거나 연결되어 있어요. 또 이런 비리의 커넥션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검사나 무속과도 관계가 있다는 걸 생각을 했죠. 무속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요. 무언가를 도모하면서 결탁하는 것들도 많고요. 예전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절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 암자가 있었어요. 무당들이 공력이 떨어지면 이곳에 와서 백일기도도 하고 선물도 안겨드리고 치성을 드리더라고요. 인물들의 주요 활동지인 도심 강남과, 사찰, 무속 같은 것의 설정에는 이런 여러 가지들이 혼재되어 있는 거죠.

전체적으로 하드보일드 한 세계관인데, 인물들이 폼을 잡는 가운데 ‘삐끗’ 하는 정서가 있어요. 그게 이 영화에 웃음의 요소를 주기도, 또 이 인물들의 본성을 캐치하게 해주기도 하는데요.
일부러 코믹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고요. 이 영화의 인물들이 막판에 이상하게 낯선 공간으로 가잖아요. 사실 앤디(지창욱) 같은 인물들이 강남 룸살롱에 있을 때는 품위를 유지했겠죠. 돈도 많고 자기 뒷배도 있고 그럴 때는 한 번도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런 인물이 숲속으로 가면서 양상이 달라지죠. 애써 웃기려고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어설프고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들이 나오겠다 생각했어요. 코믹보다는 실소가 나왔으면 좋겠다 했어요. <킬리만자로> 때도 이런 건 했는데, 그땐 상황이 워낙 비참하고 공포스러워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면, 이번엔 좀 더 가볍게 이런 웃음이 들어갈 자리가 있겠다 싶었던 거죠.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