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애니메이션 <벨빌의 세 쌍둥이>에서 자크 타티 감독에게 직접적인 오마주를 바친 애니메이션 감독 실뱅 쇼메가 자크 타티의 미완성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는 자크 타티의 딸인 소피 타티셰프가 실뱅 쇼메 감독에게 아버지의 세상에 나오지 못한 각본을 전하면서 시작됐다. 그녀는 <벨빌의 세 쌍둥이>에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바친 실뱅 쇼메의 오마주에 감동했고,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애니메이션만이 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수채화풍의 작화와 그림책을 보는 듯한 캐릭터 디자인, 영화적 연출과 프랑스적인 정서가 강점인 실뱅 쇼메 감독은 자크 타티의 세계를 재현할 적임자로 제격이었다. 그는 자크 타티의 세계관을 자신의 프리즘으로 독창적으로 해석해 그가 존경하는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오마주를 선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일루셔니스트 타티셰프(크레딧에서는 '일루셔니스트'라고만 명시됐으나 작중 포스터에는 자크 타티의 실제 성인 타티셰프라고 나온다). 그는 마술을 선보일 공연장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술집에까지 다다르고, 그곳에서 마술 공연을 펼치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그곳에서 청소와 잔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 소녀 앨리스를 만난다. 하루하루의 노동에 치여 꿈과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소녀에게 그는 마술로 온기와 희망을 건넨다. 앨리스는 새로운 무대를 찾아 그곳을 떠나는 일루셔니스트를 따라 도시 에든버러로 향한다.
일루셔니스트 자크 타티의 마지막 각본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캐릭터 윌로 씨를 연기한 배우이자 감독인 자크 타티의 실사 영화용 각본을 애니메이션화한 영화다. 레인코트를 입고,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문 어수룩한 캐릭터 윌로 씨는 그의 영화 속에서 온갖 소동을 일으켰다. 자크 타티 감독은 최고의 코미디 배우이자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처럼 자신의 영화 속에서 캐릭터 윌로 씨로 출연해 슬랙스틱 연기를 선보였다. 이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찰리 채플린의 부랑자 캐릭터와 같이 영화사의 전설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자크 타티가 <일루셔니스트>의 각본을 쓰게 된 건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 마임 연기자로 유랑 생활을 했다. 1930년대 초반 뮤직홀에서 당대의 스포츠 스타들을 흉내 내는 마임을 통해 명성을 얻었고, 이후 배우로 영화에 입문했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일루셔니스트 타티셰프의 모습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마임이스트 타티의 슬픈 뒷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일루셔니스트>에서 타티셰프의 마술은 착각을 일으키고 환상을 보게 하는 자크 타티의 예술 그 자체이다. <축제일>, <윌로 씨의 휴가>, <나의 아저씨>, <플레이타임>, <트래픽> 등 타티의 영화는 줄곧 환영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환영'의 사전적 의미는 ‘감각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환각 현상’이다. 시청각적으로 교란하고 착각을 일으켜 코미디를 유발한 타티의 영화는 그야말로 환영의 세계였다. 또 그의 영화적 기반이 된 마임도 실제로는 없는 사물을 연기를 통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는 점에서 환영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모호함 속에서 빚어지는 환영이 아닌 선명함 속에서 드러나는 환영이었다. 영화 이론가 미셸 시옹(Michel Chion)은 그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타티는 이른 아침 아직 인간의 지각이 제대로 결합해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가 느끼는 메스꺼운 인상들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그런데 그는 감각들의 모호함이 아니라 당혹스러운 선명성으로 이 인상들을 표현한다”(「영화, 소리의 예술」, 저 미셸 시옹, 역 이윤영, 문학과지성사, 2024, 294쪽).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가운데에서


영화의 초반은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가는 마술사의 차가운 현실을 드러낸다. 파리의 뮤직홀에서 타티셰프는 공연장에 일시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대에 선다. 영국의 뮤직홀에서는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록밴드의 무대가 끝나고 단 두 명의 관객만이 남은 빈 공연장에서 마술을 선보인다. 뮤직홀이 아닌 호화로운 연회장에서도 그는 관중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오페라를 점잖게 듣고 있던 연회장의 관객들은 타티셰프가 마술을 선보이자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영국의 록밴드는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음악이 매체를 통해 대중의 호응을 얻는 대중 예술로 거듭난 시대적 상황을 드러낸다. 영화 속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듯한 록밴드 보컬의 무대 매너에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하지만 타티셰프의 마술은 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고급 예술을 즐기는 상류층의 사람들 또한 그의 예술을 외면한다. 대표적인 고급 예술인 오페라를 감상하는 그들에게 마술은 단지 저열한 문화이다. 타티셰프의 마술은 대중문화를 즐기는 관객과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관객 어느 쪽에도 선택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의 마술은 전통적인 문화와 풍습이 아직 남아 있는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의 사람들에게서는 환영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타티셰프의 마술을 예술로 바라보지 못하고 잠깐의 눈요기로 여길 뿐이다. 그의 마술을 마법처럼 받아들이는 앨리스만이 순수하게 그의 예술에 감응한다.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타티셰프의 마술은 자크 타티가 지향해온 그의 예술관이기도 하다. 그만의 독자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그의 영화는 예술 영화로 받아들여지지만, 결코 사람들의 일상에서 유리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문학적 인용이 있지 않고, 일상의 관찰로 얻은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채워져 있다. 그의 대표작 <윌로씨의 휴가>는 여름에 보내는 '바캉스'라는 프랑스인의 일상 안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리며, 그 안에 자신의 인장과 비판적 사유를 새겨 넣었다. 그는 평생 고급 예술의 향유자와 대중 예술의 소비자 모두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법사는 없어”


<일루셔니스트>는 자크 타티의 영화 중 <나의 아저씨>(1958)와 가장 닮아 있다. 타티의 영화들이 제작된 1950-60년대 프랑스는 미국 문화의 수입으로 인해 현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소비주의가 팽배해졌다. 그로 인해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형성하는 전통적 공간은 사라져 가고,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공간은 점차 늘어갔다. 영화 <나의 아저씨>는 전 세계의 문화적 획일화를 이루는 현대화와 기계화를 줄곧 비판해 온 타티의 사상이 가장 직접적이고 급진적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나의 아저씨>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공간과 모든 것이 획일화되고 자동화된 현대화된 공간이 대조를 이룬다. <일루셔니스트>에서도 전통적인 시골 마을과 화려한 도시 에든버러는 대조적인 공간으로 등장한다. 앨리스는 에든버러의 거리를 누비며 수많은 상가에 진열된 온갖 상품에 현혹된다. 그녀는 점점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옷차림을 비교하고, 자신을 빛나게 해줄 거라 믿는 상품들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실뱅 쇼메 감독은 영화의 후반부에 <나의 아저씨>의 실사 장면을 담아 존경의 마음과 함께 영화의 주제를 녹여낸다. 결코 자본주의에 결탁하지 않는 타티셰프는 극장의 스크린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교란자 윌로 씨를 바라본다.

하지만 끝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욕망 속에서 대두된 소비주의는 환영의 예술을 밀어냈다.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광고로 소비주의를 더욱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화려한 상품들을 과시하듯 비추는 쇼윈도도 마찬가지다. 그 틈에서 타티셰프의 마법은 사람들에게서 잊힌다. 타티셰프의 호텔에 사는 그의 이웃인 복화술사와 삐에로 또한 그와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타티셰프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된 앨리스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그는 그녀에게 “마법사는 없어”라는 말을 적어 둔 편지를 남기고 떠난다. 아무도 남지 않은 빈방의 불이 꺼지고, 에든버러의 화려한 불빛들도 꺼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에든버러의 전경을 비추던 카메라는 텔레비전 가게에 이어서 화려한 옷과 구두가 진열된 가게를 비춘다. 바로 뒤이어 할인된 가격표가 덕지덕지 붙은 물건들이 어지럽게 모여 있는 골동품 매장을 보여준다. 그 속에는 일루셔니스트의 마술 모자와 그의 우산(캐릭터 윌로 씨를 상징하기도 하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또 그 옆에는 복화술사의 분신과도 같은 인형이 'Free'로 붙여진 가격표와 함께 놓여 있다. 환영의 예술은 낮은 가치를 지닌 저렴한 상품으로 전락하고, 그들은 어두운 자신만의 길을 떠나거나 거리의 부랑자로 나앉는다. 자크 타티는 마법과도 같은 진정한 예술이 점점 사라지는 지금의 시대를 앞서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