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동시대 작가가 쓴 동시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생겨나는 감각이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문학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젊은 작가가 있습니다. (후략)”
위 문구는 출판사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소개 문구다. 한국문학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유희와 한국적인 정서, 그리고 지금 한국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내'가 생생하게 느끼는 한국의 현주소를 활자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 자란 이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외국 서적을 볼 때 빼곡히 적혀있는 주석을 읽으며, 미묘하게 느꼈던 정서적 거리감은 한국문학에서 찾아볼 수 없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주인공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킬킬 거리고, 분노하고, 슬퍼한다. 이는 우리가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그중에서도 특히 ‘동시대’에 주목한다. 지나간 이야기를 읊기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작가마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번에 연달아 개봉한 <한국이 싫어서>(2024)와 <딸에 대하여>(2024)는 특히나 한국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품은 채 다가온다. 두 작품 모두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각각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난 여자와 딸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원작이 활자로 한국인에 대한 담론을 꺼냈다면, 영화는 그들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아 관객을 서사의 한가운데로 밀어넣는다. 영화를 보며, 관객은 자신의 일상에서 보거나 경험한 문제를 떠올리며 저마다의 ‘한국'을 그려나간다. 오늘은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영화화된 작품들을 소설과 비교하며 소개해보고자 한다.
<82년생 김지영>

아마 보진 않았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작품,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평범한 82년생 여성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다. 젠더 갈등의 지표처럼 쓰인 원작 소설의 플롯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은 별 탈 없이 대학 졸업하고, 입사를 했다. 그리고 건실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 김지영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삶을 이어간다. 가정에 충실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내, 24평 국평(국민 평수) 아파트에 전세로 살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다. 누군가는 ‘행복하게 잘 사네’라고 말할 만큼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김지영은 김지영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된다. 대학시절 선배나 자신의 엄마가 되어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다. 평범하지만 행복할 거라 믿었던 그는 왜 정신적으로 무너진 것인가. 원작 소설은 평범한 김지영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조명하며 그의 일생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눈에 익어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튀어나온다. 남아선호사상과 가사노동 폄하, 출산에 대한 압박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그로 인한 여성의 경제권 박탈 등을 구체적인 심리 묘사 없이 심플하게 사건 중심으로 나열한다. 담백한 문체로 쓰인 얇은 소설이지만, 출간 당시 불러왔던 사회적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개봉 전부터 별점 테러가 이어지고, 국민 청원에 해당 작품 영화화를 막아달라는 청원까지 올라오며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야말로, 젠더담론의 최전선에 있던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소설보다 온건한 방향을 채택했다. 김지영이 주인공인 것은 동일하나 그의 관점에서 진행되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김지영을 포함한 주변 사람으로 서사를 넓혔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보다는 ‘우리’로 사람들을 묶고 같은 문제를 바라보게끔 관점을 돌렸다. 여성이 겪는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온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2018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경력단절여성 현황에 따르면, 한국은 기혼여성 900만 명 중 비취업 여성이 38.4 퍼센트다. 그중 절반이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다. 능력과 별개로 아이를 키워야 하기에, 가정을 돌봐야 하기에 집안에 있는 여성들은 그대로 사회와 멀어진 채 십수 년을 지내게 된다. 영화는 육아와 가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30대 기혼여성의 삶을 ‘폭로’하기보다 젠더, 세대 간의 연대를 이룰 수 있도록 그의 삶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는 쪽이다. 나아가서는 남자 형제 뒷바라지로 가장 공부를 잘했음에도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지영의 엄마(김미경), 커리어를 위해 좋은 엄마를 포기한 지영의 상사(박성연) 등 경험하지 않았어도 한번은 들어봤을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덧붙여, 남편 정대현(공유)은 ‘무심하고 나쁜 놈’이 아닌, 아내에게 다정하고 그의 아픔에 공감해주려 하는 인물로 그리며 말하고자 하는 건 고발이 아닌 연대임을 강조한다.
<보건교사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정세랑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정세랑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정세랑 특유의 톡톡 튀는 상상력과 따뜻한 시선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테다. ‘정세랑 월드’라 불리는 그의 작품들은 분명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외면한 채 ‘온건한’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의 병폐를 직시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데 많은 힘을 들인다. 다만, 문제를 나열하고 그에 절망하기보단 독특한 상상력과 인간다움으로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해나간다. 원작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러한 그의 경쾌함과 인류애가 특히나 잘 드러난 작품으로, 보건교사 겸 퇴마사로 일하는 여성 안은영에 대한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태로 풀어낸다. 퇴마사, 라고 표현했으나 그는 귀신 대신 사람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젤리’를 야광봉과 비비탄 총으로, 가끔은 위로로 퇴마한다. 직장인처럼 보이는 안은영의 모습은 심드렁해보이지만, 사실 학생들에게 애정이 있는 인물로, 순간 타오르기보단 꾸준하게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러한 소설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져오기보다, 보다 극적인 색채를 입혔다. 소설이 밝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강조했다면, 드라마는 보다 ‘젤리’라는 기이한 존재의 그로테스크함을 좀 더 강조했다. 원작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나, 드라마는 이를 영상화하여 드라마만의 이상하고 기이한 세계관을 구축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신조를 믿고 ‘내 몸이 좋아진다, 좋아진다’ 구호를 외치며 자신의 겨드랑이를 치는 건강체조는 사이비 종교의 기괴함이 느껴지며, 소설에서는 적당히 묘사되었던 젤리들은 형체를 갖고 꿈틀거리며 살아움직인다. (우리가 아는 꿈틀이 정도를 상상하면 안 된다) 원작이 안은영의 일상이라면, 드라마는 보다 거대한 문제를 파헤치는 안은영의 모험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선한 면모와 인류애보다는 각박하고 난폭한 세상에 투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더 강조된다. 소설에선 짤막하게 언급되었던 혐오와 폭력의 세계를 드라마는 선명하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이것이 현실’임을 보여준다. 덧붙여, 안은영을 연기한 정유미는 원작 속 안은영의 이상한 면모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이야기에 힘을 싣는다. 안은영이 젤리를 팍팍 무찌르는 모습을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장난감 총의 과녁이 내가 속한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한국이 싫어서>

2015년~2016년에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헬조선(Hell-지옥 + 조선)’, ‘수저계급론(부모의 자산으로 자신의 계급이 정해지는 것을 의미)이란 단어가 유행했다. 모두 한국 사회를 비난하는 자조 섞인 단어로, 특히 청년 세대의 취업난과 미래에 대한 절망이 짙게 녹아 있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5월에 출간한 책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한국 사회 기저에 깔린 자국 혐오에서 출발한다. 소설은 한국이 싫어 호주로 이민 가는 20대 여성으로, 장강명 작가는 “한국 사회가 젊은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한다. 상당수 젊은 여성들이 외국 생활을 동경하는 이유도 단순히 ‘외국병’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이분들을 공정하게 대해주지 않아서”라고 말하며 주인공을 20대 여성으로 설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주인공 계나는 외모부터 학벌, 재력, 심지어는 출세에 대한 욕망까지 평균 혹은 그 이하인 인물로 소설은 호주로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1인칭 수다 형식으로 전개한다. 그가 한국에 두고 온 것은 아주 많다. 친구들과 가족, 그리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에 안정적인 직장, 안락한 방과 익숙함. 그럼에도 그는 닭장 같은 공간을 나눠쓰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호주로 떠난다. 호주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지만,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익숙한 불행에서 떠났어야만 했다. 소설은 호주를 낙원으로 그리진 않는다. 오히려 이방인이 타지에서 느끼는 거대한 장벽을 꼼꼼하게 표현한다. 무작정 떠났지만 영어를 못하는 계나는 여전히 접시 닦이를 하며 최저시급을 받는다. 호주에서 만난 남자들은 전남친보다 나은 구석이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 영주권을 땄지만, 그 이후 모아놨던 돈을 다 날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설은 계나를 앞세워 ‘한국 망했다’를 외치는 계몽주의 작품이 아니다.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계나의 일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는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래도 한국이 낫지’ 혹은 ‘떠나는 게 낫겠다’를 판단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더 이상 ‘헬조선’이란 말이 들리지 않는 2024년에 개봉했다. 2015년 대비 청년 착취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 건 아니다. 빈부격차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냥 쉬는’ 청년들은 끊임없이 늘어만 가고 있다. 그럼에도 ‘헬조선’이란 말로 자국을 비판하기 보단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함?)으로 개인을 압박하고 냉소한다. 9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영화는 호주를 뉴질랜드로 바꾸거나 계나의 남자친구 인원을 줄이는 등의 사소한 설정을 제외하고 원작 소설을 거의 그대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2024년에 이 영화를 보면 다소 철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한다. 영화가 주는 울림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온다. 거의 10년 전 이야기임에도 관객은 계나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굳건한 사회의 계층 구조와 치열한 경쟁, 지옥철, 장시간 노동, 빈부격차, 외모/학벌 지상주의 등 10년 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한국 사회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절절한 고통을 나열하는 식의 ‘고난 포르노그래피’가 아닌 계나가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원작에 없던 만년 공무원 준비생 친구의 죽음과 뉴질랜드 지진, 교민 가족의 참사를 추가하면서 계나는 원작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감독은 호주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엔딩이었던 원작과 다른 결말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뉴질랜드에서 정규직을 얻고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지만, 현지 유학생들, 교민 사회를 취재해보니 도돌이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더해 20대 보수 성향의 남성 캐릭터를 추가해 각자의 가치관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딸에 대하여>

가장 최근 개봉한 <딸에 대하여>는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으로 남편은 죽고 가족은 집을 나간 딸이 전부다. 딸을 키우느라 자신의 노년은 대비하지 못한 전형적인 5060 세대 부모로 가진 건 낡은 집 한 채 뿐이다. 반면 딸은 동성애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동료를 위해 투쟁에 앞설 만큼 이상과 신념이 강한 30대 여성으로, 본인은 시간 강사 일을 하며 전국 곳곳을 전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경제적으로 어려워 동성 연인인 레인과 함께 다시 엄마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 사람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정서적으로는 완전히 독립했으나 경제적 독립은 실패한 딸과 딸이 ‘정상가족’ 틀 안에서 노년에 보호받으며 살았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별개로 몰이해로 내몬다. 엄마는 딸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지만 레인의 존재는 그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요양병원에서 가족 없이 버려진 노인들의 말로를 매일같이 목도하는 엄마는, 그들에게서 이따금 딸의 모습을 투영해 본다. 젊음이 지난 제 몸 가누기조차 버거워진 순간, ‘정상가족’이 없는 딸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법적인 구속 밖에 있는 친구나 애인은 오로지 감정이라는 고리만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연약하고 허술하다. 소설은 동성애자인 딸과 그의 연인, 그리고 보수적인 엄마의 동거로 동성애 뿐만 아니라 ‘이성애 중심의 가족 공동체’와 ‘노인 돌봄’, ‘노년 노동’에 대한 문제까지 섬세하게 다룬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원작의 사건을 충실히 따라가지만 소설의 문체를 영상 언어로 전환하며 장면 장면의 심리를 탁월하게 전달한다. 소설 속 긴 독백은 영상 속에서 배우의 눈빛과 침묵, 시선이 되어 관객을 그 순간에 데려다 놓는다. 엄마(오민애)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요양병원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다른 하나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이다. 딸이 노동생존권,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그로 인해 해고까지 당하는 건 ‘평범’하지 않다며 부정하지만, 요양병원에서 겪는 부당함에는 항의한다. 딸과 자신이 같은 문제를 겪고 있지만 ‘딸’이라는 시선에 막혀 그것이 같은 것임을 인지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엄마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레인(하윤경)이란 인물로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거리감 있고 어색한 사이이기 때문에 레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엄마를 설득한다. 눈물겹게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두 사람의 평행선 각도가 약간은 틀어진다. 아주 약간만 틀어져도 결국엔 만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