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의 영화관. 그럼에도 <위키드>의 반응이 심상찮다. 개봉날 바로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2024년 최고의 영화 후보로 단숨에 등극했다. 국내에서도 사전 예매량만 무려 13만 8천 장으로 타 영화 대비 압도적인 예매량을 선보였다. 로튼토마토 토마토 지수 역시 92퍼센트로, 평단과 관객 양측 모두 호평하는 분위기다. 영화 <위키드>는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고유함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긴 작품으로, 무대의 생생함을 영화만의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메웠다. 원작의 매력은 그대로 살린 채, 영화가 잘 할 수 있는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해낸 <위키드>. 오늘은 <위키드> 개봉을 기념하여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위키드>

뮤지컬 <위키드>는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소설, 「위키드」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오즈의 마법사> 세계관을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위키드>는 악명 높은 서쪽 마녀 엘파바와 좋은 마녀 글린다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마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마법 세계에서 겪는 갈등과 우정, 그리고 각자의 선택이 어떻게 그들을 이끄는지 다루고 있다.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들을 통해 진실,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Defying Gravity’는 초록색 피부를 가져 끊임없는 차별을 겪어오던 엘파바가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결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그의 힘과 결단력을 담은 넘버인데, <위키드>의 대표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천장으로 솟구치며 수직으로 날아오르는 엘파바가 시원하게 곡을 내지르는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거대한 시청각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장면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두려울 게 없어진 기분이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위키드>는 원작에서 1막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클라이맥스 “Defying Gravity”를 향해 달려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찜찜하게 끝나거나 완성도가 미흡하지 않다. 오히려 1편 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뮤지컬 영화다. 팬들은 ‘이제 시작이다’라며 1년 뒤를 간절히 기다리는 상태. 각성한 엘파바가 펼치는 무수한 모험은 2부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1편이 이 정도면 2편은 대단할 거란 평이 지배적이다.
<시카고>

뮤지컬 <시카고>는 1920년대 시카고의 화려한 밤거리와 그 이면을 그린 작품이다.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특유의 재즈 넘버와 현란한 안무로 관객들을 사로잡아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공연된 작품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벨마 켈리와 록시 하트라는 두 주인공이 각자의 살인 사건을 계기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 벌이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를 통해 언론의 선정성과 대중이 열광하는 명성의 허상을 풍자하며, 권력과 명성의 이면을 고발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주인공이 명성을 얻기 위해 펼치는 음모와 경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당시 시카고 법정의 부조리함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재즈와 블랙 코미디를 엮어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낸 <시카고>. <시카고>는 다른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무대, 음악적인 면에서도 꽤나 차이를 보이는데, ‘뮤지컬’하면 떠오르는 시원하게 지르는 넘버가 없다. 사람이 날아다니거나 무대가 역동하는 연출도 거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이 된 건 배우들의 끈적한 연기력과 섹시하고 음울한, 그럼에도 화려한 재즈 때문일 테다.

2002년에 개봉한 영화 <시카고>는 원작 뮤지컬의 핵심인 재즈와 화려한 안무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영화적 표현을 더해 비주얼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감독 롭 마샬은 뮤지컬의 연극적 연출을 영화 매체의 특성에 맞게 변형하여, 각 장면이 관객에게 보다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게 했는데, 대표적으로 ‘Cell Block Tango’ 넘버가 있다. 해당 장면은 벨마를 포함한 여섯 명의 살인범들이 자신의 사연을 탱고에 맞춰 부르는 넘버로 영화에서는 각 죄수들의 이야기를 플래시백과 몽타주 기법으로 표현하여 각 캐릭터의 심리와 범행 동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시카고>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해 6관왕에 오르는 성적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에는 수많은 뮤지컬 영화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렌트>

뮤지컬 <렌트>는 199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배경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문제 속에서도 꿈과 사랑을 찾아가는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996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당대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여전히 90년대 최고의 록 뮤지컬로 손꼽힌다. 작품은 주인공 마크와 로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사랑과 예술, 그리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난, 에이즈,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라 보엠>이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라면 <렌트>는 이를 1990년대 미국 뉴욕의 신세대 예술가 이야기로 변환했다. 다만, 단순히 <라 보엠>의 현대 버전은 아니며, 제작자 조나단 라슨의 개인적 경험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작품에 녹아있다. 그는 뉴욕 슬럼가에 살며 작품을 준비했는데, 실제로 그의 친구들은 작품 속 인물들처럼 에이즈에 걸린 이들이 있었고 에이즈로 친구를 잃은 경험이 <렌트>에 녹아있다.

2005년 개봉한 영화 <렌트>는 초연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이 직접 연기했는데, 속도감 있는 무대 연출과는 또 다른, 캐릭터의 서사가 더 드러나는 형태로 연출해 뮤지컬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원작 뮤지컬에서는 1막의 사건들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이지만, 영화에서는 이 사건들이 사흘에 걸쳐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시간의 흐름이 더 확장되었다. 영화는 뮤지컬보다 비교적 시간 표현에 자유롭기 때문에 플래시백을 활용해 에이프릴이 왜 에이즈에 걸렸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내거나, 무대에선 생략된 마크와 로저가 보낸 시간을 영화에선 압축해서 보여주어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내용상 아예 달라진 부분도 있는데, ‘Take me or leave me’는 원래 모린과 조앤이 시위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서로 다투다가 터지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선 모린과 조앤의 약혼식장으로 배경이 바뀌고, 두 사람은 연인 간의 다툼을 하다 해당 장면이 시작된다. 영화 <렌트>와 뮤지컬 <렌트>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면서 각 매체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뮤지컬은 라이브 공연의 즉각적인 에너지와 배우들의 현장감으로 관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보다 ‘뮤지컬계의 반항아’스러움을 강조했다면 영화는 시각적 디테일과 편집 기법, 추가 스토리로 캐릭터의 심리적 깊이와 현실감을 강화했다. 따라서 원작 팬인 경우, 영화가 다소 아쉽다는 반응이 대다수. 하지만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은 영화 자체로도 꽤나 재밌는 작품이었다고 더러 평했다. 만약 <렌트>를 볼 계획이 있다면 원작과 비교하지 않고 영화 자체로 즐겨보는 것은 어떨지.
<마이 페어 레이디>

<마이 페어 레이디>는 개봉한지 6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무대와 스크린 모두 압도적인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영화는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1913) 희곡을 원작으로 두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조각가였던 그는 상아로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하는데, 신에게 조각과 닮은 여자와 결혼하게 해달라 빌자 조각이 사람이 되어 그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버나드 쇼는 조각이 인간이 된 시점에서 이미 그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피그말리온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 이야기하며 희곡에서도 이러한 지점을 드러낸다. 희곡 「피그말리온」은 하층 계급 출신인 엘라이자가 언어학자 헨리 히긴에게 거둬져 상류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사회적 계층과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엘라이자가 언어를 배우고 상류층이 되어 가는 과정은 단순히 외적 변화를 넘어, 자아와 존엄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상류층 귀족 여성처럼 길러졌으나 실질적인 지위는 여전히 하류층인 엘라이자는 상류층에 낄수도, 하류층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만든 히긴스를 떠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1956년에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제목으로 브로드웨이에 올랐는데, 7년간 무려 2천여 회나 공연될 정도로 대흥행했다. 뮤지컬은 언어학자였던 그가 내기로 ‘발음만 바꾸면 상류층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엘라이자를 집에 들여 교육하고, 완벽한 상류층의 모습을 갖춘 그가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회의감을 느끼는 것까지 원작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결말만은 원작과 다르게 마무리된다. 영화는 뮤지컬보다 배경과 세트를 더 화려하게 꾸며 엘라이자가 변화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 오드리 헵번이 엘라이자 역을 맡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면 시각적 황홀함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 더불어 이러한 화려한 연출은 엘라이자의 외적 변화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느끼는 부조리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그의 신분을 대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물랑 루즈>

모든 뮤지컬 영화가 무대를 고향으로 두고 있진 않다. 마지막은 관계가 역전된 작품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영화 <물랑 루즈>는 2001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로, 1899년 파리의 물랑 루즈 카바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랑 루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환락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신분 상승을 꿈꾸는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젊음을 팔아넘기는 공간이기도 했다. 주인공 샤틴(니콜 키드먼)은 그곳의 스타로, 성공을 위해 투자자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보헤미안 혁명에 합류하기 위해 파리로 넘어온 어느 영국의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사랑을 화려한 비주얼과 독창적인 음악으로 전개해 당시 뮤지컬 영화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아직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는 1899년 파리의 비주얼 위에 현대적인 팝송들을 재해석하여 <물랑 루즈>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LaBelle’의 곡을 커버한 ‘Lady Marmalade’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빌보드 핫 100에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화려한 의상과 세트, 빠른 편집과 관능적인 연출은 스크린 너머 무대를 상상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2018년 뮤지컬 <물랑 루즈!>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뮤지컬은 영화의 감동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면서, 새로운 음악과 무대 연출을 더 해 무대만이 전할 수 있는 매력을 선보였다. 원작에 포함된 곡 외에도 다양한 현대 팝송을 추가해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강조했다. 특히, 영화에서는 2001년 당시 팝송들 위주였으나 뮤지컬에서는 레이디 가가, 아델, 리한나 등 이후 수십 년간의 다양한 히트곡을 포함했다. 무대는 카바레 한가운데에 들어온 듯 붉은빛 조명에 수천 겹의 붉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관객의 머리 위로는 샹들리에까지 달려있어 마치 19세기 말 물랑 루즈로 순간이동한 것 같다. 영화에선 느낄 수 없던, 카바레의 현장감을 무대에서 채워준 셈이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