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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 여기 있어요, 재개봉 〈어른 김장하〉 다시 보기(feat. 문형배)

주성철편집장
〈어른 김장하〉 포스터
〈어른 김장하〉 포스터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출연한 영화라고 하여 화제가 된 작품, <어른 김장하>가 넷플릭스에서 다시 TOP 10 순위에 올랐다. 2023년 극장에서 개봉하고 OTT로 넘어간 뒤, 많은 이들의 추천 속에 수시로 언론에 오르내린 작품이다. 지난 1월에는 가수 이승환이 <어른 김장하> 시청을 권하며 “‘노인’과 ‘어른’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얕고 알량한 지식, 빈곤한 철학으로 그 긴 세월에도 통찰이나 지혜를 갖지 못하고 그저 오래만 살았다면 ‘노인’입니다. ‘어른’은 귀하고 드뭅니다. 여기, 닮고 싶은 참 어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른 김장하>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자신의 SNS에 남기는 등 지난 2년여의 시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명성을 얻은 작품이다. 배우 김남길, 조민수, 김종수, 김의성, 조한철 등도 그 칭찬 릴레이에 합류했다. 최근에는 “주문 피청구인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한다”고 탄핵 선고문을 낭독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재개봉 요청이 쇄도하여 배급사 시네마달은 ‘관객 성원 재개봉’이라는 이름으로 4월 내 재개봉할 예정을 밝혔고 CGV에서 10일부터 개봉했다.

 

〈어른 김장하〉에 출연한 문형배 헌법재판관
〈어른 김장하〉에 출연한 문형배 헌법재판관

 

<어른 김장하>는 2022년 5월, 김장하 선생이 운영해온 진주 남성당 한약방이 문을 닫을 즈음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이때 그의 나이 79세로, 19살에 받은 한약업자 자격증과 함께 한 60년의 세월이 막을 내렸다. 더불어 지난 30년간 장학사업과 문화예술지원 사업을 위해 설립하고 운영했던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고 34억 원가량의 기금을 경상국립대에 기증했다. 또한 1984년 개교한 명신고등학교 설립자로서 이를 이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김장하 선생은 차도 없이 옷 한 벌 허투루 사지 않으며 많은 이들을 도우면서도 언론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인물이다. 작품 속 남성당 한약방에는 오래전 ‘금성’ 에어컨이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에 대해 경남 MBC가 2022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고, 2023년에는 극장 개봉까지 이어졌다. 2023년 제59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작품상을 수상했는데, 지역 지상파 콘텐츠가 백상예술대상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른 김장하〉 김장하
〈어른 김장하〉 김장하

 

문형배 재판관은 작품 초반, 김장하 선생의 생일잔치 장면에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 (2019~현직), 진주 대아고등학교 15회 졸업생, 김장하 장학생(1981~1986)”이라는 자막과 함께 마이크를 잡고 등장한다. 그는 축사를 하면서 “김장하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나는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조금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중간에 울컥 눈물을 보이며 축사가 중단되는 지점도 있다. 어쩌면 이번 탄핵 선고로 인해 그처럼 크게 ‘기여’하고 ‘사회에 갚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생일잔치도 ‘절대 생일잔치할 생각하지 말아라’라는 김장하 선생의 얘기에, 진주지역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좋은 공연이 있으니 함께 갑시다’라고 몰래 속여서 데리고 간 깜짝파티였다.

 

〈어른 김장하〉 김주완 기자
〈어른 김장하〉 김주완 기자

 

김현지 감독이 연출한 <어른 김장하>의 메인 출연자이자 인터뷰어는, 2015년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인 ‘어른 채현국’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 「풍운아 채현국」을 쓴 경남도민일보 출신의 김주완 기자다. 그는 어른 채현국과 어른 김장하를 비교하며 전자는 건달 스타일, 후자는 모범생 스타일이라고 비교한다. 두 사람 모두 그의 취재욕을 불타게 했다. 공식적으로 김장하 선생은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김현지 감독과 김주완 기자는 일단 얼굴을 익히고 한약방을 무턱대고 들락날락하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했다. “돈이 많은데도 승용차를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고, 단 한 번도 어느 대중매체와도 인터뷰를 해본 적 없는 분이어서,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 취재를 시작했다”는 게 김주완 기자의 얘기다. 사실 김장하 선생은 답답하리만치 질문에 답이 없는데, 김주완 기자의 얘기를 듣고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김장하 선생과의 인터뷰가 어려운 게 뭐냐면, 답변이 결과적으로 자기 자랑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 같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남성당 한약방은 1963년 사천 용현면 신기리에서 개원했고, 1973년 진주 장대동으로 이전 개원했으며, 1977년 진주 동성동 현 위치로 이전 개원했다. ‘진료 잘 보고 약값 싼 젊은 한약사’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경남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한때 20여 명의 직원들이 일하던 때도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한 직원의 얘기에 따르면, “다른 한약방 직원들에 비해 월급이 2배나 3배까지 많았다”고 한다. 워낙 인터뷰를 하지 않는 분이다 보니, 과거 인터뷰 영상을 삽입했는데 “저는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법니다. 다른 직업으로 돈을 벌어 호화 방탕한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힘든 사람들로부터 번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사회에 환원하려고 했습니다”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1988년 진주에서 창단한 ‘극단 현장’이 부득이하게 이사를 가야 했을 때도 3천만 원을 지원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했다. 그때 그 지원이 없었다면 극단은 문을 닫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극단의 존재는 (당신은 이런 표현을 무척 싫어하시겠지만) ‘김장하 정신’과도 이어진다. <어른 김장하>에서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극단 현장의 ‘수무바다 흰고무래’ 공연을 관람하는 김장하 선생을 볼 수 있다. ‘수무바다’는 남강 백사장, ‘흰고무래’는 흰 백(白)과 고무래 정(丁)을 합친 백정을 의미하는데, 바로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이다. 감사하게도 <어른 김장하>가 아니었다면 이런 귀중하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역사를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마당극 ‘수무바다 흰고무래’
마당극 ‘수무바다 흰고무래’

 

진주 형평운동은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최초의 평등 운동으로,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심각한 사회적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었다. 1923년 4월 25일 백정 출신의 이학찬 등 진보적인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세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의미를 담아 ‘형평사’라는 단체를 세웠다. 이들의 형평운동은 큰 지지를 받으며 진주를 넘어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후 외부의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점차 쇠퇴하게 됐지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선구적인 운동이었다. ​연극의 마지막은 조선형평사 창립취지문을 인용해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라는 담대한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진주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 형평운동 기념탑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라는 형평운동의 정신은 바로 김장하 선생의 평생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어른 김장하>에는 그가 2022년 형평운동 99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이 나오는데, 형평운동기념사헙회 초대 이사장으로서 형평운동 기념탑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과거 30년 전 방송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오늘도 사실 평등한 삶을 사냐고 하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녀 차별, 지역 차별, 그리고 장애인 문제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세월이 흘러 ‘내년 100주년을 맞는 소회가 어떠냐’는 <어른 김장하> 속 김주완 기자의 질문에는 “70주년 기념식을 할 때 ‘새로운 차별을 없애자’고 추진했는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차별이 별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안타깝습니다. 100주년을 기념하면서는 새로운 차별을 없애는 방법을 공부하려고 합니다”고 답한다. 안타깝지만 지난 30년 동안 차별은 더 다양해지고 단단해졌다. 그래서 그는 더 공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공부하는 어른 김장하’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포스터
〈어른 김장하〉 포스터

 

캐도 캐도 끝이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 외에도 <어른 김장하>는 그의 또 다른 미담을 들려준다. 학교 설립과 장학사업, 그리고 문화예술 지원사업 외에도 그는 진주에 있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 피난시설에도 지원했다. 어쩌면 그에 대해 얼마간 알고 있었노라 여겼던 이들도 <어른 김장하>를 통해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금전적 지원 이상으로,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동반 자녀에게 일시적인 안식처와 회복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별도의 시설까지 지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여의 시간 동안 다문화가정의 피해 여성들이 이 시설을 찾는 일이 많았다. 지역사회에 크나큰 힘이 됐다. 하지만 시설 건립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김장하 이사장을 위해 가운데 자리를 비워뒀는데도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스스로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는다. ‘자기가 돋보이는 자리에 절대 앉지 않고 끄트머리에 앉는다’는 말은 작품 속 출연자들 모두에게서 듣게 되는 얘기다.

 

김장하 선생은 여느 ‘사람’들처럼 과거에는 꽤 혈기 왕성했었다는 얘기도 한다. 학교 설립자다 보니 교사 채용 청탁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 하지만 그는 “내 친척은 한 명도 안 쓴다. 돈을 받고는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권력에 굽히지 않는다”는 세 가지 원칙을 내세워 모든 청탁을 거부했다. 그 원칙이 깨지면 ‘옳은 교사’를 뽑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쩌다 주변인을 통해 국회의원이라는 양반으로부터 인사 청탁이 들어왔고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마자 난리가 나서 학교에 감사와 세무조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세상에는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김장하라는 사람이 있긴 있었다. “오히려 난 그게 좋아요. 감사하고 세무조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요. 제가 험한 세상 살면서 힘이 된 건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거죠”.

 

〈어른 김장하〉 김장하
〈어른 김장하〉 김장하

 

작품을 쭉 보다 보면, 김장하 선생을 추앙하지 않는 게 힘들다.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말 그대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며 살아왔다. 어떤 대가도 전혀 바라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주목받는 자리로부터 가장 멀리 서 있었다. 경남 사천 정동초등학교 동창으로서 김장하 선생의 70년 지기인 부산교육대학교 교육학과 최관경 명예교수는, 그를 두고 불교에서 얘기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報施)라는 말을 꺼낸다. ‘내가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것’으로, 김장하 선생은 그것이 태생적으로 몸에 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 차별하지 않고 한결같이 존중하는 마음, 김장하 선생이야말로 진짜 교육자”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어른 김장하〉 김주완 기자
〈어른 김장하〉 김주완 기자

 

끝으로, 인터뷰를 극도로 꺼리는 김장하 선생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의 존재를 잊고 말이 빨라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야구 얘기를 할 때다. “선생님, 은퇴하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실 거예요?”라는 질문에 “그게 제일 문제인데, 백수로 세월 보내기가 쉽지 않거든. 놀아 봐야 잘 놀 줄 아는데, 안 놀아봐서”라고 고민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야구 얘기를 꺼내자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 투수 최동원을 떠올리고야 만다. “최동원, 참말로 좋아했지. 스트라이크 던져서 맞으면 또 그 자리에 한 번 더 던지거든. 쳐 봐라 이거지. 그런 배포가 좋아!” 재능과 실력, 그리고 성실성 등 야구선수로 갖춰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최동원을 얘기하는데,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칠 테면 쳐봐’라는 ‘배포’로 맞은 데 또 던지는 ‘오기’를 얘기하는 그 모습이 정말 흥미롭고 인간적이다. ‘인간 김장하’가 맞긴 맞았다. 더불어 김장하 선생과 어울리지 않는 ‘배신’이라는 단어도 겹친다. 2011년 경남 창원을 연고지로 한 NC 다이노스가 한국프로야구 9번째 구단으로 창단하면서 “롯데를 버리고 NC로 갈아탔다”고 고백한 것. 이처럼 작품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장 환하게 웃을 때가 바로 야구 얘기를 할 때다.

 

문형배 재판관 과거 SNS
문형배 재판관 과거 SNS

 

흥미로운 건, 최근 문형배 재판관의 과거 SNS 상 발언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대부분 롯데 자이언츠 팬으로서 남긴 내용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SNS 프로필에 ‘롯데 자이언츠 우승’이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떡하니 써놓기도 했다(필자 또한 롯데 자이언츠 팬으로서 울컥해서 꺼낸 말이니 이해해 주시길).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알고 보니 이분 아주 야망이 어마어마한 분이었네’ 혹은 ‘롯데 우승 직관 VS 대통령 탄핵심판 주심되기 중에서 후자를 먼저 경험한 아저씨 실존’ 같은 화제의 댓글을 낳았다. 아무튼 문형배 재판관도 김장하 선생을 따라 응원하는 팀을 NC로 갈아탔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그런 질문을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럼, 2019년 4월 9일 있었던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문형배 후보자가 했던 말을 덧붙이며 마무리할까 한다. 당시 그는 청문회 첫인사말을 김장하 선생께 받은 장학금과 가르침으로 시작해 화제가 됐다. 김장하 선생에 대한 진심 어린 헌사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에서 일해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여 경상남도에 기증하셨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네게 주었으니 너는 이 사회의 것을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으라고 하신 그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