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이 지난 9월 20일, 20화를 끝으로 종영했다.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인 <무빙>은 수백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간, 디즈니 플러스가 국내 런칭한 이래 가장 큰 규모로 프로덕션을 꾸린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일주일째 디즈니 플러스 시청 1위이며 글로벌 순위에서도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1위에 올라 있다. 공격적인 마케팅과 입소문에 힘입어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무빙>의 주목할 점들에 대해 짚어봤다. 한국형 히어로물을 표방한 <무빙>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PS.

‘무빙’이라는 두 글자가 꽉 차는 매회 타이틀 로고를 아래 챕터마다 모아봤다. 이미 보신 분들은 추억에 젖을 테지만,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은 스포일러가 가득한 글이니 피해 가시길!


<무빙>의 나이스 타이밍

한국형 히어로 서사가 인기를 끈다는 건 한동안 영화는 물론 드라마 쪽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세기에는 TV 앞에 앉은 청소년들이 특촬물에 열광하는 게 너무 당연한 풍경이었다. 일본 서브컬처의 세례를 받고 자라온 세대들이 향유하던 작품들이 Y2K를 거치며 오류가 난 듯 맥이 뚝 끊겼다. 한동안 할리우드에서도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마블 슈퍼 히어로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미국 코믹스 시장을 기반으로 한 마블 영화의 성공은 이후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 사이 한국 영화에서도 <초능력자>(2010)나 <염력>(2018) 같은 시도를 했으나 반응은 미비했다. 어색함을 줄이려는 의도였는지 코스튬을 입는 작품은 쉽게 나오지 못했다. 이병헌과 비는 할리우드로 가서 코스튬을 입었다. 한국 영화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할 규모가 되자, 이에 화답하듯 마블 영화가 서울과 부산에서 촬영을 했고 엄청난 수익을 챙겨갔다.

<무빙> 김두식(조인성)

역시 슈퍼히어로 영화와는 장르적 결이 다르지만 배우들이 수트를 입고 대체 역사 안에 들어가 민족의 비애를 연기해야 했던 <인랑>(2018)은 안타깝게도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마녀>(2018)는 팬덤을 형성했다. 뒤이어 마동석이 <이터널스>(2021)로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에 입성해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팬데믹을 맞아 한국 영화와 드라마 시장 판도가 대격변을 겪던 시기에 등장한 <경이로운 소문> 시즌1은 사실상 히어로 코스튬이나 다름없는 트레이닝복을 단체로 맞춰 입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악인을 단죄하는 서사에 힘입어 관객도 시청자도 서서히 ‘능력배틀물’의 세계에 물들어갔다.

<무빙> 김봉석(이정하)

드디어 <우뢰매>와 <별똥왕자>의 시대가 재현되는 것인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을 즈음 <무빙>이 뒤늦게 찾아왔다. <무빙>은 물론 드라마지만 동시대 영화들이 갖고 있었던 고민이나 시행착오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다.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쏟아부어 가면서 주인공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콘크리트를 주먹으로 때려 부수는 장면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이질감 없이 만들어내는데 보는 내내 생경한 경험이었다. 한국 배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사람들이 재미있어 한다고? 완벽했다, 고 할 수는 없겠지만 첫 주 7화 공개를 시작으로 매주 2화 분량이 순차적으로 공개되던 지난 두 달 동안 <무빙>은 계속해서 화제를 이어갔다. 회차마다 인물마다 멜로, 액션, 누아르, 청춘학원물, 첩보 스릴러, 시대극 등 주력하는 장르의 색채도 변주해 나갔다. 한국형 히어로 서사의 진화를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무빙> 장희수(고윤정)


<무빙> 히어로 코스튬은 ‘서민’과 ‘부모’,

빌런은 ‘권력’

<무빙>의 가장 큰 장르적 특징은 캐릭터에 있었다. 주인공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평범한 인물들이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그들이 비상한 능력을 갖게 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누구도 자신의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돈벌이 수단으로 삼거나 하지 않는다. 울버린의 힐링 팩터에 버금가는 재생능력을 지닌 장주원(류승룡)만이 소싯적에 건달 생활을 했을 뿐인데 그조차 실은 선한 사람라는 건 모든 시청자가 동의할 것이다.

<무빙> 장주원(류승룡)

부모들의 능력이 아이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부모들은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며 살기를 바라지만 권력의 마수는 이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치킨집을 하거나 돈까스집을 하는 평범한 자영업자, 혹은 헌책방, 미용실, 버스 운전기사 등의 평범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그런데 이들의 뛰어난 신체능력은 군부 독재 정권 하의 안기부에 의해 오용된다. 심지어 남과 북의 권력 기관이 능력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똑같다. 권력자들은 조국을 위하는 일이라는 핑계로 체제 유지를 위해 이들의 목숨을 쓰고 버린다. <무빙>의 주인공들은 그럴싸한 코스튬을 입고 있지 않아도 자신들이 지닌 능력이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부모들이 겪은 아픔을 다음 세대에 전가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바로 <무빙>의 평범했던 사람들이 진정으로 ‘각성’하게 되는 순간은 싸워야 할 빌런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무빙>의 빌런은 권력을 지닌 자들, 그들의 이익을 위해 무역하는 자들을 뜻한다.

<무빙> 이미현(한효주)

<무빙>의 평범한 주인공들의 애환, 권력에 맞서는 비상한 능력자들의 울분 등은 강풀 작가 세계관에서 이미 다져진 캐릭터 설정이지만 연출을 맡은 박인제 감독의 터치와 시너지를 일으켰다. 박인제 감독 역시 강풀 작가의 원작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이전 연출작들에서 꾸준하게 권력을 둘러싼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가 연출한 <킹덤> 시즌2 역시 백성을 위협하는 역병 퇴치보다 권력 유지에 혈안이 됐던 왕실의 몰락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류승룡 배우가 연기한 <킹덤>의 조학주 대감이 역병에 걸린 채로 죽음을 맞던 순간의 클로즈업 장면을 재치 있게 셀프 오마주한 장면이 바로 장주원의 얼굴 총상 클로즈업 장면이다. 빌런과 히어로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을 표현해주는 오마주 장면이었다.


청춘 학원물과 정통 멜로드라마의 퓨전

<무빙>의 구성 전략은 초반에 공개된 1화에서 7화까지는 아이들의 사연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되 새로운 캐릭터인 프랭크(류승범)를 투입해 미스터리한 사건 전개의 뿌리를 잃지 않게끔 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둘러싼 운영 주체에 관한 비밀도 적절하게 복선처럼 깔아 놓으면서 봉석(이정하)과 희수(고윤정)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지, 강훈(김도훈)과 혜원(심달기)이 어떻게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지를 청춘학원물의 정서로 풀어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의 활약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 꽤 오랜 회차를 거쳐야 했다.

<무빙>

봉석의 부모인 김두식(조인성)과 이미현(한효주)의 사연은 멜로드라마의 정서로, 장주원(류승룡)과 황지희(곽선영)의 사연은 범죄 누아르의 정서로 풀어내어 캐릭터의 관계와 성격도 부각시켜 주고,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능력 배틀의 과정 안에 현대사의 비애를 녹여냈다. 주원과 재만(김성균)이 맞붙게 되는 지하 수로 장면은 원작에 없는 설정을 덧붙여 부성애를 강조한 액션 장면으로 만들어냈다. 상인들과 경찰이 대립하는 시위 장면에서는 물대포를 사용하는 장면까지 추가해 현실감을 더했다. 전체적인 액션 구성에 있어서도 재생능력이 있는 능력자의 표현이나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 같은 표현은 웹툰이 따라 할 수 없는 영상 언어 고유의 영역인데 이를 드라마가 멋지게 보여준다. 이렇게 많은 장르적 특징을 한 시즌 내에서 뒤섞어 풀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프랭크와 신혜원은 대체 누구인가

강풀 작가의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봉석이네의 추어탕집이 남산 돈까스집으로 바뀐 것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류승범이 연기하는 프랭크인데 원작에는 없는 새로운 인물이다. 앞으로 시즌이 이어지거나 세계관이 확장되는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기존의 주인공들이 겪거나 표현하지 못한 입양아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아픔을 표현하게 될 것 같다. 프랭크가 드라마 초반부터 등장해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후반부에 펼쳐질 클라이맥스 액션까지 기다리기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드라마가 종영한 이 시점에 가장 궁금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랭크다. 이유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실은 드러나긴 하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그가 어떤 위기를 가져올지, 혹은 새로운 아군이 될지는 강풀 작가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심달기 배우가 연기하는 신혜원은 아주 잠깐 등장했지만 프랭크 못지않게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역할이다.

<무빙> 프랭크(류승범)와 장주원(류승룡)의 대결

사실 이 모든 드라마의 떡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강풀 작가의 세계관 전반을 알아야 한다. 강풀 작가가 과거 ‘미스터리 심리 썰렁물’, ‘강풀 액션만화’라는 독특한 장르 카테고리를 내세우며 발표한 <타이밍> <어게인> <무빙> <브릿지> 등은 거대한 강풀 유니버스를 공유하는 작품들로 드라마 최종화 말미에 스쳐 지나간 정보들의 실마리가 다 담겨 있다. 무빙 시즌2가 새롭게 진행될지 아니면 강풀 작가의 다른 원작 가운데 세계관을 공유하게 될 것 같은 <타이밍> 같은 시리즈가 만들어질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추측만 할 뿐이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자 영탁과 10초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민혁, 10분 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세윤 등이 등장하는 <타이밍>도 드라마화가 진행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김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