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에서 오래 산 존재는 산 아래에서 살 수 없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호랑이든 곰이든 담비든 산속 존재는 산의 일부이자, 산이 그것들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산에서 살아야 할 존재가 산 아래에서 인간과 더불어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원체 인간과 가까이 지냈던 개나 고양이는 예외로 하자. 초원에서 풀을 뜯고 살아야 할 생물에게서 초원을 빼앗고, 밀림 속에서 자연법칙에 따라 사는 걸 천명이라 여기던 동물들이 인간에게 포획 또는 포섭되는 것. 사람들은 그걸 진보 혹은 진화라 부르곤 한다.
이 괴상한 노인은 과연 누굴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데르수 우잘라>(1975)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이례적인 작품에 속한다. 당시, 그는 일본을 떠나 소련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영화계의 전체적인 쇠퇴로 인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던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소련 영화사와 합작해 <데르수 우잘라>를 만들었다. 배경도 배우도 대사도 모두 소련이고, 러시아어다. 이 작품은 1975년 모스크바 영화제 대상과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그는 5년 후 일본에 복귀하여 대작 <카게무샤>(1980)를 제작한다.

<데르수 우잘라>는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살다간 실존 인물의 이야기다. 러시아의 탐험가이자 인류학자인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가 군인 시절 만난 한 원주민에 대해 쓴 수기를 바탕으로 했다. 아르세니에프는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하바롭스크 근처 우수리강을 탐사하던 중, 데르수 우잘라라는 노인을 만난다. 더듬거리는 러시아어로 말하는 그는 고리드 족 출신이다. 이름만 밝힐 뿐, 자신의 나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오래오래’ 산에서 살았다고만 하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예전에 죽었다고 한다.
아르세니에프는 탐사대의 대장이었다. 데르수의 사격 실력은 군인들로 구성된 탐사대원들보다 월등하다. 데르수는 사슴이나 담비 등을 사냥해서 먹고사는데, 오랫동안 산속에서 살았던 만큼 산의 생리와 자연의 순환원리를 본능적으로 체현한 인물이다. 그에게 감화된 아르세니에프가 데르수에게 길잡이를 부탁한다. 잠깐의 고민 끝에 데르수는 승낙한다. 데르수는 아르세니에프를 ‘카피탄(captain)’이라 부르며 여러 차례 곤경에 빠지는 탐사대를 구해준다.
집요한 탐사, 계속되는 난관

데르수의 능력은 문명인의 눈에 거의 초인적이라 여겨질 정도다. 숲속에 난 발자국만 보고도 몇 살 정도의 어느 나라 사람이 몇 시간 전에 지나갔다는 걸 알아채고, 나무껍질이 벗겨진 흔적을 보고선 어느 정도 거리에 오두막이 있을 거라는 것도 정확히 맞춘다. 당시 우수리 강 일대는 지도상 공백 지대였다. 탐사대로선 최상의 길잡이인 셈이다. 아르세니에프와 데르수는 급격히 가까워진다.
단둘이 카칸 호수 방면 탐사를 갔다가 빙판이 된 호수 위에서 길을 잃는 장면이 있다. 날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다른 쪽을 탐사하러 이동한 대원들의 행방도 알 수 없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데르수가 호수 표면에 웃자란 풀들을 베면서 ‘카피탄’을 독촉한다. 아르세니에프도 사력을 다해 풀을 베지만, 데르수보다 체력이 한참 달린다. 측량기를 거치대 삼아 풀을 잔뜩 쌓아 올려 로프로 지탱시킨 임시 텐트가 완성되는 순간, 아르세니에프는 정신을 잃는다. 데르수가 아르세니에프를 텐트 속에 눕힌다. 둘은 그렇게 살아남아 밤을 보낸다. 자연에서 터득한 생존법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해가 뜨고 동료들과 재회하지만, 이후 탐사도 난관의 연속이다. 식량도 체력도 다 떨어졌다. 이때도 데르수의 경험과 기지가 빛을 발한다. 멀리서 생선 굽는 냄새가 난다. 어느 민족이 무슨 고기를 어디서 굽고 있는지 데르수는 금방 알아챈다. 그쪽으로 이동해 결국 체력과 원기를 회복한다. 그리고 얼마 후, 데르수와 탐사대가 작별한다. 이게 영화의 1부(part1)이다.

문명과 자연의 불편한 만남
2시간 20분짜리 영화인데. 정확히 1시간 10분씩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개봉 당시 인터미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1부는 탐사의 첫 기간, 주로 겨울이다. 2부는 1907년 봄부터 시작한다. 규모가 더 커진 탐사대가 다시 우수리 지역을 찾는다. 아르세니에프는 탐사 시작부터 데르수의 종적을 찾는다. 얼음과 눈과 진창이었던 산과 들판이 온통 초록빛이다. 1부에서 회백색의 어둠 속을 주로 헤맸다면 2부에선 밝은 빛이 작렬하는 장면이 많다. 결국 데르수와 아르세니에프가 상봉해 아이들처럼 반가워한다. 그러나 그 이후는 그다지 밝지도 찬란하지도 않다.
아르세니에프의 권유에 못 이겨 하바롭스크에 따라온 데르수는 우울해진다. 도시에선 사냥도 할 수 없고 말도 탈 수 없을뿐더러, 모든 게 돈으로 거래되는 상황에서 데르수는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 여기게 된다. 자연의 모든 원리, 사람과 생물의 지혜로운 공존 방식으로 평생 살아온 데르수에게 말끔하게 정돈된 사회인 아르세니에프는 갑자기 낯설고 불편한 존재가 된다. 결국,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불화와 비극의 징조가 드러난다. 다 보고 나면 괜히 마음이 서늘해진다. 삶도 죽음도 같이 했던 관계였지만. 삶의 본원적 토대가 애초부터 달랐으니 죽음 또한 다를 것 아니겠나. 데르수는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최근에 무슨 유행처럼 방송되는 ‘자연인’의 삶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다. 100년도 훨씬 지난 시절 한반도 바로 북쪽에서 있었던 일인 만큼 당시와 지금을 대놓고 비교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 노도처럼 변화한 문명 세계에 살면서 소위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게 본질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만 들 뿐이다. 데르수 우잘라처럼 자연 원리를 실제적 삶의 구체적 기술로 체화하는 것도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이 사람이 바로 장자가 말한 성인이야!
데르수는 단순히 손기술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카피탄’에게 말한다. “해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말한다. “불도 물도 바람도 다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데르수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기도, 만물에 도통한 산신령 같기도 하다. 사람 포함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대하는 데르수의 태도는 진중하고 깊다. 그저 말뿐만인 명분으로 생명을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를 몸에 입고 말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토로할 때 그는 그저 한 사람의 추레한 촌부나 진배없다. 그런 그가 물과 바람과 불이 매섭게 조화를 이루는 대자연 속에선 그 어떤 거인보다 우람하고 당당하고 솔직해 보인다.
도올 김용옥은 데르수 우잘라를 일컬어 “장자(莊子)가 말하는 기인(畸人)은, 장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은 ‘데르수 우잘라’ 같은 사람에 가깝다”고 평한 바 있다. 도올 특유의 과장과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또는 아르세니에프가 쓴 책(『데르수 우잘라』, 김욱 옮김, 갈라파고스, 2005)을 다 읽고 생각해 보면 크게 ‘오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처럼 살거나, 그만큼 자연에 통달할 수 없는 현재 여건이라 하더라도 그의 언행과, 거기서 배어나오는 자연스러운 철학은 그 어떤 문명화된 지식인의 교언(嬌言)이나 그 어떤 예술가의 허세보다 명징하고 사려 깊다. 그걸 질박하게 우려낸 구로사와 아키라의 연출 솜씨 또한 그에 못지않다.

한 늙은 목수를 알고 있다. 시골에서 자신의 아내와 소박하게 살려고 작은 땅을 사서 집을 짓는 도중, 도시에서 공수 받은 자재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펜션이나 전원주택 같은 데 사용되는, 벌레나 곰팡이 처리용으로 화학약품을 섞은 자재였던 탓이다. 자재회사 측에선 원가 절감 등을 이유로 그런 걸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거 쓰면 벌레들 다 죽는다. 사람이나 벌레나 다 같이 살아가는 거지, 이렇게 못되게 살면 안 돼!”라는 게 목수의 지론이었다. 데르수 우잘라를 닮은, 작고 왜소한 체구에 둥글넓적한 얼굴을 한 한반도의 어느 노인이었다. 데르수 우잘라는 그 노인의 먼 조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혹시 우리들 중 누군가?
영화 초반부, 탐사대가 데르수 우잘라를 처음 보곤 이렇게 묻는다. “중국인이오? 한국인이오?” 데르수 우잘라가 말한다. “나는 골드 족입니다.” 데르수 우잘라는 고리드 족이다. 지금도 한반도에서 한국말을 쓰며 살고 있는 누군가 중 그의 핏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지구는 둥글고, 동양인의 얼굴도 둥글고, 시간의 궤적도 둥글다. 내가 어제 죽인 벌레가 아주 오래된 내 조상이거나 먼 미래의 후손일 수도 있다. 데르수 우잘라의 ‘철학’에 의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는 그 ‘할배’를 믿는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