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주산골영화제가 감독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영화를 응원하고, 여전히 흥미로운 한국영화의 다채로운 풍경을 무주의 관객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기 위해, 올해 13회 영화제부터 2개의 한국 영화감독 특집 프로그램으로 ‘넥스트 시네아스트’와 ‘디렉터즈 포커스’를 선보이는 것. 디렉터즈 포커스는 3편 이상의 장편영화 또는 OTT 시리즈를 연출한 영화감독 중 동시대 한국영화산업의 최전선에서 한국의 상업영화를 이끌고 있는 중요한 영화감독을 선정하여 그의 영화 세계와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집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넥스트 시네아스트는 1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한국의 영화감독 중 단편과 장편, 영화와 영상작업 등 장르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예술적 비전 아래 개성 있고 특별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실력 있고 재능 있는 감독을 발굴, 발견,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6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열리는 올해 무주의 첫 번째 넥스트 시네아스트는 장편 <다섯 번째 흉추>(2024)를 통해 본격적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박세영 감독이다. 그는 현재까지 장편, 단편, 전시 영상, 영화제 트레일러, 뮤직비디오, 상업 광고 등 영화와 영상, 예술과 상업 작업을 넘나들면서, 20편이 넘는 작업을 통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 왔다. 이어 이 자리에서는 올해 디렉터즈 포커스의 첫 번째 주인공 엄태화 감독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최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부터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단편 <숲>(2012) 등 단편과 장편을 아울러 그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이야기는 그가 2003년에 만든 단편 <선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선인장>(2003)
이상한 나라의 태구, 엄태화 유니버스의 시작
결국 돌고 돌아 ‘디스토피아’다. 예술가는 평생 하나의 주제를 다룬다는 말, 영화감독은 자신의 데뷔작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말, 엄태화의 단편 <선인장>(2003)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디스토피아’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는 주인공 태구(김정남)는 자신의 두뇌 구조가 보통 사람들과 달라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마지막 전쟁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 급기야 노아의 방주처럼 은신처를 만들고, 성경을 공부하며, 뉴스 일기예보를 공부하라는 3개의 규칙을 만들어 아지트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제1장 ‘심판의 6개월 전 전초전’으로 시작해 마지막 5장 ‘심판의 날’까지 이어진다. 심판의 날은 엄태화 감독이 사랑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터미네이터 2>(1991)의 부제이기도 하다. 종말이 닥쳐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은 마치 사회의 모든 악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고민으로 불면증에 걸린 <택시 드라이버>(1976)의 베트남전 퇴역 군인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처럼, 외계인으로 인해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라 믿는 <지구를 지켜라!>(2003)의 병구(신하균)처럼 예상치 못한 결말로 나아간다. “내 예상은 어긋난 적이 없다”고 자신만만한 태구는 트래비스나 병구와는 다른 자기합리화의 달인인 것. ‘디스토피아’라는 배경과 ‘강박증’에 빠진 주인공의 조우라는 ‘엄태화 유니버스’는 이미 <선인장>에서부터 시작됐다. 한편, 동생 엄태구 배우가 출연하지 않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이미 ‘태구’다. 마치 주인공에 빙의한 것처럼, 앞으로 동생이 내 영화에 쭉 출연하게 될 거란 예상 때문이었을까. 엄태화 감독은 <선인장> 때부터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

<유숙자>(2010)
홈 스위트 홈,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프리퀄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유숙자’ 영탁(이병헌)을 맨 처음 등장시킨 작품이 단편 <유숙자>일 것이다. 그런데 원래 ‘유숙자’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본식 조어인 무숙자(無宿者)의 은유적인 반대말처럼 쓴 것으로 보이는데, 무숙자는 집 없는 노숙인 혹은 대기근과 상업 발달에 따라 농촌이 몰락하면서 도시로 흘러들어온 농민을 뜻했다. 즉, 유숙자는 어떤 식으로든 기거할 집을 구한 무숙자를 뜻할 것이다. 그처럼 낡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만식(엄태구)은 누군가 먹다 내놓은 짜장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월세가 3달째 밀려 있으며, 오직 아파트 안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뜨개질하며 보고 있는 TV 뉴스에서는 혹한에 얼어 죽은 노숙자 뉴스가 흘러나온다.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키티 인형과 함께 잠들려고 할 때, 낯선 여자 예니(박민영)가 들어온다. 바로 만식이 기거하고 있는 303호의 진짜 집주인이다. 자신의 집에 만식이 숨어 지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예니와 만식은, 마치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탁처럼 언제 들통날지 모르는 기이하고도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 예니가 친구와 전화 통화하며 했던 “이 망할 놈의 집구석 언제 무너지노”라는 말을 현실화한 것이 어쩌면 10여 년 뒤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Home Sweet Home’이라는 <유숙자>의 영어 제목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반어적이다. 한편, 엄태구 배우가 드디어 형 영화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나체의 뒷모습을 노출한 것은 물론 이유 없이 면도기로 삭발하고 주요 부위 왁싱까지 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신봉리 우리집>(2010)
내 반려견 친구의 콘크리트 집은 어디인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리로 이사한 엄태화 감독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사적 다큐멘터리다. 주로 정지된 사진으로 서사를 구성하고 엄태화 감독의 내레이션이 자막으로 깔린다. 2002년 겨울, 부모님과 함께 이사한 그는 “첫인상은 너무 시골 아냐? 앞은 밭, 뒤는 산, 공기는 좋다만 강도 들기 딱 좋겠군, 이라고 생각했다”라는 말로 시작해 ‘알래스카에서 온 장군’과 ‘진도에서 온 마마’라는 반려견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다. “장군이는 마마의 하얀 털에 마음을 빼앗겼고, 마마는 그런 장군이가 싫지만은 않았다. 둘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종을 뛰어넘은 사랑이 있었기에”라는 말과 함께 새끼가 새끼를 낳으며, 어느덧 가족 모두 신봉동의 삶에 행복하게 적응해 간다. 엄태화, 엄태구 형제는 그처럼 반려견을 품에 안고 때로 함께 뛰어놀며 이 작품에 사진으로 출연한다. 그러던 중 이야기의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건 역시 ‘신봉리’를 ‘신봉동’으로 탈바꿈시킨 ‘아파트’와 ‘개발’의 풍경이다. 마을에 고속도로의 고가도로가 건설되면서 ‘두 개의 탑’ 같은 거대 기둥이 생겼고, 어찌 된 일인지 집 아래로 흐르던 냇물이 무서운 흙탕물로 바뀜과 동시에 뒷산도 없어졌다. “우리 집은 곧 아파트가 돼야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양이 가족과 멧돼지 가족이 찾아오지 않았다”라는 내레이션처럼 ‘콘크리트’와 함께 ‘유토피아’는 사라졌다. 소박하고도 유머러스한 어조의 사적 다큐멘터리가 삶과 환경의 변화를 절묘하게 포착하는 <신봉리 우리집>은 엄태화 감독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숲>(2012)
강박증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미쟝센 대상’ 수상작 <숲>. 2021년 제20회를 끝으로 열리지 않았던 미쟝센단편영화제, 그리고 최근 엄태화 감독이 집행위원으로 참여하며 부활을 알린 미쟝센단편영화제는 각 부문 최우수상 외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각 부문을 초월한 대상 수상작을 결정해왔다. 그렇게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던 대상은 미쟝센단편영화제 20년 역사에 신재인 감독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2001),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2009), 김현정 감독의 <나만 없는 집>(2017), 그리고 세 번째 대상이었던 엄태화 감독의 <숲>(2012)까지 단 4편뿐이다. <숲>은 엄태화 감독의 2011학년도 한국영화아카데미 28기 실습작품이다.

<숲>은 ‘꿈’과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오랜 친구 구정(정영기)과 태식(엄태구)은 숲에서 페이크 다큐를 찍는다. “이 바닥 일이 한 방이야. 영화제 몇 군데서 사고 좀 치고 제대로 된 나만의 시나리오 있으면 끝이야”라는 태식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려는 모습을 구정이 촬영하려는 것. 하지만 실수로 실제 목이 나무에 매달리게 되고 구정은 황급히 태식의 몸을 잡아 올린다. 이미 태식은 정신을 잃은 상태인데 구정의 손에서는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한편, 구정이 몰래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 하지만 태식과 더 가까워 보이는, 역시 그들의 오랜 친구인 에스더(류혜영)와 과수원으로 소풍을 떠났던 과거의 에피소드가 숲에서의 일과 교차편집으로 진행된다. 과거 과수원에서 그들이 했던, 구정이 뒤로 넘어지면 뒤의 태식이 받아주는 ‘믿음 놀이’, 즉 구정이 태식을 믿어야 했던 그 상황이 이제 숲에서 태식이 구정을 믿어야 상황으로 바뀐다. 새롭고도 놀라운 영화를 만들어 성공하고 싶다는 강박증과, 태식을 향해 혼자만의 감정싸움을 벌이는 구정의 열등감이 그 서로 다른 ‘믿음’을 떠받치고 있다. 이후 <잉투기>의 태식(엄태구)으로도 이어지는 엄태화 유니버스 속 남자들의 ‘찌질의 역사’, 더 나아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불신과 속죄의 사려 깊은 교차가 짧은 단편에 정밀하고도 오롯이 담긴 걸작.

뮤직비디오 <Love Wins All>(2024)
빌어먹을 세상의 혐오와 싸우는 연인들
엄태화 감독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아이유의 노래와 만났다. 2024년 1월 24일 발매된 아이유의 미니 6집 ‘The Winning’의 선공개 곡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에서 아이유(이지은)와 BTS의 뷔(김태형)는 연인으로 등장한다. 마치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세상과도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 큐브 형태의 미확인 물체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큐브를 피해 옷이 수북하게 쌓인 폐건물로 들어가 오래된 캠코더를 줍는다. 캠코더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는 종말 이전의 세상이다. 엄태화 감독의 이전 단편 <숲>에서도 캠코더는 남겨두고 싶은 기억, 혹은 사건의 진실을 담고 있는 은밀하고도 중요한 매개체였다. 한편, 아이유가 뷔에게 수어를 쓰는 장면, 뷔의 오른쪽 눈 동공이 흐릿한 장면으로 보아 두 사람은 각각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으로 추측된다.

뮤직비디오 공개 당시 아이유는 손글씨로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 한다. 눈에 띄는 적의와 무관심으로 점점 더 추워지는 잿빛의 세상에서, 사랑하기를 방해하는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하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곡 소개를 썼을 정도로, 이 뮤직비디오 또한 세상의 혐오와 차별을 이겨내고자 하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지점은, 평소 아이유가 가장 좋아하는 넷플릭스 시리즈라 얘기해 온 <빌어먹을 세상 따위>(2019)에서 진짜 아버지를 찾아 떠난 소녀, 소년의 여정과도 겹친다는 것. 그 ‘빌어먹을 세상’이란 엄태화 유니버스의 중요한 소재인 디스토피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며, 그의 탁월한 SF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음원 공개에 앞서 ‘이지금 [IU Official]’ 채널에서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Love Wins All>는 당시 하루 만에 약 1,300만 뷰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현재 1억 뷰를 눈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