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의 삶과 작품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가 개봉했다. 백남준을 둘러싼 수많은 영상 자료와 저명한 예술계 인사들이 들려주는 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생전에 백남준이 남긴 글을 읽는 스티븐 연의 내레이션이 빼곡하게 담긴 작품이다.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교육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편집된 이미지를 보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작품을 연출한 아만다 킴 감독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생전 백남준이 남긴 텍스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1956년 뮌헨으로 시작해 갑자기 어린 시절로 거슬러 가기도 한다. 언뜻 시간순처럼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백남준의 텍스트는 어떤 순서로 배치했나?
백남준의 예술적 여정이 시작되는 곳, 바로 독일에서 여정을 시작하여 이야기의 타임라인에서 무언가를 조명해야 할 때 짧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서서히 보여주고 싶었다. 편집자와 내가 생각한 방식을 한마디로 말하면 '양파껍질 벗기기'다. 일반적인 연대기식 전기처럼 어린 시절과 형성기부터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하나씩 파고들어서 핵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각조각이 모여서 결국 어떻게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지 확인하려면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한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그에 맞는 푸티지를 구성한 건가? 푸티지를 구성한 후에 텍스트를 넣은 건가?
양쪽 다 아니다. 백남준의 아카이브 자료를 보고서 전체 이야기는 어떻게 되겠구나 감이 잡히긴 했지만, 이야기의 각 지점과 장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왔다. 장면에 따라 각각 비디오 클립이나 인터뷰이의 이야기, 백남준의 글 등 다양하게 영감을 받았다. 편집자와 함께 보석함(gold bin)을 만들어서 백남준의 말이나 인터뷰이가 들려주는 흥미로운 일화, 백남준과 존 케이지가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푸티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클립 등 우리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별도로 저장했다. 이 보석함은 편집하는 내내 우리를 안내하고 영감을 안겨줬다. 백남준의 글이든 우리가 찾은 음성이나 영상 인터뷰든 핵심은 백남준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디아스포라로서 백남준에게 갖는 동질감도 클 것 같다.
물론이다. 백남준과 그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다.
스티븐 연이 백남준의 텍스트를 읽은 건 단순히 그가 제작자로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스티븐이 백남준의 글을 읽기 전에 이미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 모두 백남준에 대해 공통의 관심사와 연결 지점이 있어서 유대를 느꼈다. 무엇보다 스티븐이 백남준의 글을 읽을 적임자라는 확신을 준 것은 백남준이 ‘사이’(in-between) 공간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 모든 문화 속에 존재했지만 여기에도 혹은 저기에도 속하지 않은 채 경계의 공간(과거-현재-미래, 동양-서양, 다양한 예술 매체 사이)에서 제자리를 훌륭하게 개척한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스티븐이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스티븐도 경계인의 경험이 어떤지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백남준의 태도와 정신을 본능적으로 구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백남준처럼 말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백남준을 흉내 낼 생각은 전혀 없었고 아티스트의 본질과 감정을 전하는 것이 목표였다. 스티븐이 그걸 능히 해냈다.

백남준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극장용 다큐멘터리가 없었다는 점이 의외였다.
각기 다른 언어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아카이브를 찾기 위해 매우 글로벌한 노력이 필요했다. 자료를 모으는 데만 수년이 걸렸고 그에 따른 번역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영상 자료를 활용하는 게 매우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화하고 손상된 경우 복구도 해야 해서 이래저래 할 일이 매우 많았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백남준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인터뷰이들 면면이 워낙 대단하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당신의 데뷔작이라 더 놀랍게 느껴진다. 유력한 이들을 섭외한 비결이 있나.
감사한 말이다. 그저 열심히 인터뷰를 요청했을 뿐이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백남준과 관련한 자료들을 빼곡하게 채워 생전 그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작품이다. 백남준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이 궁금하다.
객관적이라고 봐줬지만, 다분히 주관적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백남준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부각시키고 싶었던 백남준의 면모는 무엇이었나?
양날의 검과도 같은 기술의 특성을 백남준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는 기술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인본주의적 방식을 찾고자 노력하고 고민했다. 이런 그의 태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생의 상수는 변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백남준은 스스로 가진 가정과 생각에 언제나 기꺼이 도전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고 세상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맞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연구했다.

백남준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TV 부처>에 특히 무게가 실려 있다. 수많은 인터뷰이들이 그 작품을 좋아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인가?
<TV 부처>와 관련된 놀라운 일화들이 백남준이라는 사람이자 예술가에 대해서 단번에 많은 사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선견지명이 있다. 여전히 신선하고 지극히 현대적이다. 보는 사람마다 해석도 제각각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백남준을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인물로서 보여주고 싶었다.
윌 엡스타인이 만든 오리지널 스코어가 도드라지게 쓰였다. 엡스타인에게 요청한 음악적인 방향은 무엇인가?
윌 엡스타인의 대학 친구다. 오래전부터 그와 작업하고 싶었다. 윌은 전위적이면서도 팝적인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엔 전위적인 사운드와 멜로디가 서정적인 곡이 좋겠다고 생각해, 작업 초부터 윌에게 과거에 만든 음악 라이브러리를 달라고 요청해서 편집자와 그 트랙들을 여기저기 넣어 보았다. 어떤 장면에 잘 어울리는 곡이 있으면 그 장면을 보여주면서 사용한 곡에서 어떤 점이 좋았는지, 장면이나 이미지와 왜 잘 어울리는지, 그 이유가 악기 편성인지 템포인지 진행인지 등을 말해주었다. 윌은 그 방향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걸 만들었다. 영화를 보신 모든 분이 영화음악에 대해 묻는다. 윌이 제대로 해낸 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P.N.J Theme’은 기존에 발표된 곡이 아닌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위해 만들어진 트랙이다.
예전부터 사카모토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소원 성취했다. 다른 프로젝트로 그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백남준과 사카모토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영화에 쓸 곡을 써줄 수 있는지 연락했다. 그의 건강이 좋았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한동안 아무 연락이 없다가 영화의 러프컷 영상 링크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고, 영상에서 받은 영감으로 테마곡을 만들어주셨다.
영화를 보면서 백남준의 많은 작품 중 왜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제목으로 채택했냐고 물어보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해답이 풀렸다. 실제로 인터뷰 현장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그렇게 제안한 것인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달라.
실은 이 제목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의 정답이 없고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관객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이미 고려하고 있던 제목이었는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마치 존 케이지처럼 우연성 음악(aleatoric music)을 해보자면서 제목 후보 3개를 적고 하나를 골라보자고 했고, 내가 고른 제목이 공교롭게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브라모비치 역시 마음에 들어해서 그의 승인 도장까지 받은 것 같아 기뻤다.
백남준을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질문하고 싶은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제가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까요? 말해주세요.”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