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초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묘>에서 무당 화림으로 분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보인 김고은 배우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재희 역으로 돌아왔다.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갓 대학 새내기가 된 스무 살부터 회색 정장을 입은 직장인이 된 서른셋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재희의 13년 동안의 시간을 보편적인 공감대로 풀어낸다. 기어코 나와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세상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재희의 일상에는 무조건적인 혐오와 차별, 타인의 멸시가 꼿꼿이 박혀 있다. 김고은 배우는 여느 작품보다 더 발랄하게, 또 씩씩하게 일상적인 혐오에 맞서는 인물 재희를 연기한다. 김고은 배우를 만나 캐릭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영화 공개 후에 반응이 좋았는데, 기분이 어떠셨어요?
기분 너무 좋죠. (웃음) 아직 관객분들을 만나기 전이긴 하지만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늘 작품 공개되기 전에는 어떻게 봐주실지 너무 떨리고, 이게 항상 좋은 평가를 기대하지만 또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긴장이 되는 것 같아요.
재희의 패션 스타일로도 주목을 받고 있어요. 재희와 동갑이기도 한데 본인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면서 스타일링과 관련해서 의견을 내기도 했나요?
자유로워 보이고 튀는 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저 상의에 하의가 이게 맞아’라고 느낄 정도로 매치하기 힘든 옷들을 매치하고, 신발도 자세히 보면은 거의 꺾어 신거든요. 맨발에 꺾어 신는데, 그런 식으로 입고 싶은 대로 입는 인물. 그리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기보다는 그 아이가 갖고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길이의 반바지여도 다리를 오므리고 앉는 게 일반적이라고 하면 재희는 다리를 좀 더 편하게 앉아요. 또 상체를 숙일 때 옷깃을 여미지 않는 거죠. 이런 무신경한 태도를 통해서 ‘쟤 진짜 과감하다’, ‘자유분방하다’고 느껴지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재희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대사들이 더해지면서 영화 속 재희가 원작보다 더 성숙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자꾸만 회피하는 흥수(노상현)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잖아요. 영화 속 재희는 원작과 어떻게 다르게 그려내려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재희가 흥수랑 막 싸우면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자신에게서 답답하고,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상대에게 얘기를 했다고 생각해요. 재희랑 흥수는 닮아 있거든요. 처음에 재희가 흥수랑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고슴도치처럼 가시 안에 자신을 숨기는 흥수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나랑 같은 사람이라고 확 느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라는 대사도 사실은 재희가 재희 자신한테 한 말이에요. 재희가 자신한테 수도 없이 많이 했던 위로였을 거예요. 제일 듣고 싶었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아서 자기 자신한테 스스로 해왔던 말을 성 소수자인 흥수한테 해준 거죠. 어떻게 보면 재희는 그 말이 가장 진실되고 제일 큰 위로의 말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흥수한테 했을 것 같아요.
김고은 배우가 인물을 매력적으로 잘 살렸지만, 어떻게 보면 재희라는 캐릭터는 비호감일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도 디테일하게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요. 감독님이랑 어떤 것을 더해서 풍부하게 만들어 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재희라는 인물을 처음 접했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진짜 친한 언니가 된 것처럼 ‘저렇게 행동하니까 오해를 받지’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연기를 할 때는 관객분들이 재희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했어요. 어떤 이면에 대해서 저 아이가 저렇게 표현을 하게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에서 갖게 된 어떤 아픔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저렇게 표현이 서툴고 혹은 날서 있고 이런 부분들이 좀 짠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정말 까딱 잘못 표현하면은 재희라는 캐릭터가 나쁘게 보일 수 있거든요. ‘사실 재희는 그렇지 않아’ 이렇게 그녀를 대변하는 마음으로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확 말해버리는 것처럼 재희가 강렬한 대사를 할 때가 더러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는 우려되는 지점은 없으셨어요?
어떻게 하면 그 대사 뒤에 이어서 더 맛깔나게 욕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웃음)

이언희 감독님과 처음 작업하셨는데, 두 분의 호흡은 어땠나요?
감독님하고 진짜 으쌰으쌰하면서 촬영했던 것 같아요. 진짜 짧게 촬영했거든요. 그렇게 짧게 촬영할 수밖에 없는 규모의 영화였고요. 하지만 촬영을 해야 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씩씩하게 했어요. 매일 ‘우리 이거 무조건 할 수 있다’, ‘대본 안에 있는 건 무조건 다 찍어낼 수 있다’ 이런 얘기들로 서로 북돋아주면서요. 어려운 상황도 많았는데 진짜 동지처럼 작업한 느낌이에요.
노상현 배우는 연기 경험이 아주 많지는 않잖아요. <파친코> 이후에 그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두 번째 작품인 셈인데, 굉장히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쳤어요. 김고은 배우가 도와준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두 분 함께 작업하시면서 어떠셨어요?
진짜 합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상현 씨랑 집 장면을 본격적으로 찍기 전부터 대화를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장면과 현실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초반에는 상현 씨도 고민을 치열하게 하는 스타일이어서 감독님하고 셋이서 긴 시간 동안 장면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근데 점점 대화를 하지 않고 눈만 봐도 합이 맞을 정도가 되어갔어요.
준비 과정에서 노상현 배우, 이언희 감독님과 함께 클럽도 다니면서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영화 속에서 어떻게 두 분이 그렇게 ‘찐친’처럼 보일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네요.
촬영 전에 몇 번의 모임을 가졌어요. 서로 춤추는 모습도 다 봐서 많이 허물어진 것도 있었죠. 근데 저는 재희와 흥수 사이에서 스킨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부분을 감독님과 상현 배우한테도 이야기를 했었고요. 그 스킨십이 남녀 사이에서 하는 스킨십이 아니지만 굉장히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영화 속에 의도적으로 넣었어요.


재희와 흥수가 사랑하는 방식은 정반대잖아요. 재희는 사랑에 엄청 진심이고 열중하는 인물인데 그런 캐릭터를 보면서 공감이 많이 갔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재희의 사랑을 하는 방식을 보면서 가장 속 터졌죠. 재희는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이 굉장히 큰 아이예요. 그 친구가 가장 예민한 시기인 사춘기일 때 큰 상처를 받았는데 그것에 대한 치유를 못 받았다고 생각해요. 스크래치가 나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나이가 들어버린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채우려고 애를 쓰는 거죠. 그래서 남자친구들을 만날 때도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기보다는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훨씬 더 중요하게 보는 거죠. 자신이 그 사람에게 1순위인지 아닌지에 엄청 집착하잖아요. 사실은 그 남자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사랑받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재희가 시행착오를 겪는 기간이 친한 친구나 친한 언니의 입장에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좀 안타까웠을 것 같아요.
재희가 산부인과를 뛰쳐나와서 담벼락 앞에서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재희의 뒤에 있는 담벼락이 재희가 처한 상황과 그녀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 것 같았는데요. 이 장면에서는 어떻게 감정선을 잡았는지 궁금해요.
비로소 재희가 자기 속 안에 있는 응어리를 다 토해낸다고 생각했어요. 재희는 맨날 흥수한테는 솔직해져라고 말하지만 사실 저는 재희도 안 솔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다 감추면서 센 척하고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나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아’ 이러는데 사실 흥수한테 이렇게 말하잖아요. “남들이 나보고 그렇대. 진짜 그래?” 이 대사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사실은 남의 말을 다 듣고 다 상처받고 그런 것들이 폭발한 거죠. 그간에 쌓여왔던 것들을 터트려버리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재희가 남들에게 그런 얘기를 듣는 거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또 그렇게 살아야지만 살아질 수 있는 애였고요. 근데 남자친구한테만큼은 그 말을 들으면 안 됐었는데 그런 말을 공개적인 상황에서 남자친구한테 딱 들으니까 무너졌던 것 같아요. 그 마음이 뒤이은 여러 사건들로 이어지면서 쌓여 있던 설움이 확 폭발해버린 거죠.
배우님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도 궁금하네요.
저는 흥수랑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는 장면이요. 흥수와의 관계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어요. 진짜 막 울고 코피 터지게 싸우다가도 내가 흥수의 머리끄댕이를 잡는 건 괜찮은데, 남한테 얻어 퍼지는 거는 못 봐주는 거죠. 그게 그 둘의 사이이지 않을까 싶어요.

<대도시의 사랑법>의 재희는 김고은 배우님이 출연하셨던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 유미의 사회초년생 시절을 보는 것 같기도 한데요. 두 작품 다 여성이 20대, 30대에 들어서 마주할 수 있는 고민들을 잘 녹여낸 작품입니다. 두 작품을 비롯해서 김고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 역할을 맡은 캐릭터와 연령대가 같은 여성들의 보편적인 얼굴을 잘 그려낸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작품 속에서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그 시기가 다 우리네 삶인 것 같았거든요. 저도 겪었고, 제 친구들도 겪었고요. 그 시기를 안 겪은 사람들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방식으로 겪었는지 그 차이는 있겠죠. 내면의 갈등과 생각들이 막 엉키고, 사회가 원하는 방향과 내가 생각하는 게 달라서 충돌하기도 하고, 20대 때 사회에 딱 던져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는 그런 기분인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이번 작품에도 인물 안에 잘 담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서 공감이 많이 갔기도 했고요.
영화 속에서 재희의 13년 동안의 시간과 인물의 성장을 그렸잖아요. 재희가 나다운 모습을 찾았듯이 김고은 배우도 김고은 다운 걸 찾았는지, 자신의 성장을 어디에서 발견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성장이라는 거는 당장은 모르는 것 같아요. 몇 년이 지났을 때 ‘나 성장했네’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긴 해요. 그냥 한 작품 한 작품 끝날 때마다 자기반성을 하고 개선할 것을 생각하고, 운동선수들이 매일 같은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성장해 있듯이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