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평등의 가치를 좇는 창작자들과 한 공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얼마나 될까. 매년 차별과 소외를 벗어난 성평등 콘텐츠를 발굴해 온 벡델데이가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벡델데이는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주최·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가 후원하는 행사로, 올해는 9월 7일(토)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다.

이날은 총 두 개의 토크 프로그램이 진행됐는데, 1부로는 ‘벡델리안과의 만남: 위기의 산업, 양성평등 콘텐츠가 돌파한 것들’이라는 주제로 올해 벡델리안으로 선정된 인물들과 관객이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서는 배우 봉태규, 이화정 벡델데이 프로그래머의 진행으로,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교토에서 온 편지> 김민주 감독, <LTNS> 전고운·임대형 감독, <졸업> 박경화 작가, <힘쎈여자 강남순>의 작가이자 제작자 백미경 대표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아쉽게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벡델리안들은 영상을 통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작년에는 영화 <유령>으로, 올해는 시리즈 <밤에 피는 꽃>으로 2년 연속 벡델리안에 선정된 배우 이하늬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밤에 피는 꽃>의 여화로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하다”라며 “여화는 조선시대와 같이 전통적인 사회에 살면서도 진취적인 나를 찾고자 했던 사람이다”라고 덧붙였다. 현장에 참석한 벡델리안들은 콘텐츠를 만들어 온 과정부터 산업에 대한 고민 등을 나누며 서로의 작품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관객의 성원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날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전한다.

“수줍음 많고, 바르고 착한 10대 여자아이가 아닌,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영화 부문 벡델리안 감독상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10대 소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밝고, 순수하고, 착하거나, 감성적이고 섬세하다는 등. 그 고정관념을 깬 이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비밀의 언덕>은 명은이라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숨기고 싶은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지은 감독은 “샤이(shy)하지 않은 십 대 여자아이”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그는 <비밀의 언덕>의 명은이를 통해 “여자아이를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뜨겁게 달려가고,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자신만의 답을 찾는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현재 상업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지은 감독은 향후 그가 묘사할 캐릭터에 관한 질문에 ”꼭 여자가 주체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환경에 의해서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여성들도 많다. 내가 앞으로 보여주고 싶은 여성은, 어떤 공간에 갇혀 있더라도 생명력이 넘치는 인간이다”라고 답했다.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담은 작품”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 감독상 <LTNS> 전고운·임대형 감독
‘프리티 빅브라더’라는 팀명으로 뭉쳐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LTNS>를 만든 두 감독은 그야말로 ‘본투비 벡델리안’이 아닐까. 2020년 벡델초이스10에 선정된 바 있는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은 그다음 해 벡델데이 트레일러 영상을 만드는 등, 여러모로 벡델데이에 깊은 관심을 둔 인물이다. 한편,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 이후에 벡델데이가 생겨서 너무 배가 아팠다. 나도 여기(벡델초이스10)에 들고 싶었는데”라며 <LTNS>의 시리즈 부문 벡델초이스10 선정, 그리고 ‘프리티 빅브라더’의 벡델리안 선정 소식에 기쁨을 표했다.
<LTNS>는 성별 고정관념의 전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고운 감독은 “저희 둘 다 젠더 트위스트를 즐거워한다.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콘텐츠에서 일면적으로만 보이는 면이 있었는데,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가 글을 쓰면서 재밌을 수 있다”라고 전했다. 임대형 감독 역시 “전통적인 성 역할은 학습되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국 사회는 변화가 빠르다. 요즘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우리와는 또 다른 교육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담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졸업>은 서혜진(정려원)이 자신의 가치를 좇는 이야기”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 작가상 <졸업> 박경화 작가
벡델리안 선정 소식을 듣고 잠이 오지 않았다는 박경화 작가는 20년간 기업 홍보를 하다, 45살에 대본 공부를 하기 시작해 46살에 드라마 작가가 된 인물이다. <졸업>을 함께 한 안판석 감독은 24년 전 ‘아줌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드라마 <아줌마>(2000~2001)를 연출하며 한국여성단체연합, 여성미디어네트워크 등 다수의 여성단체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시간이 흘러 <졸업>이 벡델데이의 벡델초이스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안판석 감독은 박경화 작가의 벡델리안 선정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박 작가는 <졸업> 집필 당시, 안 감독에게 자신이 장편을 처음 써봤고, 초보이며, 그냥 아줌마 작가인데 괜찮냐는 고민을 토로했는데, “누구도 그런 잣대를 가지고 당신을 보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지금까지 읽은 책과 지금까지 보았던 영화, 들었던 음악, 그 모든 것들이 당신 작품의 자양분이 될 뿐이지 그 이외에 너를 규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박경화 작가는 로맨스 드라마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전통적으로, 로맨스라는 장르는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묘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졸업>은 일반적인 로맨스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박경화 작가는 <졸업>을 “남성 캐릭터가 바라보는 여성, 혹은 누군가의 딸로서 보여지는 여성이 아닌, 여성 캐릭터가 오로지 자기의 양심, 신념, 철학을 바로잡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졸업>의 주인공 서혜진(정려원)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인물이고, 내면의 가치를 좇는 인물이다.

“벡델이 벡델을 키운다”
영화 부문 벡델리안 작가상 <교토에서 온 편지> 김민주 감독
함께 자리한 다른 작품의 인지도에 비해 자신의 작품은 굉장히 작은 영화라 수상이 얼떨떨하다는 <교토에서 온 편지>의 김민주 감독은 역대 벡델데이에 선정된 작품의 90% 이상을 봤다고 전했다. 김 감독은 성평등 요소를 염두에 두고 <교토에서 온 편지>를 만들지는 않았으나, “내가 이런 작품을 많이 봐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나?” 싶었다며, “벡델이 벡델을 키운다"라는 말로 좌중에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김 감독은 촬영감독, 조명감독, 프로듀서 등 <교토에서 온 편지>의 촬영 현장 스태프들을 모두 여성으로 꾸렸다.
<교토에서 온 편지>는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세 자매가 ‘교토에서 온 편지’를 발견하며 엄마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처럼 여성 중심의 가족과 함께 자랐으며, 이민자 2세 어머니를 둔 김민주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교토에서 온 편지>를 쓰고 연출했다. 유난히도 남성적인 누아르의 색채가 강했던 부산 영도에서 나고 자란 김 감독은 미디어에서 비춰지던 영도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김 감독은 “실제로 내 가족과 친척, 이웃이 사는 곳인데 그렇게 소비되는 것이 마음이 안 좋아서 비틀어보고 싶었다”라며, “(어렸을 때) 내가 창작자가 되면, 꼭 언젠가는 영도에서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찍고 싶다고 다짐했다"라고 전했다.
더불어, <교토에서 온 편지>는 역사 속에서 늘 소수였던, 디아스포라 여성의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했기에 의의가 큰 작품이다. 김민주 감독은 “역사의 주인공은 모두라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너무나 제한적이다. 매체에서 소개된 남성 중심의 역사물처럼, 엄청난 일을 해야만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기보다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역사”라고 말하며 디아스포라를 겪은 여성들의 담담한 일상을 그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캐릭터가 사건의 도구가 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은 작품”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 제작자상 <힘쎈여자 강남순> 백미경 대표
<품위있는 그녀>(2017) <마인>(2021) 등 다수의 여성 서사 히트작을 집필해 온 백미경 대표는 2019년 ‘스토리피닉스’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백 대표는 최근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의 제작에 참여했고,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을 집필하고 제작에도 참여했다.
<힘쎈여자 강남순>은 남성 히어로물의 클리셰를 가져오는 동시에 20대, 40대, 60대 여성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힘쎈여자 도봉순>(2017), <힘쎈여자 강남순>으로 이어지는 ‘힘쎈여자’ 시리즈는 ‘여성 슈퍼 히어로 서사’를 프랜차이즈화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벡델데이에서 ‘힘쎈여자’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을 예고한 백미경 대표는 <품위있는 그녀>를 집필할 때까지만 해도, 중년 여성 두 사람이 주인공인 드라마라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백 대표는 그때와 비교했을 때 새로운 세상이 왔다며 기쁨을 표했으며, ‘힘쎈여자’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을 구상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백미경 대표는 ‘힘쎈여자’ 시리즈에 대해 “캐릭터가 사회적 편견을 깨는 이야기를 늘 하고 싶었다”라며, “어렸을 때부터 ‘What if?’(만약에)를 많이 생각했다. 젠더 감수성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도 왜 <원더우먼>의 원더우먼은 굴곡진 몸의 8등신에다가 섹시한 옷을 입고 있어야 하나, <600만불의 사나이>는 그렇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전했다. 백 대표는 “인간의 사회는 물리적인 힘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지배 구조를 형성한다. 그런데, ‘만약 여자가 힘이 셌다면 어땠을까?’하는 발칙한 상상에서 출발했다”라며 모계 혈통의 여성 히어로물을 상상해 낸 계기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