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사 카테고리

Movie & Entertainment Magazine from KOREA
>인터뷰

[인터뷰] “아이돌의 처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치사하더라”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감독

씨네플레이
남궁선 감독 (사진제공=엣나인피름)
남궁선 감독 (사진제공=엣나인피름)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감독은 손에 꼽힌다. 감독의 스타일이 확실하고, 공감을 일으킬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 스타성을 확보한 감독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단편 <세상의 끝>(2007) <남자들>(2012) <여담들>(2020)에 이어 첫 장편 <십개월의 미래>(2021)를 내놓으며 독립영화계에 새로운 바이브를 전달하는 뉴커머로 부지런히 인지도를 쌓아 왔었다.
 

그 흐름을 끊지 않고 남궁선 감독은 지금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중이다. 그 사이 단편 <얼굴 보니 좋네>(2022)를 선보였고, 지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고백의 역사>를 촬영하느라 바쁘다. 그 사이 두 번째 장편이 개봉한다. <힘을 낼 시간>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장편 프로젝트로 제안을 받고 만든 작품이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미래’를 저당 잡힌 여성 ‘미래’의 현실을 코믹 드라마 장르로 풀어 낸 전작 <십개월의 미래>에 이어 이번엔 스물여섯 살, 은퇴한 아이돌 수민(최성은), 태희(현우석), 사랑(하서윤)이 급조해 떠난 그들끼리의 ‘수학여행’에 담긴 아이돌의 처우와 현실, 그리고 청년세대에게 주는 위로와 용기다.
 

반갑게도 단편부터 남궁선 감독의 팬이라면 기다려 왔을 특유의 스타일과 에너지는 이번 작품에도 예외 없다. 특히 전작에서 주제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특유의 스타일을 고수한 신인감독의 배포를 이번 작품에선 한층 더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다. 특히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단출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던 감독의 연출적 고민도 이 영화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로드무비라는 장르적 특징을 합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최소의 촬영 인원과 자유로운 촬영이 연출 방법론 뿐 아니라, 영화의 흐름과 스타일, 캐릭터의 움직임에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갇혀 있던 청춘들에게 자유로운 사고, 생각할 시간을 주는 간직할 만한 청춘 로드무비의 출현이다. 막 작품을 공개한 남궁선 감독을 만나 영화의 뒷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힘을 낼 시간〉
〈힘을 낼 시간〉


영화의 출발은 국가인권위원회 제작 작품으로 제안을 받으면서 시작됐는데요.

​<십개월의 미래>를 하고 나서는 상업영화 제안이 오던 차였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그 즈음 독립영화를 해보고 싶다 생각도 컸어요. <십개월의 미래>는 학교 졸업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제약이 많은 작품이라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머리 짜내서 막 한번 ‘독립영화’를 해보자, 그래서 올해 그걸 한번 찍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연락을 받고서는, 옳거니 이 영화를 이 방식으로 찍어보자 싶은 마음이 컸죠. 물론 예산과 시기를 따져보니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가능할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스태프들이 영상도 찍고 편집도 하고 색보정도 하고 다 하잖아요. 모두가 연출자예요. 제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의 시네키드라고 할까요. 그런 친구들이 적은 인원이지만 같이 모여서 각자의 역할이 확실히 분업화된 방식이 아니라, 필요할 땐 다 같이 조명팀이 됐다가 필요할 땐 다시 미술팀이 됐다가 한 거죠. ‘다 할 수 있어!’ ‘이 정도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이런 마인드랄까요. 약간 이런 느낌으로요. 그렇게 같이 뜻을 모아서 어느 때보다도 작업 방식에 있어서는 즐거운 현장이었어요.

 

K팝 산업의 뒤에 존재하는 현실, 아이돌 산업의 뒤편이 조명되는데요. 평소 관심사나 개발하던 프로젝트에서 확장한 소재인가요.

​제 관심사인 한국 사회의 성장기를 보내는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주제로 삼고 싶어서 또래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많이 들어 봤어요. 만나서 보니 다들 아이돌 연습생처럼 살고 있는 거예요. 다들 너무 지쳐 있고 너무 열심히 뭘 하고 있는데 미래는 불안하고, 어떤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얘네들 되게 진짜 열심히 사네, 꼭 아이돌 연습생처럼 사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서 보니까 아이돌 연습생도 진짜 많은 거예요. 저들의 이야기를 알아보면 거기에 젊은이들이 느끼고 있을 인권 문제들이 많이 들어 있을 것 같았어요. 영화를 만들다 보면 실제 아이돌 아이돌 출신 배우들을 많이 보거든요. 지금은 배우를 노래를 하고 싶던, 춤을 추고 싶던, 가수를 하고 싶던, 연기를 하고 싶던 어쨌든 아이돌을 통과해야 할 수 있는 구조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잘 안된 아이돌 출신 배우도 있고, 연습생 출신도 꽤 되죠.

 

〈힘을 낼 시간〉의 수민(최성은)
〈힘을 낼 시간〉의 수민(최성은)


그 과정에서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서 교육 문제라는 건 사실 거의 아동 학대와 연관돼 있는 문제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한국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입시를 위해서 어떤 마땅히 성장기에 배워야 할 것들이 아닌 대학교 들어가는 방법, 대학교 들어와서도 취직하는 방법 이런 거를 가르치는 시스템이잖아요. 그것과 굉장히 비슷한 문제들이 있는 곳이어서 저는 그게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아이돌들이 키워지는 과정이 그 모든 가치관의 집약체처럼 느껴졌어요.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완전하고 강하고 잘해야 되는 거죠. 여기서 제일 잘해야 되고, 제일 잘하는 애들 중에서 제일 잘해서 어떤 오점도 없어야지만 데뷔를 시켜주는 이런 개념들이 한국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랑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면 ‘다이어트’나 ‘노출’로 고통받는 여자 아이돌들의 상황이나, 돈 많은 여성의 하룻밤 상대가 되어 줘야 하는 남자 아이돌의 상황, 소속사가 가하는 착취형 수익구조와 불공정한 계약으로 인한 3천만 원의 빚 같은, 아이돌들이 겪는 현실이 구체적 장면과 대사로 표현되는데요. 그만큼 사전 조사와 인터뷰의 노력이 느껴지는 지점이었어요.

최대한 열심히 찾아서 만나보려 노력했어요. 완전히 외부에서 인터뷰 요청을 했으면 아무래도 성사되기 어려웠을 텐데, 지인을 통해서 만나니 거리감이 좁혀진 측면이 있죠. 사실 이 인터뷰가 취재나 조사를 위한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기 위한 취재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좀 편하게 얘기를 해준 부분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도 외부에서 대략 어떨 것이다라는 생각은 있었죠. 그들이 힘들어도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산업 안에서의 괴로움일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연습생 시절, 데뷔조 시절, 데뷔하고 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노동 환경, 계약과 관련된 문제들이 상당히 치사하게, 그들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더라고요. 진짜 이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미래를 담보 잡고 있는 불공정한 계약에서 많이 발생한 것 같더라고요. 이게 근로 계약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만큼의 수익을 내어주지 않으면 보상을 받지도 못하죠. 그 상황에서 그만둘 수도 없고, 그만두고 싶으면 위약금을 내야 되는 계약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까 하나의 인격으로서 자신이 존중되지 못한다라는 순간들을 다들 한 번씩 느꼈던 것 같더라고요. 성인들이 그들을 소유물로 보는구나. 그 소유물의 역할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은 그때부터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 상황들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생각보다 이들에게 굉장한 트라우마였어요. 그들을 만나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힘을 낼 시간〉의 사랑(하서윤)
〈힘을 낼 시간〉의 사랑(하서윤)


영화 속 아이돌들의 대표곡이 진짜 있는 곡 같던데요. 노래 역시 리얼리티를 배가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였어요.

중독성 있죠? (웃음) 실제 아이돌 그룹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필요한 요소였고, ‘모임 별’이 참여해 만든 곡들입니다.

 

그래서 영화 속 실패한 아이돌들에게 연습생 시절부터 허락되지 않은, 수민의 표현대로라면 “남들이 하는 그런” 평범한 여행을 이 영화가 선물하고 있구나 싶었는데요. 26살의 수학여행이라는 설정과 제주라는 공간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제주도에서 독립영화를 찍는다’는 아까 우리끼리 만드는 영화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거기까지는 좋아, 그럼 제주도에서 무슨 영화를 찍지?로 발전하게 된 거죠.

 

그룹 ‘러브 앤 리즈’의 멤버 수민과 사랑, ‘파이브 갓 차일드’의 태희 이렇게 세 인물이 여행을 떠나는데요. 남돌, 여돌이라는 속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격도 마치 그룹에서 각 역할을 담당했던 것처럼 각각 달라요. 먼저 리더인 수민이 같은 경우 제주에서 겪는 돌발 상황에서도 리더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인데요.

이 세 인물은 제가 취재하면서 만났던 어떤 인물군들의 특성이 모여 있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리더 스타일인 수민이 같은 경우, 보통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가진 면모랑 거의 비슷해요. 정말 약점은 하나도 드러내지 않고, 강하게 더 강하게 강하게 책임을 다하고 더 잘해서 어떻게든 해결한다. 내가 무너지면 남들도 다 무너지니까 나는 절대 무너지면 안 된다 이런 마인드가 강한 친구죠. 리더 출신들이 많이 부과받는 책임인 것 같아요. 대개 자기의 책임이 아닌 것까지도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딜레마가 있는 포지션이었어요.

 

〈힘을 낼 시간〉의 태희(현우석)
〈힘을 낼 시간〉의 태희(현우석)


태희는 겉으로는 항상 웃고 있어서, 속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계약에 묶여 있는 갑갑한 속내를 앓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항상 해맑게 웃고 있죠. 근데 그게 사실 아이돌의 직업이거든요. 다른 사람들 기분 편하게 해주고 다른 사람들 즐겁게 하는 게 우선이죠. 그래서 당연히 자기 힘든 얘기는 하지 않을 거예요. 영화에서도 태희는 힘든 상황이 있는데도 그걸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기 싫어서 일이 커졌다 이렇게 된 설정이었거든요. 남한테 불편한 걸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죠. 생각보다 꽤 이런 유형이 많았어요.

 

사랑이는 태희와 정반대로, 문제들을 안으로 쌓아서 외부와 담을 쌓는 인물인데요. 실제로 고통으로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먹고 있기도 하고요.

​사랑이처럼 진짜 무대 좋아하는 친구도 많아요. 그냥 무대에 있는 것만 너무 좋아요. 그런데 그 무대를 빼앗겼을 때 너무 공허한 거예요. 그래서 뭐 어쩔 수 없이 생긴 문제들을 끌어안고 갈 곳이 없는 채로 그냥 자기한테 하나 즐거운 그 즐거움을 못 누리고 있는 상태라고 해야 될까요? 굉장히 보편적인 인물 셋으로 저는 이곳에서 가지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힘을 낼 시간〉
〈힘을 낼 시간〉


‘아티스트’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은 그 미명 하에 착취를 할 수 있는 구조가 분명 존재하고 있는 건데요. 그래서 이들이 그들의 환경을 벗어난 제주 귤밭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대로 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요.

그렇죠. 이게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될 기본적인 믿음이죠. 일한 만큼의 돈을 받고, 그리고 자신을 갉아먹을 만큼, 그렇게까지는 잘하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만큼만 일하면 된다. 그런데 이들한테는 이 조건이 어색하기 때문에 고용주가 돈을 주니, ‘이거 무슨 함정 아니냐’는 생각을 해요. 세상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처음 이 여행을 구상하면서 이들에게 조금 더 드라마틱한 어떤 경험들을 만들어 줄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다 필요 없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믿음 안에서 싸우고 실수도 하고, 화해하면서 그 경험을 통해서 벽을 내려놓고 조금 더 서로를 알아가야지,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무너지잖아요. 그렇게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주면서 생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들의 여행이 그 경험이 됐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말씀대로 제주에서 수민, 태희, 사랑 세 명의 캐릭터가 아이돌 산업에서 그들이 겪은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어른을 만난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귤밭 관리인은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된 후, 열심히 귤을 딴 이들에게 “돈 줄게, 내일부터 놀아” 하고 진짜 휴가를 주는데요.

어른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사실 저는 그냥 이들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만들었긴 해요. 영화에서는 편집이 됐지만 귤밭 사장인 상표(홍상표)의 캐릭터 설정이 학교 다닐 때는 대학까지만 가자, 대학 가서는 로스쿨만 가자, 로스쿨에서는 변호사 시험만 붙자 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았는데 변호사 시험이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여섯 번 떨어져서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 귤밭으로 돌아왔다는 설정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 과정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세 사람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굳이 어른이냐 아니냐로 나누기보다는 그냥 마땅히 사람이 가져야 할 인간성이 있는 거잖아요. 고용주여도 이들이 보여주는 과도한 노동을 편하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힘을 낼 시간〉
〈힘을 낼 시간〉


상식적인 어른과의 만남과 더불어, 자칫 위태로울 수 있는 여정 중에도 그들이 더 이상의 ‘극악한’ 상황을 겪지 않는다는 설정이 이들의 과거를 위로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한 감독님의 의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거기서 이들이 나쁜 일을 또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결론도 그런 방식으로 가고 싶지 않았고요. 어떤 현실 고발성 영화들이 굉장히 무기력한 상태의 임무를 놓고 끝내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만큼은 전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이렇게 끔찍한 일을 겪어서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영화가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서로가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라는 걸 하고 싶었어요.

영화에 자주 눈에 띄는 요소들이 있는데요. 숙소 근처의 학교 운동장의 트랙과 서울에서부터 끌고 온 트렁크에요. 경쟁과 순위가 매겨지는 트랙은, 제주에서는 이제 이들이 춤과 노래를 부르며 노는 공간으로, 잃어버린 트렁크로 얻게 된 또 다른 트렁크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비치는데요.

트랙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그 지역에 있는 운동장인데 워낙 예쁘더라고요. 그리고 일단 거기에 서면 1, 2, 3위 이렇게 적혀 있거든요. 보컬 트레이닝 할 때 워낙 힘들게 춤추면서 노래 부르니까 그냥 운동장 뛰면서 노래 연습했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트랙만 보면 뛴다 약간 그런 의미로서 시작을 했다가, 나중에는 그 트랙이 주요한 감정 변화들이 일어나는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트렁크는 정체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랑이가 캐리어를 잃어버렸는데, 저희가 의상과 미술 회의를 하면서 사랑이는 자기 취향이 별로 없는, 아직 자기 취향이 뭔지 모르는 나이라고 설정했어요. 아이돌들은 꾸며주고 해주는 의상을 입고 다니다 보니 평소에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다니거든요. 그 사랑이는 딱 그 트레이닝복 취향을 가지고 있는 무취향의 아이다라는 설정을 했었는데 우연히 남의 트렁크를 받았는데 그 사람의 성격이든 직업이든 취향이든 묻어 있는 캐리어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남의 옷을 입어보다 보니까 뭔가 거기서 자기의 스타일도 찾고 그게 계기가 돼서 자기의 어떤 취향을 찾아가는 그런 과정에 포문으로 좀 잡아주고 싶었어요.

 

〈힘을 낼 시간〉
〈힘을 낼 시간〉


로드무비라는 형식이 주는, 짜여지지 않은 상황 안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 준 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이는데요. 먼저 최성은 배우는 전작 <십개월의 미래> 이후 두 번째 감독님과 협업이기도 한데요.

​워낙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서 이 영화에 관심이 있을까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작품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하더라고요. 며칠 뒤 전화가 와서, “감독님 제가 수민이 역할을 하고 싶은데 고려를 좀 해주세요” 하더라고요. 독립영화 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십개월의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제가 만들어 줘야 하는데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제 고민이 컸죠. 너무 잘하더라고요. 쓸데없는 고민을 한 거였어요. (웃음)

 

최근 독립영화계에서 지분을 확장 중인 현우석 배우, 그리고 신예 하서윤 배우가 태희와 사랑 역인데요. 신선한 등장에, 마치 진짜 아이돌 출신같은 연기를 선보이는데요.

캐스팅을 하면서 한 가지 원칙은, 진짜 아이돌 출신 배우를 캐스팅하지는 않겠다였어요. 그들이 겪었을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질적으로 그걸 하겠다는 배우가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태희의 경우는 캐릭터가 명확했어요. 해맑게 웃는 아이, 모든 것을 그 웃음으로 넘어가려는 아이였어요. 그런 해맑은 웃음을 가진 배우가 막상 너무 없더라고요. 그런데 현우석 배우의 사진을 하나 봤는데, 딱 그렇게 웃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배우에게 연락해봐야겠다 하면서 캐스팅을 했어요. 하서윤 배우는 오디션을 보고 찾은 신인인데, 똑같은 리딩을 해도 몰입력이 엄청 높더라고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 친구는 이 영화에 들어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힘을 낼 시간〉
〈힘을 낼 시간〉


로드무비라는 장르적 속성 안에서 오픈된 공간의 촬영은 중요한 요소인데요. 아이돌의 공간이었던 도심의 무대를 떠나, 트렁크를 끌고 가는 세 캐릭터의 뒷모습과 제주의 공간을 연결하는 짜여지지 않은 촬영이 이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는데요. 강렬함보다는 정서로 다가오는 장면의 톤은 어떻게 잡아나갔나요.

촬영의 구현은 저희가 계속 작당모의를 하던, 독립영화다운 독립영화를 하자했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장비도 최소화, 사람도 최소화하자. 카메라와 배우가 주고받을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있게 하려면 장비가 너무 많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동성에 중심을 두고 좋은 카메라, 큰 카메라 쓰지 않고 조작이 빠른 카메라로 세팅을 했어요. 콘티에 맞춰 끊어서 하지 않고 마치 그런 환경에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대본이나 콘티가 없는 구간이 꽤 많았거든요. 가령 대본에 ‘여기서 동네 구경을 한다’ 만 있으면 배우들이 정말 동네 구경을 하고 그걸 담는다던가, 운동장 밤 씬 같은 경우도 ‘배우 마음대로, 카메라 마음대로’ 하는 구간들이 꽤 있어요. 그런 자유로움이 주는 톤이 완성된 작품에 드러난 것 같아요. 결국 이 영화의 스타일이 된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오는 연기의 질감은 완전 다를 거예요. 배우가 뭔가를 상상해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서 느낀 걸 표현하는 거죠. 접근 방식이 다른 촬영이라고 생각을 해요.

 

현우석 배우, 남궁선 감독, 최성은, 하서윤 배우 (왼쪽부터, 사진제공=엣나인필름)
현우석 배우, 남궁선 감독, 최성은, 하서윤 배우 (왼쪽부터, 사진제공=엣나인필름)


영화를 보면 드러나는 스포일러가 되는 부분까지 종합해 볼 때, 결국 이 영화의 자유로운 형식 안에 지금 아이돌들의 현실과 아픔이 여실히 반영되는데요. 영화의 핵심적인 대사인 ‘내가 여기에 있다. 나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가 큰 울림을 줍니다. 감독님이 이 작품을 통해서, 인권이라는 제시어 안에서 보여주고자 한 해법, ‘힘을 낼 시간’에 필요한 사람 사이의 온기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이 여행이 애도라는 생각을 좀 했어요. 이 영화의 주제가 애도일 수도 있겠다. 저희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어떤 거 참고하면 될까요?하고 물었을 때, ‘글쎄’ 이러다가 찾은 게 전쟁영화였거든요. 전쟁에 참전하고 온 베테랑들이 나오는 영화들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뭔가 어려움을 겪었고 잃은 게 있잖아요. 근데 그게 없었던 일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보기 싫어서 혹은 불편해서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면 그 경험들 하나하나가 인정받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저희가 돌아볼 것은 돌아보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더 나눌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힘은 결국 우리 동료가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때 그때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은 너무나 많은 불신을 어린 나이에 겪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생각하면서, 믿을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그 믿음을 강화하는 그런 해법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는 것 자체가 어떤 힘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했습니다. 그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