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만 영화가 좀처럼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대세가 된 화제작이 아니면 다른 영화에는 관객의 발길이 닿지 않게 된, 흥행과 다양성 양면이 모두 실종되어가는 오늘날 한국 극장문화의 상황은 뜻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낳곤 했습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 주목할 만한 영화적 완성도와 가치를 지녔지만 극장 상영관 수가 적게 할당되고, 대중적 관심에서 밀려난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월 25일 재개봉하는 <로봇 드림>과 더불어 나름의 관점으로 추려낸 세 편을 추천해보고자 합니다. 극장 개봉작이 너무 없다는 말 대신, 이 작품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연휴가 이어지는 가을을 알차게 보내는 시네필의 작은 낙(樂)이자 영화적 경험의 확장이 되어주지 않을까 합니다.

<젠틀맨> (김경원 감독, 2022년 12월 28일 개봉)
<아티스트 – 다시 태어나다>(2017)에서 저예산의 궁기가 보이지 않는 세련미와 예술의 본질을 묻는 주제의 심도 등, 범상치 않은 면모를 보여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신진감독 김경원은 본격적인 상업영화의 영역으로 넘어온 두 번째 영화 <젠틀맨>으로 형식미학적으로 탄탄한 연출의 세공력, 장르 오락 안에서 현재의 사회적 이슈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심어두는 완숙함을 보여준다. <유주얼 서스펙트>(1995)와 <스내치>(2000)와 같이 범죄계획의 치밀함, 데이비드 핀처를 연상케 하는 정교한 편집의 밀도와 음악적 리듬감 등,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감독의 통제력이 느껴지는 완성도는 창조적 활력을 잃은 채 기성의 서사 모델과 묘사의 표준에 기대어 안주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은 지금의 한국영화계에서 몇몇 대가급 감독의 작품 이외에는 좀처럼 볼 수 없게 된 미덕이다.

이 영화는 장르의 문법에 순응하지만 그 언어와 형식을 갖고 나름의 비판의식을 투영하는, 차세대 ‘대중적 작가’의 탄생을 알린 작은 신호탄이었다. 무엇보다 <젠틀맨>이 돋보이는 점은 사회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천만이 보장된 <범죄도시> 시리즈나 <지옥>과 같은 한국의 숱한 OTT 시리즈물이 잔혹한 폭력의 이미지와 스타일화된 만화적 악인들을 제시하며 통쾌한 복수나 프로파간다의 전시 효과, 일종의 사회적 포르노에 가까운 즉자성, 직접성, 자극성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한국사회의 어둠을 장르로 끌어들이는 반면, 이 영화는 법의 영역 밖에서 활동하는 자경단의 존재를 제시하지만, 정작 그들이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의 복수를 위해 실행하는 작전과 수단은 철저히 지능적이고 비폭력적이며, 문제를 다시 합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해결한다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젠틀맨>은 폭력의 쾌감에 무감각해진 나머지 자극적인 언어와 이미지를 쏟아내는 데 거리낌 없어진, 때문에 도리어 시스템의 문제에는 갈수록 무지해져만 가는 한국영화의 윤리적 타락과 퇴보에 대한, 더는 이대로 썩어가서는 안 된다는 결기에 찬 한 신인감독의 비판의식이 빚어낸 산물이자 영화적 방부제에 다름 아니다. 코로나 시국과 세 차례에 걸친 극장 표값의 상승이 한국의 극장문화를 붕괴시킨 가운데, 관객의 호응도, 제대로 된 비평의 진지한 관심도 받지 못했던 이 ‘저주받은 수작’은 기필코 재발견되고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바튼 아카데미> (알렉산더 페인 감독, 2024년 2월 21일 개봉)
상류계급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 기숙학교에서 벌어지는 사제(師弟) 지간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바튼 아카데미>(2023)의 플롯은 다분히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진취적이고 의욕 넘치며 보수적인 학풍에 저항하던 키팅 선생과 달리 폴 허넘(폴 지아매티)은 철 지난 라틴어 격언을 입에 달고 살며 학교의 전통과 규율을 지킴에 있어선 융통성 없는 보수주의자이고, 보살펴야 할 학생 앵거스 털리(도미닉 세사)는 수업에 불성실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속을 썩이는 문제아이니 학원 청춘드라마의 콤비로서는 영 맞지 않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영화의 감정적 울림은 물과 기름 같은 상극이었던 폴과 앵거스 두 사람이 어울림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게 되는 과정에서 찾아온다. 점차 친밀해진 폴과 앵거스의 관계는 형식적인 선생과 학생을 넘어 유사 부자(父子)로까지 발전한다. 방황하던 청년은 선생에게서 열망하던 아버지의 자리를 보게 되면서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혼자만의 삶에 침잠해 있던 폴은 어른의 본분을 다 하고는 굳어져있던 알의 껍데기를 깨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간다.

<바튼 아카데미>의 핵심 모티브는 ‘아버지의 부재(不在)'이다. 사회학적 용어로서 ‘아버지’란 단어는 질서와 합리성, 권력과 책임을 함축하며, 종교의 관점에서는 신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버지가 가족 구성원을 통합하고 책임지는 존재라면, 신은 죄인을 심판하고 억울한 이를 구원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영화 속 70년대의 미국은 그러한 ‘아버지’의 ‘부재’로 무질서해진 혼란하고 부조리한 사회상에 다름 아니다. 같은 학교 졸업생이라도 특권층의 자제는 자동으로 명문대에 입학해 신분을 대물림하고, 하층 계급의 자식은 베트남전에 총알받이로 끌려 나가야 하는 판에 올바른 인재를 육성한다는 학교의 창립 취지는 유명무실해졌다. 재혼한 앵거스의 어머니가 자식을 내버리다시피 하고, 친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가있는 상황의 설정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이 영화에서 알렉산더 페인은 작게는 가족,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부재’를 겪는 공동체의 균열과 붕괴, 아메리칸드림의 퇴조라는 비판의식을 조형해낸다.

폴이 퇴학 직전의 위기에 몰린 앵거스를 감싸며 교직을 그만두는 결과를 감수할 수 있었던 건, 초대 교장이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 상처 입은 자신을 받아주었던 인생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죽는다. 그리고 참된 어른의 자세를 배운 앵거스는 폴의 유산을 이어받아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이다. <슈퍼맨>(1978)에서 말론 브란도의 대사를 잠시 빌리자면 <바튼 아카데미>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The son becomes the father and the father becomes the son) 세대 유전의 역사드라마인 것이다.

<로봇 드림>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 2024년 3월 13일 개봉)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은 상실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기묘한 우화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강아지이고 인간형 로봇을 만들어 상용화된 제품으로 내놓을 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한 세상이지만, 집안엔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다이얼식 전화기가 놓여있고, 주인공 ‘도그’는 오늘날 비디오 게임의 한참 조상님 격인 카트리지 게임 ‘퐁’을 즐기는 걸로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다. 주제곡처럼 줄기차게 들려오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September’는 1978년에 발표된 곡이며, 뉴욕을 모델로 한 공간 배경에는 911 테러로 무너지기 이전의 세계무역센터가 눈에 짚인다. 로봇은 SF 장르의 전형적인 컨벤션이지만, 영화가 그려내는 세상은 80년대를 연상케 하는 낡은 것들로 가득 차 있어, 그 시절의 대중문화를 접해본 사람에겐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질 법한 운치를 자아낸다.

혼자이던 도그는 로봇과 어울리면서부터 우정과 교감, 유대와 같은 인간적 가치를 배우게 되는데, 극이 진행됨에 따라 영화는 색의 변화로 도그의 심상 세계를 표현한다. 혼자만의 방은 칙칙하고 음울한 톤이었지만, 로봇과 함께 소풍 나온 야외는 형형색색의 컬러로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상승곡선을 그리며 도그를 행복한 시간으로 초대한 영화는 예기치 않은 고장으로 로봇이 해수욕장에 버려지는 순간을 기점 삼아 그를 슬픔의 바닥으로 추락시킨다. 도그와 로봇의 관계를 사람으로 바꾸어 보자면, 사실 이건 매우 익숙한 이야기 구도이다. 연인과의 행복한 한때와 뜻하지 않은 이별, 각자 다른 인생 역정을 겪고 한참 뒤 재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뒤라는 정형화된 멜로드라마의 플롯. 그러나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감흥은 극이 얼마나 통속적인 구도 안에서 돌아가는지를 잠시 잊게 할 만큼 절절하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기 마련이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불러오는 예기치 않은 변화와 사건들은 삶에 변화를 요구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행복했던 시절, 생애의 어느 한 시제에 멈춰있어 집착하곤 하며, 현재의 지평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슬픔의 눈물기가 배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때 그토록 소중했던 물건들, 끊어지면 죽을 것만 같았던 관계와 인연들은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한 추억으로 흐릿해져 있고, 어느새 우리는 무심해져 있으며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長江後浪推前浪) 듯, 삶의 시간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얼핏 보면 유치해보이는 그림체로 선입견을 쓰고 볼 수 있지만, <로봇 드림>은 이와 같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에 대한 깊은 상념과 사색의 순간으로 관객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