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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세계관의 시작점, 4K 리마스터링 재개봉한 〈그을린 사랑〉다시 보기

추아영기자
〈그을린 사랑〉재개봉 포스터
〈그을린 사랑〉재개봉 포스터

<컨택트>, <블레이드 러너 2049>, <듄> 시리즈 등 새롭고 거대한 환경에 놓인 인류의 선택을 그려내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드니 빌뇌브 표 신화적 서사는 이미 그의 영화 <그을린 사랑>에 잉태되어 있었다. <그을린 사랑>에서 한 가족의 비극적 서사는 그들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 분노와 폭력을 순환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한다. 그리고 <그을린 사랑>은 정체성 탐구라는 드니 빌뇌브 세계관에서 주로 등장하는 테마의 원형을 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잔느(멜리사 디소르미스 폴린)의 여정은 드니 빌뇌브 이후의 영화에도 변주되어서 등장한다. 드니 빌뇌브의 인물들은 자신이 인간인지 리플리컨트(복제인간)인지 고뇌하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라이언 고슬링)처럼, 메시아로서 자신에게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처럼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그을린 사랑>은 드니 빌뇌브 세계관의 시작점에 있다. 또 캐나다 출신인 그의 세계관을 퀘벡을 벗어나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6월 25일 <그을린 사랑>이 15주년을 기념해 4K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한다. 이번 리마스터링 작업에는 촬영감독인 앙드레 터핀(Andre Turpin)과 함께 드니 빌뇌브 감독이 직접 참여했다. 여전히 종교 갈등으로 인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그을린 사랑>을 다시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을린 사랑〉잔느(왼)와 시몽
〈그을린 사랑〉잔느(왼)와 시몽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죽음 이후, 쌍둥이 남매 시몽(막심 고데트)과 잔느는 공증인으로부터 두 장의 편지를 전해 받는다. 하나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에게, 또 하나는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에게 편지를 전하라는 유언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잔느는 중동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며 진실을 향한 눈먼 여정에 나선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적 변주

〈그을린 사랑〉나왈 마르완
〈그을린 사랑〉나왈 마르완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태생 퀘백 작가인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을 각색한 작품이다. 드니 빌뇌브는 원작에서 쌍둥이 남매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가족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는 여정, 가족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는 핵심 서사를 그대로 가져온다. 다만 원작에서는 무아와드 작가의 레바논 내전에 얽힌 개인적 트라우마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면, <그을린 사랑>은 영화의 공간을 구체적으로 상정하지 않음으로써 중동 내전, 나아가 종교 분쟁에 얽힌 전쟁의 상징적 공간으로 확장한다. 영화는 더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로 거듭나면서 원작과 다른 독자성을 구축했다.  

〈그을린 사랑〉니하르
〈그을린 사랑〉니하르

​<그을린 사랑>은 르포르타주 영화의 현실성과 신화적인 비극성이 교차한다. 잔느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하는 여정은 르포르타주 영화처럼 현장감 있고 생생하게 그려진다. 동시에 한 가족에게 드리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는 비극적인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상시킨다. 잔느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를 밟는 과정에서 그녀가 무슬림 난민의 아이를 낳은 사실을 알게 된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왈은 그 일로 인해 가문의 수치로 여겨지며, 갓 태어난 아이의 오른쪽 발뒤꿈치에 점 세 개만 새겨 놓은 채 고아원으로 떠나보낸다. 아이의 발뒤꿈치에 새겨진 문신은 오이디푸스의 상처 입은 발(‘오이디푸스’의 이름은 ‘부은 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과 연결된다. 라이오스 왕은 갓 태어난 오이디푸스의 발에 상처를 낸 채 목동에게 전하고 죽이라고 명한다. 태어나자마자 새겨진 그들의 표식은 비극적 진실을 안고 있으며,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보여준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피하는 과정에서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그을린 사랑>의 잔느와 시몽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게 된다. 다만 <그을린 사랑>은 종교 분쟁과 내전에 얽힌 인간의 분노와 폭력을 비극의 시작점이자 이유로 명시하며 오이디푸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한다.

 

 

※ 여기부터는 기사 본문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용서의 약속

〈그을린 사랑〉
〈그을린 사랑〉

고아원으로 보내진 나왈의 아이는 니하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니하르는 무슬림 세력이 데려가 기독교도에게 총구를 겨누는 저격수로 길러진다. 이후 적군의 공격에 당한 그는 기독교 세력에 의해 고문 기술자로 변한다.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한 나왈은 남부 지역의 감옥 크파르 리얏으로 보내진다. 이 감옥은 그녀와 같은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으로 학살과 내전의 참상이 새겨져 있다. 교도관들은 나왈이 매일 노래를 부르며 신념을 꺾지 않자 그녀에게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을 보낸다. 아부 타렉은 그녀를 되풀이해서 강간하고, 그녀는 끝내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렇게 그들의 비극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더해진다. 아부 타렉은 나왈이 떠나보낸 아들로 이 사실을 모른 채 어머니를 근친상간한 오이디푸스가 된다. 잔느와 시몽의 편지를 받아야 할 수신인은 애초부터 다른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나왈과 니하르의 비극적 서사는 되풀이되는 폭력의 상황 속에서 희미해지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 흐트러진 가족과 타인의 경계를 드러낸다. 영화는 여기서 나아가 용서와 복수의 경계마저 무너트린다. 나왈은 잔느와 시몽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그녀가 남긴 말은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 거야.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