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에도 어김없이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올해의 영화' 리스트가 공개됐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 3편과 더불어, 총 11편의 작품을 꼽았다. 13편 가운데 한국 극장가에 정식으로 개봉했거나(<오펜하이머> <괴물> <에어>) 개봉예정작(<추락의 해부> <바튼 아카데미> <패스트 라이브스> <에어>)을 제외한 일곱 작품을 소개한다.
러스틴
Rustin

“이 작품들이 ‘하이어 그라운드’가 제작했기 때문에 편파적이긴 하지만, 사실 올해 최고의 영화 3편입니다.” 이번 버락 오바마의 리스트를 시작하는 문구. 그와 그의 아내 미셸 오바마는 2018년 넷플릭스와 다년간 계약을 체결하고 영화사 하이어 그라운드(Higher Ground)를 설립했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은 <아메리칸 팩토리>를 시작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장/TV용 영화로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있다. 2022년 리스트에도 하이어 그라운드 작품 <디센던트>를 선정하긴 했지만, 올해처럼 시작부터 하이어 그라운드 작품이라고 못 박고 세 작품을 우선 미는 경우는 처음이다. <러스틴>은 동성애자 민권운동가 베이어드 러스틴의 전기 영화다. 러스틴이 1963년 2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인종차별 철폐를 촉구하며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 모였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조직하는 과정을 그렸다. 채드윅 보즈먼의 유작으로 알려진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조지 C. 울프가 연출을 맡고, <유포리아>로 에미상을 수상한 콜먼 도밍고가 베이어드 러스틴을 연기했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Leave the World Behind

버락 오바마는 2021년 여름에 읽을 책 리스트에 루만 알람의 소설 『세상을 뒤로하고』를 포함시킨 바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가 지난 12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인간을 혐오하는 어맨다(줄리아 로버츠)는 남편 클레이(에단 호크)와 아이들과 함께 뉴욕을 떠나 롱아일랜드의 외딴 저택으로 여름휴가를 즐기러 떠나지만, 그날 밤 집주인 G.H.(마허샬라 알리)가 찾아오고 전자/통신 기기가 먹통이 되면서 종말 기운이 짙어진다. 라미 말렉 주연의 드라마 <미스터 로봇>의 크리에이터 샘 에스마일이 연출과 각색을 맡았다. 그는 오바마가 “캐릭터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보태기도 했다”고 밝혔다. 본래 흑인인 집주인 G.H. 역은 덴젤 워싱턴이 맡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하차하고 마허샬라 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아메리칸 심포니
American Symphony

하이어 그라운드는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더 큰 강점을 드러내왔다. 오바마 리스트 속 세 번째 하이어 그라운드 작품은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심포니>다.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 듀오와 함께 분담한)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2020)로 미국 아카데미를 비롯해 그 시즌 무수한 음악상을 휩쓴 뮤지션 존 바티스트가 그 주인공.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들과 그들을 구하는 의료진을 담은 <전염병의 첫번째 파도>(2021)로 에미상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매튜 하이네만 감독은, 2022년 그래미 시상식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은 바티스트의 커리어와 그가 암 투병하는 아내 술레이카 자와드 곁에서 교향곡(영화 제목 ‘아메리칸 심포니’ 역시 교향곡 제목에서 따온 것) 작곡에 도전하는 1년의 시간을 기록했다. 11월 2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는데 벌써부터 수많은 영화 시상식에서 <아메리칸 심포니>를 호명하고 있다.
블랙베리
BlackBerry

캐나다 영화 <블랙베리>는 이번 기획에서 소개하는 작품들 중 유일하게 유색인종 캐릭터가 중심에 서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2010년대 이전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흥망성쇠를 그렸다. 논픽션 『루징 더 시그널』을 원작으로 삼긴 했지만 ‘리서치 인 모션’(RIM)의 마이크 라자리디스, 짐 밸실리, 더그 프레긴이 블랙베리를 만드는 과정은 픽션으로 진행된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처음 공개된 <블랙베리>는 5월 캐나다 극장가에 개봉했고, 11월엔 확장판 격의 3부작 TV 시리즈로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하고 리서치 인 모션의 임원들은 영화의 허구적인 측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는데, 진위 여부야 알 수 없어도 회사의 성공하고 망하는 과정 자체는 아주 자극적이라는 걸 방증한다고 봐도 될 듯.
아메리칸 픽션
American Fiction

<라라랜드>, <쓰리 빌보드>, <그린 북>, <노매드랜드>, <파벨만스> 다섯 작품의 공통점. 토론토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은 영화라는 것. 만듦새와 대중성을 고루 갖췄다 할만한데, 2023년엔 제프리 라이트 주연의 <아메리칸 픽션>이 관객상을 받았다.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을 각색한 <아메리칸 픽션>의 주인공은 대학교수이자 작가인 몽크(제프리 라이트). 흑인이 쓴 소설에 대한 통념에 분노하던 몽크는 정직 당하고 보스턴의 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소원했던 가족들을 만나고, 술 먹고 홧김에 그토록 싫어하던 전형적인 흑인 소설을 가명으로 써서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기자로 경력을 시작해 TV 드라마 작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코드 제퍼슨은 영화 데뷔작 <아메리칸 픽션>의 시나리오를 제프리 라이트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썼을 만큼 그에 대한 믿음이 컸고, 라이트는 근사한 연기로 영화 전반을 이끌었다.
폴라이트 소사이어티
Polite Society

고상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폴라이트 소사이어티>는 반쯤 정신 나간 코미디다. 줄거리는 이렇다. 런던에 사는 파키스탄계 소녀 리아는 유니스 휴다트(Eunice Huthart)를 롤모델 삼아 스턴트배우가 되기를 꿈꾼다. 반대하는 부모님과 달리 예술가의 꿈을 포기한 언니 레나는 리아의 뜻을 응원하지만 파키스탄계 상류층 모임에서 만난 남자 살림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레나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리아는 결국 이 결혼에 무시무시한 흑막이 있다는 걸 깨닫고 언니를 구출하려고 한다. 영국 드라마 <위 아 레이디 파트>와 <닥터 후>에 참여한 니다 만주르는 장편 데뷔작 <폴라이트 소사이어티>를 두고 “유쾌한 쿵푸 볼리우드 서사시”라 칭했다. ‘여성’과 ‘아시아계’라는 보수적인 한계를 딛고 자기의 꿈을 이루고 자매애까지 회복하는 과정은 코미디와 액션의 쾌감으로 가득하다.
어 사우전드 앤드 원
A Thousand and One

뉴욕 출신의 A.V 록웰 감독은 가수 앨리샤 키스와 작업한 <더 가스펠>(2016)과 성장영화 <페더스>(2018) 두 단편으로 미국 영화신을 대표하는 기대주로 떠올랐다. <페더스>가 어른 시절의 기억과 아이들의 따돌림을 이겨내려는 소년의 이야기였다면, 록웰의 장편 데뷔작 <어 사우전드 앤드 원>은 1994년 교도소에서 갓 나온 여자 이네즈를 따라간다. 출소한 이네즈는 브루클린으로 돌아와 위탁 가정에서 지내던 아들을 만나고, 같이 살고 싶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를 납치해 할렘으로 도주한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이네즈가 아들 테리와 함께 새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주인공 이네즈를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 하는 배우 그리고 R&B 뮤지션으로도 정평난 테야나 테일러가 연기했다. 2023년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돼 (2020년 <미나리>가 받았던)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