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다. (중략)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야코브 부르크하르트 「세계사에 관한 고찰」

나폴레옹은 근대 유럽의 서막을 열어젖힌 인물로 그 역사적 중요성 만큼, 그를 작품의 소재로 다루고자 한 시도는 몰락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부터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의 상당 분량을 들어 나폴레옹의 역사적 의의를 고찰하고자 했고,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나폴레옹의 시대가 남긴 후유증이 소설 곳곳에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며, 알렉상드르 뒤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아예 에드몽 당테스가 나폴레옹이 엘바섬 유배에 처할 때, 죽은 선장의 심부름으로 복귀 계획이 담긴 밀서를 전달하게 된 일 때문에 모함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는 걸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담으로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2023)에서 잠시 스쳐지나가듯 등장하는 프랑스군 흑인 장성은 바로 뒤마의 아버지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이다. 그는 흑백 혼혈인으로 혁명전쟁과 내전에서 군공을 세워 혼혈부대 부사령관, 알프스 방면군 사령관 같은 요직에 오르는 등 상당히 출세했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따라갔다. 그러나 나폴레옹과의 사이가 원만치 않아 군인연금도 받지 못했고, 때문에 성장기 때 뒤마의 가족은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에서 “알렉상드르 뒤마는 흑인이야!”란 대사는 바로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의 사진(1852)을 우연히 보았다. 그때 나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놀라움을 드러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의 시대가 종식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827년에 사진이 발명되었고, 때문에 직접 나폴레옹을 만났거나 그의 전장에 아군으로든, 적으로든 참전했던 명사와 고참병들 몇몇은 운 좋게 장수를 누려 당대의 신기술이었던 사진으로 노년의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의외로 사진과 영화가 발명된 근대 초창기의 역사는 나폴레옹의 시대와 그리 시간적 거리가 멀지 않았던 셈이다. 단편적인 순간을 담는 활동사진으로 첫걸음을 뗀 영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로 발전하면서, 나폴레옹을 다루는 영화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극찬했듯) ‘전쟁의 신 그 자체’로 불린 군사적 천재였기에 시각적 스펙터클을 필요로 하는 대중영화의 소재로 삼기에 너무나도 매혹적인 존재였다.
<워털루 전투>(1913)는 나폴레옹 전쟁을 영화화한 영화사 초창기의 사례이다. 단편과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하다 30분 길이의 <헨리 8세>(1910)를 기점으로 점점 영화의 분량을 늘려나가던 영국의 바커 영화사는 워털루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미국인 감독 찰스 웨스턴을 고용하고, 워털루와 지형이 흡사하다고 판단된 노햄프턴셔 어슬링버러의 평원지대를 로케이션 삼아 당시 기준으론 상당히 긴 편인 86분짜리의 장편을 제작한다. 무려 2000명의 인력을 동원해 고작 5일 만에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연말에 급조해서 만든 패러디 영화가 상영될 만큼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현재는 보존성이 떨어지는 초창기 질산염 필름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고 22분 분량의 자투리 필름만이 영국영화연구소(BFI)의 아카이브에 남아 나머지 분량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한다.


숙적 아서 웰즐리의 나라 영국에서 자신들 역사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재현하는 판인데, 나폴레옹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무성영화 초창기의 프랑스 영화계에서 액션과 코미디부터 멜로드라마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가 하면, 다양한 앵글과 속도감 있는 컷의 분할, 거울을 활용한 왜곡된 이미지의 활용 등, 현대적인 영화문법을 실험하며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던 선구자 아벨 강스(Abel Gance, 1889~1981)는 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멜로드라마와 결합한 반전(反戰) 영화 <나는 고발한다>(1919, 2008년에 166분 버전으로 복원)로 국제적인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비록 1921년 영화의 홍보를 위해 방문한 미국에서 시도한 MGM 영화사와의 계약이 무산되는 부침을 겪었지만, 존경하던 D.W. 그리피스로부터 큰 칭찬과 격려를 들으며 힘을 얻은 그는 <철로의 백장미>(1923, 2019년 413분 버전이 복원)에 이어 자신의 일생일대의 걸작이 될 대작에 들어간다. 바로 <나폴레옹>(1927)이었다.


아벨 강스는 훗날 스스로의 입으로 “영화계의 빅토르 위고가 되고 싶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현재 남아있어 복원된 그의 장편 영화들이 무성영화 시대 당시뿐 아니라 현재의 기준에서도 엄청난 양의 필름을 소모한 대작들(그는 극장 배급의 편의 외에도 완벽주의자의 기질 탓에 상황이나 의도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작품 편집에 수시로 손을 대어 마감을 어기거나, 하나의 작품에 무수한 편집본이 난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21세기에 와서도 아벨 강스 작품의 완전판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현재진행형인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인 건, 당대 프랑스 영화계에서 그가 누리던 독보적인 창작의 재량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긴 시간을 들여가며 인간의 드라마를 차근히 축적하는 서사극의 긴 호흡을 선호한, 낭만주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문학가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가 구상한 나폴레옹의 일대기는 무려 6부작(!)이 될 예정이었다.(화면에 뜨는 영화의 원제는 ‘아벨 강스가 바라본 나폴레옹’(Napoléon vu par Abel Gance)이다.) 유년기에서 세인트 헬레나섬의 유배생활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한 역사적 인물의 인생 전체를 펜 대신 카메라로 서술한 대서사시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제약은 잘나가던 중견감독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비용 문제가 발목을 잡았고, <나폴레옹>은 강스가 원했던 6부작의 1부만을 구현한 것이었다. 브리엔 사관학교의 생도 시절(잘 알려진 눈싸움 일화가 재현되는데 이 장면의 촬영에 쓴 눈은 솜뭉치였지만, 어린이 엑스트라 중 한 명이 실제 돌을 넣어 뭉친 걸 던져서 소년 나폴레옹 역의 배우는 코가 부러졌다)부터 툴롱 공성전의 승리와 출세, 조세핀과의 결혼에서 1차 이탈리아 원정까지 나폴레옹 인생 초년기의 성장과 성공만을 다루었음에도, 1927년 4월 7일, 오페라극장 가르니에에서 처음 공개된 <나폴레옹>의 상영시간은 무려 4시간 10분에 달했다(이때 관객 중에는 뒷날 해방된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젊은 시절의 샤를 드골도 있었다고 한다). 편집하지 않은 필름 촬영분 자체의 총량은 장장 290시간 어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완성된 버전은 아니어서 5월에 아폴로 극장에서 상영된 최종 버전은 기록에 무려 9시간 22분(!)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영화는 수시로 편집되어 미국상영본 중 가장 긴 버전은 6시간 43분, 영국에서는 7시간 20분에 달했고, MGM의 배급으로 1929년 미국에서 상영될 때는 1시간 51분으로 대폭 가위질되었다가(MGM의 사장 루이 B. 메이어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강스는 영화가 난도질되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자신의 뉴욕 사무실에 ‘신이여, 우릴 도우소서‘(GOD HELP US)라는 간단한 전보를 보냈다. 그 외에도 강스는 프랑스 국내에선 검열관에 의해 민간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이 수복 불가능하게 잘려나갔음을 회고한 바 있다), 1970년 강스 본인이 또다시 손을 봐 4시간 45분이 되는 등, 고무줄처럼 줄어났다가 늘어나길 거듭했다. 비록 미국 상영 때는 <재즈 싱어>(1927)로 불어닥친 유성영화의 일대 유행으로 관객이 몰리는 바람에 외면당했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유럽에서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오늘날에도 이따금씩 회자되는 아벨 강스의 대표작으로 남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나폴레옹>의 가장 최종본에 ‘가까운’ 상영본은 1969년부터 시작해 이 영화의 복원에 평생을 갈아 넣다시피 한 영화역사가 케빈 브라운로우가 작업한 5시간 32분 판본이다. 그는 1979년 콜로라도의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상영한 4시간 55분판부터(이때는 노년의 아벨 강스 본인이 참석해 관중과 함께 야외상영장 자리를 지켰고 날이 추워지자 호텔로 들어갔지만 창문을 통해서 영화를 계속 보며 감격해했다고 한다) 누락된 장면과 관계 자료를 발견할 때마다 영화의 복원판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왔고, 1980년 재구성해 미국에서 재개봉한 4시간 50분판의 음악은 카마인 코폴라(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아버지이기도 한 영화음악가)가 맡았다. 2000년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누락된 35분 분량의 필름을 발굴하면서 5시간 30분이 된 영화는 다시 세세한 조정을 거쳐 5시간 32분으로 가닥을 지었고, 이 판본이 BFI에서 Blu-ray로 출시되었다(이 영국판 디스크는 지역코드 B라 국내 플레이어로는 재생을 못하고 별도의 절차로 코드 잠금을 해체해야 한다). 참고로 이 버전에 포함된 음악은 카마인 코폴라가 아닌 1979년 버전 이래 참여한 칼 데이비스의 것이다. 그리고 케빈 브라운로우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복원전문가 조르주 모리에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넷플릭스의 협력을 얻어 7시간 가까운 다른 복원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아벨 강스의 <나폴레옹>이 놀라운 건 쏟아부은 물량과 상영시간의 길이 때문만이 아니다. 스토리텔러로서 그는 당대부터 진부하고 구태의연하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지만, 영화의 형식미학적, 기술적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영화에는 상식처럼 쓰이고 있는 여러 영화적 기법들을 시대를 앞서서 시도했고, 미디어아트를 방불케 하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전통적인 연극무대의 연장선상에서 정적인 앵글의 촬영이 주종을 이루던 무성영화의 시대에 과감한 핸드 헬드 카메라를 도입했고, 흑백의 필름에 색을 입히는가 하면, 인물의 주관적 정서를 중시해 격렬한 현재의 전투가 과거 시점으로 넘어가 유년기의 눈싸움과 포개지는 교차편집이나 다중 노출의 시적 효과를 적극 활용해 빚어낸 회화적 효과(예컨대 지구본과 조세핀의 얼굴을 겹치는 컷은 그의 큰 야망과 사랑의 흥분을 동시에 전달한다)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도 참신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일부 장면은 35mm 카메라 두 대를 덧댄 초창기 필름 3D로 촬영되었다.(이 분량은 현재의 복원판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보관 중이라고 한다.)

그런 실험 중에 백미는 이름하야 ‘폴리비전’(Poly-vision)이라 불리는 새로운 포맷이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1.33:1의 작은 스탠다드 화면비 안에 갇혀 관객에게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할 걸 염려한 강스는 세 대의 카메라를 수평으로 나란히 배치해 촬영하고는 영사할 때도 마찬가지로 세 대의 영사기가 동시에 돌아가도록 해 총 화면비가 4:1(1.33×3)이 되도록 했다. 비록 이 폴리비전 화면은 강스가 의도한 대로의 설비를 갖춘 극장에서만 정상적인 상영이 가능했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고, 미국 상영을 비롯해 대다수의 경우는 카메라 세 대 중 가운데 한 대의 촬영분만 상영되곤 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수평의 길이가 강조되는 이 폴리비전은 당대엔 유일하게 파노라마 영상을 가능케 한 가장 넓은 화면비였고, 1953년 시네마스코프가 발명되고 <벤허>(1959)같은 70mm 대작이 울트라 파나비전의 2.76:1 화면비를 선보이기까지 그와 같은 와이드스크린 영상이 극장에서 상영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이 폴리비전의 아이디어는 근본적으로 오늘날 일부 특수관에서만 쓰이는 ScreenX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에서 강스는 폴리비전을 넓은 화면을 담는 기능으로서만이 아니라 세 대의 영사기가 각기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이른바 분할화면을 구현하는 도구로도 활용했는데, 각 프레임이 프랑스 국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으로 나누어지는 데서 그의 미학적 도전정신은 임계점까지 치달아간다. (에드윈 포터의 <미국 소방수의 삶>(1903)의 오프닝에서도 다른 스타일의 분할화면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분할화면 효과를 보려면 뒷날 <시스터즈>(1973)와 <캐리>(1976)의 브라이언 드 팔마에게 넘어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폴레옹>은 미래의 영화가 나아갈 길을 예비하기 위한 거대한 실험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