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안방을 향해 소독 스프레이를 뿌리는 나를 향해 ‘너무하다’는 표정을 짓는 남편. 마스크를 썼음에도 그의 우울한 표정이 실로 느껴진다. 이불과 베개를 챙겨 나오는 나를 보고는 고개까지 내젓는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옮는 병 아니라니까!
남편은 2주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설 연휴부터 알 수 없는 눈 통증과 두통, 오한이 시작됐다. 처음엔 안구 질환이겠거니, 그다음엔 감기가 왔으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내과를 가도 낫지 않고 안과를 가도 낫지 않았다. 병세의 호전이 없자 내과에서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뢰서를 써줬다. 바이러스 감염일 것 같다는 추측과 함께. 결국 남편은 큰 병원에서 몇몇 검사를 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또 며칠이 걸린단다.
병명을 모르니 괜한 무서움만 증폭됐다. 온갖 병이란 병은 다 찾아본 것 같다. 증상과 대입하다 보니 불치병 가능성이 있다는 글까지 접하게 됐다. 정보의 범람 속 우리 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아니 검사 결과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초조한 마음이 커져가던 와중, 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큰 병이면, 어떡할 거야?

영화 <달링>의 여주인공 다이애나는 이 질문에 호쾌히 대답했으리. “죽을 병이라도 당신이랑 함께해야지”.
영화 <달링>의 시작은 꽤나 참담하다. 다이애나의 남편 로빈이 28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소아마비 병원체인 polio 바이러스에 감염돼 전신마비가 된 것. 숨조차 스스로 쉴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된 로빈. 병원에서는 한 달 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병원 밖을 나가면 그마저도 2주로 줄어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빈은 죽더라도 나가서 죽고 싶다며 병원을 나가고자 한다.
아픈 남편도 힘든데, 아픈 남편의 고집은 더 힘이 든다. 심지어 다이애나는 임신까지 한 상태. 충격이 컸지만 남편 앞에서는 밝은 모습만 보인다. 그리고 남편을 데리고 병원 밖으로 나가겠다 다짐한다. 나를 죽게 놔두라며 자신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계속해서 용기를 준다.
이후 다이애나는 출산을 한다. 하지만 로빈의 마음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아들이 병든 자신을 사랑해줄지에 대한 불안한 마음에 아기와 만나길 거부한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로빈은 신체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얼굴에 아기를 갖다 댄다. 아들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얼굴을 통해 로빈은 아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세 가족은 병마에 맞서는 동지가 된다.
나도 당연히 자기와 함께지
영화 <달링>의 여파는 아니다. 나도 실로 남편과 함께하려는 마음이다. 하지만 <달링>을 보고 나니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걱정도 앞선다. 그만큼 다이애나는 대단, 아니 경이롭다.
다이애나는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남편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로 묘사됐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속담은 다이애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런 다이애나의 일관된 모습에 오르락내리락 극적 전개를 원하는 관객들은 ‘조금 지루했다’ 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다이애나만큼은 못할지언정, 나도 유명한(?) 남편 바보다. 그 어떤 바이러스면 어떤가.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사랑하는 남편이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대로 사랑해주고 싶은 것이 마음이다. 그러나 다이애나만큼 일관된 모습이지는 못할 것 같다.
남편이 아프자 육아는 모두 내 몫이 됐었다. 그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아픈 남편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아기를 혼자 돌봐야 하는 내가 안쓰럽기도 했다. ‘도대체 언제 낫는 거야’. 아픈 남편에게 아기를 보라며 냅다 안기기도 했다. ‘몸이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아프려면 내가 아파야 정상이지’, 모진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픈 사람을 위한 사랑의 마음
남편의 병명은 ‘대상포진’이었다. 며칠간 온갖 병을 상상해온 우리 부부에게, 그래도 대상포진은 나을 수 있는 병이자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지 않은가. 병명을 알고나니 후련한 마음. 그때부터 남편을 위한 특별 케어가 시작됐다.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부터, 영양제 그리고 충분한 휴식을 위한 환경 조성까지. 건강한 생활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까지 야무지게 세워 보았다. 이 또한 다이애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말이다.

다이애나는 병원 밖으로 나온 로빈을 위해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이동식 인공호흡 장치를 개발한다. 남편이 집에서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입으로 아무것도 삼키지 못해 말도 못 했던 로빈은 스스로 음식물을 삼킬 수 있게 됐으며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다이애나 덕분에 로빈은 상태가 호전된다.
로빈 또한 위대하다. 로빈은 아들 조나단이 타고 다니는 유모차에 착안해 장애인들도 외출을 할 수 있는 휠체어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주변인들에게 부탁해 배터리를 부착해 외출 중에도 호흡기를 쓸 수 있는 휠체어를 만들게 된 것.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휠체어를 대량 생산하는 계획까지 세운다. 이를 위해 정부 담당자를 만나 예산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고 후원자를 만나 후원금도 걷는다. 과거에 자신의 슬픔만 생각하며 지냈다면 현재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는 삶을 살게 됐다.
감사 또 감사
영국 최장수 인공호흡 환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로빈이 하늘로 간 나이는 젊은 나이다. 40세. 가슴에서 출혈이 잦아지며 로빈은 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로빈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아들 조나단이 잘가라고 인사하니 로빈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다이애나는 거창한 인사말 대신 함께여서 멋진 삶이었다는 짧은 말을 남긴다. 로빈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마지막 장면을 보니 나는 한 번 더 숙연해진다. 지금이야 대상포진으로 끝났지만, 우리도 언젠가 병이 들고 아프고 또 죽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 함께여서 멋진 삶이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남편이 아프면 다이애나처럼 헌신적으로 남편을 돌볼 수 있을까. 이는 남편에게도 해당될 일이다.
영화를 보고 새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다. 하지만 또 불쑥 생겨나는 나쁜 마음.
대상포진 언제 낫는 거야,
애기 혼자 보기 힘들다고!”
나는 역시.. 다이애나가 되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