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g’는 당연히 개를 뜻한다. 초등학생도 알고 있을 거다. 거꾸로 읽으면 ‘God’, 즉 ‘신’이다.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말장난일 거다. 명절 대목 앞두고 무슨 헛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개는 사람을 잘 따르는 동물이다. 위기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사례도 허다하다. 신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 여겨진다. ‘Dog’를 ‘God’이라 읽으면 그 수직관계가 뒤집힌다. 일단, 말장난은 여기까지다.
120분 동안의 충직한 ‘개판’
뤽 베송 감독의 신작 <도그맨>(2023)를 보고 나서 빅토르 위고나 도스토옙스키가 떠올랐던 건 직업병의 발로인지 모른다. 고통과 불행 속에 허덕이던 자가 구원을 희구하고 실천한다는 차원에서일 거다. 사람들에게 소외된 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복수한다는 내용은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떠오르게 한다. 『웃는 남자』는 ‘조커’의 원형이기도 하다. <도그맨>은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와 분위기가 슬쩍 비슷한 데가 있다.
악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인도 가능하다는 명제는 도스토옙스키가 19세기에 『죄와 벌』에서 던졌던 화두다. <도그맨>의 주인공 더글러스(케일럽 랜드리 존스)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대개 남성)에게 폭력을 일삼고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다. 주로 개들을 통해서이다. 더글러스는 백여 마리의 개와 함께 생활하는, 하반신 불구 장애인이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지만, 그가 가끔 일어설 때가 있다. 카바레에서 여장을 하고 노래할 때다.

더글러스는 에디트 피아프의 ‘La Foule’를 기가 막히게 부른다. 그게 그의 유일한 사회적 밥벌이 수단이다. 폐교가 된 고등학교 건물에서 개들과 살기엔 턱없이 부족할 테지만, 그에겐 또 다른 생계 수단(?)이 있다. 개들이 부잣집에 침투해 귀금속을 훔쳐오는 것이다. 더글러스는 그 행위를 ‘부의 재분배’라 일컫는다.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중지를 치켜올리는 행동이랄 수도 있는데, 그걸 고백하는 더글러스의 표정은 천연덕스럽기만 할 뿐이다. 영화 전체가 음울하고 비장하기보다 유머러스하고 귀엽게 여겨지는 요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귀여운 건 당연히 개들이다.
개들이 사람보다 연기를 잘해!
뤽 베송 감독은 이 영화에 총 124마리의 개가 출연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사육사만 25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CG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개들의 숙련된 연기만으로 촬영했기에 말 그대로 즐거운 ‘개판’이었다고 한다. 애견인이라면 눈이 혹할 정도로 다종다양한 개들이 다종다양한 표정과 액션으로 영화 전체를 이끌고 간다. 개가 사람에게 목줄을 매달아 끌고 가는 영화랄까. 사람(가족)에게 버림받은 더글러스는 개들의 신이다. (God Dog?)
더글러스는 투견을 업 삼아 개들을 사육하는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형 역시 아버지를 닮아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그러면서 늘 주(그리스도)에게 기도한다. 개들에게 먹이를 줬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더글러스를 개 우리에 가둔다. 유럽 음악을 들으며 요리하기를 즐기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참다못해 집을 떠난다. 더글러스는 개 우리에서 그야말로 개처럼 자란다. 개들이 그의 친구이자 부모이자 선생이 된다. 그러다가 분노한 아버지의 총에 맞아 척추 불구가 된다. 개들의 기지로 경찰이 몰려와 더글러스는 구출된다. 이후, 그는 보호소를 전전하며 자란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사람인지 동물인지

보호소에서 더글러스는 살마(그레이스 팔마)라는 연상의 연기 선생을 알게 된다. 더글러스는 그녀에게서 셰익스피어를 배우게 된다. 살마와 함께 무대에 오른 어린 더글러스는 연기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능력과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살마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살마는 얼마 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는 스타가 된다. 성인이 되어 살마의 공연에 찾아간 더글러스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곤 절망한다. 더글러스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또다시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그에겐 개들이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된다.
이 정도가 이 영화의 전사(全史)다. 더글러스가 모종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핑크색드레스를 입고 온몸에 핏자국이 묻어있는 괴이한 몰골의 여장남자. 상술한 내용은 더글러스가 정신상담의 에블린(조조 T. 깁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다. 경찰은 그를 ‘어디’로 분류해야 할지 몰라 에블린을 불렀다고 말하는데, 그 ‘어디’라는 게 더글러스의 기묘한 사회적 정체성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정상인인지 정신병자인지, 심지어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헷갈릴 만도 하다. 그만큼 더글러스는 사회가 규정하는 모든 규칙과 경계를 넘어서거나 비켜선 존재다. 이를테면 ‘다른 존재’이고 기존 분류 방식으론 정체성을 특정할 수 없는, 일종의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일 또한 인간의 윤리나 법적으론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더글러스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고 당당하다. 법의 편, 사회의 편에서 더글러스를 조사하고 판단해야 하는 에블린의 마음이 슬슬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글러스는 의외로 순순히 에블린에게 자신의 모든 걸 설명한다. 일말의 주저나 죄책감마저 내비치지 않는다. 영화는 더글러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구술하는 내러티브 구조로 흘러간다.
견공들아, 셰익스피어를 읽어볼래?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던 존재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내막을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글러스는 개들과 자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는 존재다.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나, 인간 사회에서 그를 받아주는 이는 드물다. 그는 하반신 불구뿐 아니라, 치명적인 정신적 내상까지 끌어안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다. 생물학 석사까지 땄지만, 그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유일하게 그를 받아준 곳이 드랙퀸 분장으로 쇼를 하는 카바레다. 카바레 주인조차 그를 냉대했지만, 동료 드랙퀸들이 그를 환영한다. 그곳에서 노래하며 더글러스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구원한다.

더글러스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암송할 줄 아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모든 오욕칠정을 그 어떤 심리학자의 관찰보다 첨예하게 꿰뚫은 작가였다. 둥그렇게 모여 앉은 개들에게 더글러스가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가 지닌 푸근함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개든 인간이든 고통은 상시적이고 지난하다. 그것은 인간의 한정된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생명체의 궁극이기도 하다. 더글러스는 비록 개들에게 글을 읽어주지만, 그가 전해주는 건 인간의 말이 아니라 생명체가 지닌 어두운 진실과 고통받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와 찬미일 것이다.
이 영화가 모종의 영적 구원을 다루고 있다면 바로 그 점에서이다. 개들의 도움으로 구치소를 탈출한 더글러스가 교회 십자가를 자신의 그림자인 양 짊어지고 쓰러지는 장면은 보기에 따라 과장된 수사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온갖 폭력과 소외를 버텨내고 스스로 일어서는 자의 냉혹하고 처절한 결기를 그 어디에도 실체로서 드러나지 않는 신의 입김 안에 불어넣으려 하는 행위의 절박함은 높이 살 수밖에 없다.
신의 목줄은 사람하기 나름

개들은 제힘으로 일어섰다 다시 드러눕는 더글러스의 주위를 둘러싼다. 그는 정녕 일어섰기도 했고, 재차 쓰러지기도 하는 존재가 된다. 개들은 그런 사람을 믿고 따른다. 이런 대사도 나오지 않던가. “개의 결점은 딱 하나,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사람도 다르지 않을 거다. 무언가를 믿는 순간, 그 ‘무언가’(가족 등)가 자신의 적이 되는 상황이 이 영화의 시발이기도 하다. <도그맨>은 개에게 투사된 인간을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왜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존재를 신이 어떻게 징벌하거나 구원하는지, 충실하고 상냥한 개소리로 경고할 뿐이다. 신의 목줄은 결국 사람이 지켜내야 할 사명에 의해 헐거워지거나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