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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 앞 노동자의 딜레마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 사이에서

씨네플레이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 사이를 매끄럽게 유영하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지만, 아무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구조조정의 칼날 앞, 해고 통보를 전하는 인사과 직원 준희(장성범)는 마주 앉은 이의 눈을 보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미처 알지 못했던 저마다의 사정이 드러날 때마다 준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일하는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진다. 다른 인사팀 직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위치와 역할에 충실했더니 동료 직원들은 그들을 부역자라 손가락질하고, 한 발짝 물러선 임원들은 인사팀에게 악역을 떠넘기고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린다.

노동분쟁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인사 담당자를 악역으로 납작하게 그려왔던 것과 다르게 <해야 할 일>은 준희와 그가 속한 인사팀을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으로 앞세운다. 똑같은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 주어지자 선과 악이 모호해지고 부서와 업무, 직급과 연차, 학력과 성별, 처지와 입장 간 복잡하고 애매한 감정의 민낯은 선명해진다. 실제 노동분쟁의 현장이 폭력, 회유, 협박이 난무하는 노-사의 극렬 대립과 만화적 악인으로 채워진 범죄 액션 영화보다 가장과 사회인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해온 강한 자부심의 상실과 뒤따르는 치욕과 슬픔으로 채워진 드라마에 가까움을 지적하며 <해야 할 일>은 노동자들 사이의 반목과 불신, 긴장과 갈등이 정리해고라는 극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구체화되는지 실감 나는 묘사로 조목조목 따져 나간다.
 

'먹고사니즘' 앞 노동자의 딜레마
 

〈해야 할 일〉 준희(왼)와 이동우 차장
〈해야 할 일〉 준희(왼)와 이동우 차장


지방의 중소 중공업 4년 차 대리 준희(장성범)는 막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참이다. 수주 절벽을 맞이한 조선소는 활력을 잃은 지 오래고, 회사는 경영실적 악화로 채권단의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는 중이다. 팀을 옮기자마자 준희가 속한 인사팀에 구조조정을 위한 해고 대상자 명단을 만들라는 지시가 도착한다. 사무직에서 150명을 추려내야 하는, 아무도 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국가 기간산업의 중추적 담당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해온 인사팀 팀장은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며 회사 회생에 진심이다. 그만큼 휘두르는 칼날도 날카롭다. 차석인 부장은 거듭된 구조조정에 염증을 느끼며 팀장과 반목하지만 멈출 방도는 없기에 태업한다. 이 난제는 결국 이 차장(서석규)과 이제 막 발령을 받은 준희의 손에 떨어진다. 마음은 무겁지만 회사의 위기 타개를 위한 불가피한 일이라 서로를 다독이며 둘은 밤을 지새우고, 주말을 반납한다. 그렇게 150명 인원 감축을 위한 공식이 엑셀 시트에서 조금씩 완성돼간다.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준희는 마침내 회사가 정리한 블랙리스트 인물 150명을 해고자 명단에 고스란히 올릴 수 있는 공식을 찾는다. 교묘하게 고안된 이 기준표가 초석이 되어 구조조정은 급물살을 탄다. 인사팀은 구조조정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잡음 없이 끝내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회사 입맛에 맞는 근로자 측 대표를 세우고, 사측이 고안한 해고 대상자 선발 기준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이런 회사의 습성을 잘 아는, 소위 '강성' 직원 몇몇이 중심이 되어 회사 행보에 제동을 걸기도 하지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 한다.

그러나 합리적인 구조 조정안으로 현실을 (나름) 객관적으로 진단하고자 했던 인사팀의 노력은 곧 배신당한다. 본부장들은 연줄이 닿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명단을 뒤집고, 회사는 '회장'님의 안위와 사회적 시선을 고려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구조조정을 서둘러 끝내려 한다. 명분도 실리도 사라진 소동 앞에서 팀장은 이러면 누가 회사를 믿고 따르겠냐며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소리를 높이지만 일개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 그의 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산산이 조각나 버린 직원들 간의 유대와 살아남았다는 일말의 안도감,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패색 짙은 조선소를 무겁게 짓누른다. 자본의 거대한 힘 앞에서 그렇게 노동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패배한다.

 

현실과 유리된 회색 지대 노동자의 괴리감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현실과 유리된 회색 지대 노동자의 비애는 2016년 실제 있었던 사회적 격변과 대비되며 더 도드라진다. 능력을 인정받은 덕분에 어쩌다 보니 동료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게 된 준희는 존경하는 회사 부서장과 친한 선배 중 한 명을 해고 예정자로 택일해야 하는 잔인한 순간에 몰리기도 한다. 커져가는 죄의식은 2016년 하반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시위 장면과 교차되며 자괴감으로 변한다. 누군가가 경영진의 입맛에 맞는 구조조정 호소문을 인쇄하기 위해 인쇄소를 찾는 동안, 누군가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한 구호를 뽑아낸다. 준희가 한때 품었던 사회개혁의 꿈은 '먹고사니즘'에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준희는 그저 체념과 타협의 자리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의 감독 박홍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감독의 실제 경험을 영화에 투영
 

감독 박홍준(왼), 배우 장성범
감독 박홍준(왼), 배우 장성범


준희가 느꼈던 영화 속 부끄러움이 박홍준을 감독이 되게 했던 것일까. 영화 속 준희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의 감독 박홍준은 실제로 부산에 있는 조선소 인사팀에서 4년 반을 근무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주말이면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리는 강좌에 참석해 영화를 공부하면서 단편 <이삿날>(2017)과 <만끽연가>(2018)를 연출했다고. 퇴사와 함께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명필름랩 6기로 합류하며 첫 장편 영화 <해야 할 일>의 기초를 다졌다.

노-사 갈등의 보이지 않는 한 축을 확대해 노동 현실을 실감 나게 담아내고, 영화 속 인물들을 악인이나 의인으로 양단하지 않기 위해 경계하며 균형을 잡는 데 공을 들인 감독의 노력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먼저 알아봤다. <해야 할 일>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유수의 독립영화제 주요 부문 6관왕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일선에서 정리해고를 실행해야만 하는 인사팀 직원의 내적 갈등을 빼어난 연기로 그려낸 준희 역의 장성범은 이 영화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인사팀장 규훈 역의 김도영은 제25회 부산독립영화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