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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영화 장인, 파블로 라라인의 인물들

씨네플레이

전기 영화 장인으로 불리는 감독, 파블로 라라인. 하지만 이 말엔 어폐가 있다. 그는 실존 인물을 다루지만, 그들의 삶을 재현하지 않는다.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전기 영화이나, 실존 인물의 삶을 순도 높게 재현하려는 일반적인 전기 영화의 태도가 그의 영화엔 없다. 오히려 그가 관심 있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기록과 기록 사이에 남겨진 공백이다. 영원한 영부인, 민중의 왕세자비, 국민 시인, 세기의 디바처럼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한 인물들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칠레 출신의 감독 파블로 라라인은 <토니 마네로>(2008)로 영화판에 이름을 알린 뒤, <노>(2012), <엘 클>(2015) 등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와 스타일을 동시에 구축해왔다.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건 존 F. 케네디의 아내이자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전기 영화, <재키>(2017)부터였다. 그는 실존 인물의 전기를 정면에서 다루면서도, 기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 풍경을 만들어내며 전기 영화의 문법을 새롭게 구성해간다. <재키>, <스펜서>, <마리아>로 이어지는 20세기 여성 3부작은 그 흐름의 정점이다. 오늘은 그의 3부작의 마지막, <마리아> 개봉을 기념하여 파블로 라라인의 얼굴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사실과 상상 사이, 기록과 허구의 경계에 선 인물들을 따라가며 감독 특유의 인물 해석 방식과 연출 의도를 짚어보자.


 

<재키> - 재클린 케네디
 

〈재키〉(2017)
〈재키〉(2017)


파블로 라라인의 첫 영어 연출작인 <재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전후를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 시점으로 그린 작품으로, 영부인이란 타이틀 아래 가려져 있던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 유년 시절이나 영부인으로 지내던 일상, 재혼과 같은 굵직한 이야기들을 모두 쳐내고 오로지 ‘암살 전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역동했던 순간만을 밀도 있게 다룬다. 라라인은 국가적 상징으로 기능해야 했던 재클린(나탈리 포트만)의 퍼포먼스를 클로즈업하는 형태로 행적을 따라간다. 재밌는 점은, 재클린의 내면에 집중하되, 그를 슬퍼하는 인물만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 묻은 옷을 입은 채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장례식을 주도하며 존 F. 케네디를 링컨과 같은 반열의 영웅으로 연출해내는 과정. 그 모든 움직임 뒤에 자리한 의도와 통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스스로를 연출하고, 남편의 유산을 스스로 구성하며, 역사적 기억을 재편하는 능동적 주체로, 실제 재클린의 대중적 이미지인 ‘희생자’, ‘슬픔의 아이콘’과는 다른 결을 띤다. 

 

〈재키〉(2017)
〈재키〉(2017)


감독 라라인은 재클린의 유명한 백악관 공개방송을 오마주하면서도, 카메라를 통해 끊임없이 관찰되고 통제되는 인물의 불안한 균형을 보여준다. 내레이션, 음악, 화면비의 영화 등을 통해 실제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접근과는 다른, 심리극에 가까운 감정선 위에 인물을 올려둔다. 영화가 시간 순으로 흐르지 않고, 인터뷰, 회상, TV방송 등 다양한 단면을 뒤섞어 비선형적으로 인물을 그려낸 이유다. 재클린에 대한 정보는 무수히 많다. 1961년부터 1963년, 영부인이던 시간은 단 3년뿐이었지만 재클린은 여전히 퍼스트레이디의 표본이자 세기의 패셔니스타로 남아있다. 그의 유년 시절부터 염문, 재혼과 이혼, 그 뒤의 삶과 죽음까지 대중은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진짜 내면을 보여준 적이 없음에 주목하고, 바로 그 ‘알 수 없는’ 재클린에 다가가려 한다. 결코 전부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가능성으로 인물을 조형하는 것이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는 모호하고, 영화는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재클린이라는 복합적인 얼굴을 설계한다. 


<네루다> -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2017)
〈네루다〉(2017)

 


영화 <네루다>는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를 다룬 전기 영화지만, 동시에 그 전기적 서사를 의도적으로 비틀고 허구화하는 메타 픽션이기도 하다. 영화는 1948년 칠레, 공산당 소속이었던 네루다(루이스 그네코)가 반정부 활동으로 체포 명령을 받고 도주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의 네루다는 시를 발표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동시에, 상류 계급의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영화는 이 양가적인 존재를 단정 짓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모습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며 ‘신화가 되어가는 한 인물’의 과정을 따라간다. 

 

〈네루다〉(2017)
〈네루다〉(2017)


실제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국민적 시인이자 정치인이었으나, 감독은 역시나 그의 ‘위대한 업적’을 재현하는 데 관심이 없다. 대신 ‘네루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간다. 영화는 픽션 캐릭터인 경찰관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를 내세워 네루다를 쫓는 추적극 형식을 빌린다. 오스카는 철저히 허구의 인물이지만, 영화 안에서는 네루다의 대척점이자 거울로 기능한다. 시인을 쫓는 이의 시선에서 네루다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관객은 인물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신화화하는 서사 자체에 참여하게 된다. 라라인은 영화 내내 오스카의 내레이션으로 ‘이 이야기를 누가 만들고 있는가’, ‘네루다는 누구의 이야기로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그로 인해 실제 네루다는 사회주의 정치 성향으로 인해 망명을 다니며 도망치는 삶을 살았는데, 영화는 도망치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자신의 신화를 스스로 써내려가는 인물로 기록된다. ‘자기 자신을 문학화하는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신화적 서술은 지나친 자의식으로, 오히려 위인의 명암을 강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감독은 영화 전체를 시적인 감각으로 구성하면서도, 시를 읽듯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가 만들어지는 감각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해낸다. 카메라는 특정 공간이나 인물을 고정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흐르며, 색감과 조명, 배경음악은 시의 리듬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인다. <네루다>는 어떤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이 무엇이든, 그로부터 만들어진 이미지와 신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한다.  

 

<스펜서> - 다이애나 스펜서
 

〈스펜서〉(2022)
〈스펜서〉(2022)


<스펜서>는 1991년 크리스마스 연휴 사흘간의 시간을 다룬 작품으로 라라인은 이 짧은 시간을 통해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을 해체한다. 흔히 다이애나는 ‘세기의 결혼’, ‘영국의 장미’, ‘민중의 왕세자비’로 기억되지만, 영화는 이 수식어들이 사라진 인물의 심리를 따라간다. 영화는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샌드링엄 별장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소와는 다른 경로로 별장에 도착한 그는 어색한 가족 행사와 감시하듯 배치된 왕실 규율 속에서 점차 균열을 드러낸다. 감독은 왕족이라는 위치가 강요하는 완벽한 퍼포먼스 속에서 다이애나가 느끼는 불안, 고립, 갈등을 포착한다.

 

〈스펜서〉(2022)
〈스펜서〉(2022)

 


실제 다이애나는 20세기 가장 사진을 많이 찍힌 인물로, 대중의 지독한 관심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는 그를 가장 사랑받으면서도, 고립된 인물로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실제 사건이나 대중적 서사를 재현하기보다는 왕족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박과 자유를 갈망하는 내면, 환영과 현실을 오가는 심리 상태를 통해 라라인은 ‘그럴 수도 있었던 다이애나’를 구성한다. ‘스펜서’라는 이름으로 제목을 삼은 것도, 공적인 다이애나가 아닌 사적인 스펜서로 접근하겠다는 의도다. 실제로 한 일보다는, 그가 느꼈을지도 모르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는 역사적 사실보다 가능성과 상상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스펜서〉(2022)
〈스펜서〉(2022)


감독은 다이애나의 불안을 시각화하기 위해 과장된 사운드 디자인과 폐쇄적인 공간 구조, 화면 구성을 활용한다. 피아노가 반복적으로 흐르다 멈추고, 복도는 미로처럼 이어지며, 음식 장면은 집착에 가깝게 묘사된다. 일상적인 상황조차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심리 안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영화는 실제 왕실의 갈등이나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그 결말은 명확하고 예측 가능하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다이애나는 아이들과 함께 별장을 빠져나온다. ‘왕세자비’가 아닌 ‘스펜서’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마리아> - 마리아 칼라스
 

〈마리아〉(2025)
〈마리아〉(2025)


파블로 라라인의 신작 <마리아>는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로 불렸던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일주일을 따라가는 영화다. 1977년 파리, 공연 활동을 멈춘 채 은둔 중이던 칼라스(안젤리나 졸리)의 일상은 고요하고 반복적이다. 영화는 이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전성기의 빛과 그 이면의 그림자를 교차시키며 인물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유년 시절, 예술가로서의 욕망, 연인 오나시스와의 관계, 그 후의 고립된 삶까지 연대기적으로 펼쳐가기보다, 산발적인 회상과 감정의 파편을 모아 마리아를 다시 구성하는 방식이다.  

 

〈마리아〉(2025)
〈마리아〉(2025)


실존 인물로서의 마리아 칼라스는 이미 수많은 기록과 인터뷰, 영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라라인은 그런 외형적 정보보다, ‘무대에서 내려온 후의 칼라스’라는 시간에 집중한다. 영화는 공연 장면이나 업적을 재현하기보다는 고립된 예술가가 어떤 감정 상태로 마지막을 견뎠는지를 오히려 좁은 공간과 정적인 구성으로 보여준다. 가정부 브루나(알바 로르바케르)와의 관계, 반복되는 침묵과 음악 감상, 무대복을 바라보는 시선 등은 그의 외로움과 단절된 욕망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마리아〉(2025)
〈마리아〉(2025)

 

 


<마리아>는 감독의 전작 <재키>,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실존 여성을 다루되, 그를 전기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의 내면, 즉 ‘공인의 내면’을 추적한다. 영화 속 시간이 매우 짧다는 제약으로 플래시백을 자주 사용한다는 점 역시 이전 그의 전기 여성 영화 <재키>와 동일하다. 다만 <마리아>는 <재키>와 달리 극적인 사건도, <스펜서>처럼 결정적 변화도 없이 흘러간다. 감독은 이를 통해 오히려 삶의 공백, 말해지지 않은 감정, 무대 바깥의 정적을 강조하고 있다. 감독은 최고의 디바, 프리마돈나, 쩌렁쩌렁한 카리스마로 기억하는 무대 위 마리아 대신 ‘무대가 아닌 일상에선 가장 연약했던 인물’로 그를 묘사하며 자신이 만든 신화를 혼자 감당해야 했던 예술가의 모습을 포착한다. 무대 위에서만 유지되는 자신의 신화로 인해, 여전히 무대에 있으나 동시에 무대를 잃은 사람. 영화는 바로 그 이중성 속에서 마리아를 다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