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영화를 보며 눈물 흘린 게 대체 얼마 만인가. <객도추한>(1990)과 <여인사십>(1995), 그리고 <천수위의 낮과 밤>(2008)에 이르기까지 홍콩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담담하고 사려 깊은 시선을 보여준 허안화 감독의 <심플 라이프>(2011)는 매 장면 울컥하게 만든다. 홍콩의 유명 영화제작자 로저 리와 그를 평생 아들처럼 돌본 한 가정부의 실제 이야기를 그렸다. 오래전 허안화의 영화를 통해 배우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유덕화는 톱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고, 홍콩영화계에서 오래도록 멋진 연기를 보여준 엽덕한은 60년 동안 가정부로 살아온 여자를 연기하며 2011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시리즈온 서비스 종료와 더불어 무조건 봐야 할 단 한 편의 영화를 고르라면, 단연 허안화의 <심플 라이프>다. 이 계절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심플 라이프>의 한자 제목 타오제(桃姐)는 우리 말로 ‘타오 누나’ 혹은 ‘타오 언니’쯤 된다. 그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홍콩에서 4대에 걸쳐 로저(유덕화) 가족의 집안일을 하며 살아온 아타오(엽덕한)가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진다. 가족들은 이미 해외로 이민을 갔고, 로저 역시 수시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홍콩에는 아타오만이 남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타오는 자기 몸조차 추스르기 힘들어지자 로저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요양병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적응하려 하고, 오래도록 그를 ‘타오 누나’라고 부르며 의지하고 살아왔을 로저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다해 병원을 찾아 말벗이 된다. 로저의 어머니 역시 병원을 찾아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런 가운데 영화는 더없이 쓸쓸하다. 모두가 즐기는 연말연시를 병원에서 홀로 보내며 무심히 TV로 불꽃놀이를 보는 아타오와 담당 의사(진해로)의 건조한 모습이 그러하다. 그렇게 아타오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기 시작한다.

<심플 라이프>의 첫 장면은 유덕화가 홍콩영화계 동료들이자 우정 출연한 서극 감독, 홍금보와 함께 한 중국 본토의 젊은 투자자 앞에서 가짜로 다툼을 벌여 제작비를 추가로 타내는 장면이다. 누가 봐도 그 투자자는 돈은 많되 업계 사정은 통 모르는 사업가다. 허안화와 달리 현재 본토에서 활발한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 서극, 홍금보의 실제 모습과 겹쳐지며 그 장면이 가져다주는 여운은 묘하다. 과거 홍콩의 도심 곳곳을 누비며 영화를 찍고 촬영이 끝나면 누들이나 덮밥, 딤섬, 혹은 에그 타르트로 배를 채우던 그들이 이제는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양꼬치를 먹고 있다. 참고로 영화 속 로저는 양꼬치를 입에도 대지 못한다. 그렇게 홍콩에서 영화 찍던 친구들은 이제 하나둘 홍콩을 떠나 베이징 지사, 상하이 지사를 차리며 대륙으로 떠났다. 그건 홍콩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아타오가 머무르는 요양병원은 홍콩 사람, 대륙 사람, 외국인으로 나눠 진료 동반비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병원의 운영자로 우연히 해후하게 된 로저의 옛 친구(황추생)는, 1997년 홍콩반환이 지난 지가 언젠데 지금도 ‘외국인 뒤에만 줄 서면 만사형통’이라는 현실을 들려준다.

허안화 감독의 이전작 <천수위의 낮과 밤>에 이은 속편격인 <밤과 안개>(2009)에서 홍콩의 재개발 지역인 천수위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는 부부의 모습에도 홍콩의 현실이 담겼다. 홍콩에 정착하고자 했던 한 대륙 여인(장정초)은 의처증이 심한 남편(임달화)으로부터 늘 폭력에 시달려 결국 두 딸과 함께 여성 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했다. 그렇게 허안화는 늘 엄정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심플 라이프>에서는 유덕화라는 대스타의 아우라를 지워버리면서 그런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오랫동안 홍콩에서 영화를 찍었건만 정작 홍콩 사람들은 수수하게 가벼운 점퍼를 입고 다니는 (유덕화가 아닌) 로저를 에어컨 수리기사나 택시 기사로 착각한다. 이 장면의 느낌이 묘하다. <심플 라이프>에서 톱스타 유덕화의 이미지를 지우는 몇 안 되는 유머 에피소드이긴 한데, 그는 지금도 여전히 홍콩과 대만과 중국 본토를 아울러 가장 추앙받는 영화인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현실은 아니고 영화제작자라는 설정 때문이어서 그렇긴 하지만, 홍콩 사람들이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그저 홍콩 삼수이포의 평범한 서민 아파트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이 묘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심플 라이프’다.

<심플 라이프>의 유덕화에게서 느끼게 되는 사람 냄새 가득한 정서는, 아마도 그의 데뷔작을 함께 한 허안화의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컷 중 하나는 바로 중국 본토의 한 을씨년스러운 기차역에서 수트케이스 하나를 끌고 무심히 앉아있는 유덕화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한때 아시아 전역을 호령한 대스타의 얼굴을 그렇게 ‘심플’한 점퍼 하나로, 장르성을 지워낸 ‘생얼’로 담담하게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무려 30여년 전 그의 시작을 함께 하고 오래도록 지켜본 허안화여서 가능한 것 아닐까. 그 데뷔작 <투분노해>(국내 개봉명 <망향>, 1982)에서 어린 남동생과 함께 베트남을 탈출하려던 청년이 어느덧 나이 든 가정부를 보살피는 온화한 중년이 됐다. 허안화의 숨겨진 누아르 걸작 <화룡만가>(원제: 극도추종, 1991)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야쿠자 조직의 여인 란(종초홍)과 사랑에 빠졌던 화(유덕화)도 유덕화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다. 허안화는 홍콩을 대표하는 수많은 주연급 배우들과 3번 이상 함께 작업한 경우가 드물기에 특정 배우를 ‘페르소나’라고 지칭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심플 라이프>를 통해 유덕화가 그에 가장 가까운 배우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역시 허안화의 <호월적고사>(1981), <경성지연>(1984),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2006)에 출연한 주윤발과 비교해도 유덕화의 여러 시기를 대표하는 주요작들이 모두 허안화로부터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허안화의 <천언만어>(1998)에서 독실한 신부로 나와 홍콩의 대표적 ‘삼급전영’(미성년관람불가 성인영화) 배우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었던 황추생이, 마치 그 삼급전영 시절의 느낌으로 유덕화와 마주하는 모습은 무척 훈훈하다. 하지만 최고의 캐스팅은 역시 홍콩의 대표적인 노장 배우이자 과거 홍콩 누아르 영화의 단골 악역 배우였던 진패가 요양병원의 바람둥이 할아버지로 나온 것이다. 임영동의 <도망자>(1995)에서는 유덕화를 괴롭히는 보스 역할이었고(뭐 이 작품 하나뿐이랴), 이동승의 <전노정전>(1986)에서는 정신병원에 취재를 나온 기자이자 젊은 날의 엽덕한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그랬던 그가 요양병원 동료인 그녀에게 허구한 날 찾아와 3백 달러만 꿔 달라고 귀찮게 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의 정서적 울림 혹은 향수의 환기는 너무나 직접적으로 ‘울컥’하게 만든다.

결국 허안화 영화의 핵심은 <호월적고사>나 <투분노해>에서 일찌감치 시작했듯 난민의 정서다. 거기서 주윤발과 유덕화는 고향 잃은 베트남 청년들이었다. 두 번이나 영화로 옮겼던 장애령 원작의 영화 <경성지연>과 <반생연>에서 각각 드러나는 1930년대 홍콩과 상하이의 모습도 그러하다. 아마도 실제로 일본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허안화의 삶의 궤적이 그들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자전적 영화 <장만옥의 객도추한>(1990)에서 효은(장만옥)은 일본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실제 허안화처럼 유학을 다녀와 방송국에서 일한다. 중국 해방과 더불어 중국 대륙을 탈출하던 어머니가 우연히 알게 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것. 하지만 시부모 눈에 침략자 일본의 며느리가 예뻐 보일 리 없다. 어린 효은은 시부모 손에서만 길러졌고 중국어를 못했던 엄마는 늘 가족에서 소외됐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일본에도 찾아가지만 심지어 오빠는 어떻게 천황의 시민이 중국인과 결혼할 수 있느냐며 ‘그럴 바엔 차라리 자살을 했어야 한다’며 다그친다. 이제 다 늙은 여동생이자 한 장성한 딸의 어머니에게 말이다. 중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엄마에게 고향은 오직 죽은 남편이 있는 홍콩이다.

그런 여인의 모습을 이후 <여인사십>에서는 소방방, <이모의 포스터모던 라이프>에서 사금고왜, <천수위의 낮과 밤>에서는 포기정, <심플 라이프>에서는 엽덕한이 연기했다. <심플 라이프>의 로저는 <객도추한>의 효은의 남자 버전이자 역시 허안화 감독의 또 다른 분신일 것이다. 로저 역시 유학을 다녀오며 오랫동안 아타오와 떨어져 있었고 역시 영화나 방송 계통에서 일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유덕화의 조카가 한국여자와 결혼해 한국어 대사가 나오는 돌잔치 장면이 그런 이전 영화에서 느꼈던 생경한 이국적 설정일 것이다. <심플 라이프>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입양된 아타오. 양부는 일제 침략기 때 살해됐고, 능력 없는 양모는 그녀를 양씨 가문으로 보냈다. 아타오는 그곳에서 60년간 식모로 살았다”. 그 담담한 시작은 영화 내내 유지되며 심금을 울린다. <심플 라이프>의 마지막 장면 역시 60년간 친가족처럼 여기며 살아온 그 가족을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아타오를 보여준다. 그렇게 그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과, 언제나 그대로인 홍콩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