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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민규동 감독의 ‘데뷔의 순간’. 씨네플레이와 한국영화감독조합의 〈한국영화, 감독〉 인터뷰

김지연기자

감독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2024년을 힘차게 열며, 네이버 영화 콘텐츠 공식 파트너사인 ‘씨네플레이’와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함께 진행한 영화감독 인터뷰 시리즈 <한국영화, 감독>의 첫 시즌이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매주 씨네플레이 네이버TV(tv.naver.com/cineplay)와 네이버 연예면 메인 ‘최신 영화 소식’을 통해,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한 감독당 1부와 2부로 나누어 우선 공개된 뒤, 씨네플레이 유튜브에서 그다음 주 월요일에 1부와 2부를 묶은 합본 영상 1편이 공개됩니다. 그중에서도 매번 씨네플레이의 두 명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감독들이 장편 데뷔작을 내놓기까지의 이야기만을 담은 ‘데뷔의 순간’은 글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 감독>의 마지막 주인공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데뷔해 <내 아내의 모든 것> <간신> <허스토리> 등을 연출한 민규동 감독입니다. 민규동 감독님은 현재 윤제균 감독님과 함께 한국영화감독조합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진행: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 김지연 기자)

 


민규동 감독과의 인터뷰 현장
민규동 감독과의 인터뷰 현장

씨네플레이

올해 초, 네이버 영화 콘텐츠 공식 파트너사인 씨네플레이가 한국영화감독조합과 함께 <한국영화, 감독>이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했는데요. 오늘은 <한국영화, 감독> 시즌 1의 마지막 10번째 주자이자 한국영화감독조합의 공동 대표이신 민규동 감독님을 모셨습니다.

 

민규동

안녕하세요. 민규동입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제가 올 자리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씨네플레이

민규동 감독님은 감독조합의 대표로서, 현재 한국 영화계의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오래전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조합 소속 감독들의 데뷔 직전 청춘의 이야기만 담은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을 낸 적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민규동 감독님께 그 이야기를 청하고 싶습니다. 우선 민규동 감독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에 광고회사 LG애드에 입사하셨죠. 그때 입사 동기가 윤제균 감독님이기도 하고요. 그때까지의 과정을 보면, 정말 대한민국의 부모님들이 굉장히 좋아할 만한, 모범생의 경로를 쭉 이어오셨는데요. 영화감독의 삶을 택하기까지, 삶에 어떤 터닝 포인트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민규동

돌이켜보자면, 저는 즉흥적으로 삶의 행로가 사실 많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어머님이 시멘트를 지고 가다가 허리를 다치셔서 의’사가 돼야겠다’ 이런 결심을 했고요. 또 ‘과학이 세상을 구한다’ ‘우리나라는 과학이 너무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과학부 동아리를 하다가, 고3 때 처음 컴퓨터 동아리에 들었었고요. 근데 어쨌든 고2 때 어떤 사고로, 제가 문과를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갑자기 또 준비하다가, 또 정반대에 있는 경제를 전공하게 됐죠. 또 막상 대학에 가서는 춤 공연의 세계에 빠졌어요. 제가 직접 춤을 많이 췄고, 공연 연출도 많이 하고. 광장에서 무대 공연을 많이 했어요.

 

씨네플레이

그때 별명이 ‘신림동 황금허리’ 였다면서요?

민규동

제가 당시에 허리를 유달리 많이 튕겼어요. 당시에는 웨이브 같은 것이 상당히 불경스러운 분위기였거든요. 3천 명이 모여 있는데, 제가 허리를 막 흔드는 건 일종의 터부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학내에서 소문이 나고, 제가 행사에 초대를 받으면서 저는 ‘나는 전생에 광대였을 지도 몰라’라고 생각을 하면서 춤추러 전국을 돌아다녔죠. 당시에 홍대나 한양대에 유명했던 춤꾼들이 있어요, 가서 배틀도 했죠.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 커플 춤이 없었잖아요. 학내에 커플 춤을 도입해서 그런 춤을 유행시키는 것에 보람을 느껴서, 극장 뮤지컬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저는 군대에 갈 줄 몰랐는데, 군대에 갔어요. 그래서 (그런 다짐들이) 다 끊어졌죠.

 

군대에서는 처음에 부산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시네마테크 24분의 1’이라는 공간에서 영화를 자주 보게 됐어요. 지금 말하자면, 불법 비디오 카피로, VHS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영화를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는데, 거기서 신기한 영화를 보게 됐어요. 또, 그때 연출 분석을 하는 강의도 들었어요. 그때 전수일 감독님이 경성대 교수님일 때, 배창호 감독님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연출 분석을 하는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저는 ‘영화라는 게 너무 어렵구나,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관심이 생겼죠. 옆에서 단편 영화 만드는 분들은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 ‘트랙 인’ 같은 영어로 된 용어들을 썼어요. 그래서 저는 ‘저런 건, 정말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구나’라고 멀리서 부러워하기만 했어요. 그러다가 제대하고 나서, 제가 한겨레문화센터 영화제작학교의 1기 수강생이 됐어요. 그 길로 이제 영화로 들어섰죠.

 

씨네플레이

부산 출신으로서, 저에게도 ‘시네마테크 24분의 1’은 익숙한데요. 사실 거기가 좀 찾아가기에는 좀 위치가 애매해서 평소에 가기가 힘들거든요. 그런데 군인의 신분으로서, 거기를 왜 가려고 하셨을까 궁금한데요.

 

민규동

그러게요. 제가 거기를 안 갔으면, 저는 지금 영화감독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강의를 몇 번 듣다 보니까,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미쟝센 강의에서는 ‘데쿠파주’ ‘세캉스’ 같이 불어로 된 용어도 많았고요. 보통 관객으로서 영화를 볼 때와는 달리, 만드는 세계는 냥 단순히 배우를 놓고 촬영하고 이런 게 아니라 굉장한 예술적인 영역이 있고, 역사가 있고. 그런 것들을 배웠어요. 우연의 계기로요.

 

씨네플레이

게다가 ‘시네마테크 24분의 1’에 가서 그냥 영화만을 본 게 아니라, 강의를 또 신청해서 들으신 거잖아요.

 

민규동

제가 그때 VHS로 강의를 녹화했어요.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영상을 나중에 제가 단편을 만들 때 계속 돌려봤어요. 그 당시에는 (영화 관련) 번역된 책들도 우리나라에 많지 않았고. 또, 영화를 공부한다, 영화를 한다고 하면 항상 ‘딴따라’라는 말이 따라왔죠. 지금은 잘 안 쓰는 말이지만. 그래서 영화를 공부한다고 하면 추천하는 사람도 없고, 상담받을 곳도 없고. 선배도, 후배도 없고. 그냥 혼자서 막막하게, 그냥 움직였던 것 같아요. 정말 옛날이죠.

 

씨네플레이

감독님 최초의 단편은 <허스토리>(1996, 장편 <허스토리>(2017)와는 다른 작품)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단편 <허스토리>는 한겨레 영화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든 거였나요, 아니면 후였나요?

 

민규동

단편 <허스토리>는 제 졸업작품이에요. 저의 최초의 단편은 <새>(1995)라는 영화인데, 제가 최초로 본 새로운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히치콕의 <새>(1963)였어요. 제가 시네마테크 24분의 1을 가기도 전에, 군대 시절 같이 근무하던 미군 친구의 방에서 자막 없이 히치콕 영화를 처음 본 거예요. 그런데, 영화가 너무 독특했고 신기하면서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제 편집 스타일로 히치콕을 따라 하게 됐죠. 첫 단편 <새>는, 제가 본 히치콕의 작품 몇 편을 콜라주 했던 영화예요. 죽은 새를 가진 어떤 소녀가 난도질을 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리고 졸업 작품이 단편 <허스토리>였죠.

 

씨네플레이

사실 이 ‘허스토리’라는 단어 자체가 혁명적이기도 하고, 학생이 이런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에요. 어떻게 하다가 이 단어를 떠올리게 되셨나요?

 

민규동

글쎄요. 허세였을까요. (웃음) 제가 그 당시에 인상적으로 본 책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이에요. 엄청나게 두껍고 글자는 조그마했는데, 제가 갖고 있던 젠더 관념에 정말 혁명적인, 놀라운 책이었어요. 그중에 ‘허스토리’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남성 중심의 세계관으로 재해석되는 역사와는 다른, 여성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나온 단어였는데, 그 단어가 유난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만든 단편 영화가 졸업 작품 경선에서 떨어졌어요. 졸업 작품으로는 총 세 작품만 만들어지는데, 30명의 여러 아이템 중에서 3개를 고르는 거예요. 속았죠. 처음에 한겨레문화센터에서는 학생들이 모두 졸업작품을 만든다고 홍보를 했었는데, 들어가 보니 아닌 거예요. 제가 그래서 ‘모두가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시위도 하고 성명서도 냈는데 안 해주더라고요. 하여튼, 그 떨어진 작품이 바로 단편 <허스토리>의 모태가 된 작품이에요. 처음의 시나리오는 쫓기다가 죽는 트랜스젠더 이야기였는데 떨어졌고, 새롭게 레즈비언 시나리오로 준비한 단편은 어쩌다가 만들어지게 됐어요. 왜냐면, 저 대신 뽑혔던 한 분이 준비가 미비해서 포기 선언을 하;고, 대타를 다시 투표했는데, 3 대 2 한 끗 차이로 제 작품이 된 거죠. 그렇게 만든 단편 <허스토리>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요. 실제 제 학교 후배인 레즈비언 친구를 인터뷰했어요.

 

씨네플레이

놀라운 게, 퀴어 영화나 동성애 담론이 폭발적으로 나오던 시기가 95, 96년 즈음이었어요. 저는 그 당시에 잡지 <키노>에서 ‘퀴어 시네마 특집’을 보며 처음으로 그런 단어를 접했고, 당시에는 ‘호모’라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때였잖아요. 그런데 그 이전부터 트랜스젠더나 레즈비언과 같은 소재에 관심을 보이셨다는 게 놀라워요.

민규동

저한테는 영화가 너무 어렵고, 영화를 한 번 만든다는 것이 너무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일상적으로 제가 접하는 현실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정말로 표현하기 힘든 영역을 영화로 표현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중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게이, 트랜스젠더가 모두 경멸적인 언어인 ‘호모’라는 단어로 통칭됐었고, 언어조차 혼선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런 세계를 들여다봤더니, 우리 안의 편견과 혐오, 억압들이 뒤섞여 있었다는 걸 알았죠. 그러다가 그 당시 커밍아웃한 후배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죠. 그때는 관련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 논문을 봐야 했어요. 관련 서적이 없으니까요. 또 인터뷰를 굉장히 007 작전처럼 비밀스럽게 했어요. 어떤 여성지에 얼굴을 가리고 인터뷰했던 레즈비언 분께, 어떤 서점,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떤 책 사이에 내가 질문지를 넣어놓겠다, 그러면 가져가시라라고 해서 인터뷰를 했던 적도 있고요.

 

씨네플레이

비대면으로 하신 거네요.

 

민규동

그분이 인터뷰 답지를 넣어주셔서, 제가 그걸 보고 제가 쓴 시나리오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알았어요. 어떤 게이 분을 인터뷰할 때에는, 그분이 시나리오를 휙 던지면서 ‘이런 거 안 만드는 게 우리를 돕는 거다’ ‘기분 나쁘다. 우리를 잘 모르는 것 같다’라는 혹평도 해주셨고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씨네플레이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는 김태용 감독님과 굉장히 친하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장편 데뷔도 함께 하셨는데요. 공동 연출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건가요?

민규동

그전까지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존재를 잘 몰랐었는데, 한겨레 문화센터에 다닐 때 수업 중에 봉준호 감독의 <지리멸렬>과 장준환 감독의 <2001 이매진>이라는 단편을 봤어요. 그건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었고, 35mm로 찍은 거였죠. 제가 열악하게 16mm로 찍었던 것과는 달리, 그 작품들은 블록버스터였어요. 그래서 영화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거기에 가게 됐죠. 그때 만났던 친구가 김태용인데, 기질적인 면에서도 비슷하고 잘 통했어요. 저희 스스로 덤앤더머라고 불렀거든요. 서로 두가 덤이냐라는 걸 놓고 싸웠던 것 같아요. 서로 좀 구멍이 숭숭, 결핍이 많은 그런 사이여서 많이 친했어요. 그리고 아카데미 시절에는, 우연하게도 2년 내내 세 작품을 하는 동안 계속 같은 조였어요. 그때 18명이 한 기수였는데, 9명씩 나눠서 돌아가면서 스탭도 하고, 연출도 하거든요. 그런데 계속 같이 한 거죠. 그래서 그때 제 첫 번째 단편 제목이 <지각대장 태용이>(1996)에요.

 

씨네플레이

김태용 감독님이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지각을 많이 하셨나 봐요.

 

민규동

주로 수업이 끝날 때쯤 나타나가지고. 뒤에서 벌받느라 서 있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동화책 「지각대장 존」에서 모티브를 받아서 만들었어요. 사실, (아카데미에서는) 수업보다, 수업 이후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던 것이,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이 되고, 멘토가 되고, 서로 멘티가 되어 준 시절이었어요. 극영화를 경멸하면서 ‘실험 영화를 해야 해’라며 「실험 영화의 이해」라는 책을 몇 달 동안 공부하기도 하고. 당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그전에는 국가기관이라서 돈을 받지 않다가, 최초로 입학금을 받던 시기였어요. 2년제가 되기도 하고, 교장 선생님이 없던 격변의 시기였어요. 수업의 커리큘럼도 정해져 있지 않고, 우리끼리 서로서로 만들어가는 그런 시기라 재미있게 많이 했었고. 그런데, 한국영화아카데미도 들어갔더니 졸업 작품을 3명만 찍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건 아니다, 처음으로 돈을 받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다 찍어야 한다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우겨서 졸업작품 3개를 만든 제작비를 나눠서 18명이 모두 다 찍게 됐죠.

 

주성철 편집장
주성철 편집장

씨네플레이

그 당시에 이미 한국영화감독조합의 대표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신 거네요.

 

민규동

시스템이 정착이 잘 안됐던 시절에, 제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왜냐면 졸업작품을 못 만들면, 부모님한테 내가 단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걸 보여줄 증거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다행히 아카데미에서 허락을 해줘서, 처음으로 18명이 전체 졸업작품을 시사하는 첫 번째 졸업영화제가 시작됐어요. 그전까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는 졸업작품의 국내 공개가 불가하다는 방침이 있었어요. 해외 영화제만 가능했고요. 그런데 또 국내에 공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빌어서, 처음으로 <열일곱>(1997)이라는 제 중간 실습작품이 서울단편영화제의 경쟁 부문, 부산국제영화제 단편 부문에 나가기도 하고. 그 이후로 졸업영화제라는 형식이 정착됐죠. 저희 돈으로 만들었어요. 제가 협찬을 뛰어서, MTM(연기아카데미) 가서 50만 원 받고. 팸플릿 만들고, 부모님, 지인들, 출연하는 분들 다 모시고 동송시네마테크에서 처음으로 영화제를 했죠.

씨네플레이

또 감독님의 선구자적인 측면은, 공동연출이라는 걸 시도하셨다는 건데요. <열일곱>이라는 단편은 민규동 감독님과 김태용 감독님이 공동연출 하신 작품이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공동연출이라고 하면 코엔 형제 정도만 알았고,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요. 김태용 감독님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공동연출을 결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민규동

굉장히 여러 면에서, 천생연분 같은 공통점을 많이 느꼈어요. 단편 <열일곱>이 공동연출의 시작이었는데요. 김태용 감독이 가출 청소년 인터뷰들을 모티브로 기획안을 내서, 3명이서 같이 시작했었고요. 또, 제가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천문학 서적을 모티브로 영화를 시작할 때, 김태용 감독에게 같이 해보자고 해서 <창백한 푸른 점>(1998)을 공동연출 하게 됐죠. 졸업 후에는 다른 친구들이 연출부, 조감독 생활을 시작할 때, 저랑 김태용 감독은 <토이 스토리>에 감명을 받아서 ‘3D 애니메이션이 대세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홍대 시각디자인과 졸업생과 서울대 공대에서 애니메이션, 털 연구를 하던 사람들과 같이 회사를 만들어서 3D 애니메이션을 준비했어요. 저와 김태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홍대 친구들이 ‘마야’라는 프로그램으로 3분짜리 트레일러를 만들었어요. 그 3분을 만드는 데에 1년이 걸렸어요. 그러면서 또 같이 작품을 준비했는데 만들어지지는 않았어요. 그 이후에, 한 프로듀서가 <열일곱>을 보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제안했어요. 나중에 왜 공동연출을 제안했냐고 물어봤는데, 한 사람의 개런티로 두 사람을 쓸 수 있는 가성비, 두 사람을 쓰면 두 배의 효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창백한 푸른 점〉
〈창백한 푸른 점〉

씨네플레이

원 플러스 원 같은 거네요.

 

민규동

1+1이라는 잘못된 착오에 근거한 그런 판단으로 저희가 하게 됐죠. (웃음) 해보니까, 스탭이나 배우나 제작진에게도 공동연출이 처음인 거예요. 컨베이어 벨트에 2명을 세우면 두 배로 빠르겠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컨베이어 벨트가 2개로 늘어난 거예요. 두 사람이 다 만족하거나, 두 사람이 합의가 되거나, 설득이 돼야만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 거죠. 두 배로 느려진 거죠. 배우가 두 사람 다 컨펌을 받아야 되니까. 그런데 취향이 다르고 판단이 다르니까 힘들어했죠. 둘이서 얘기하는 시간들이 많아지니까. 그게 영화 현장에서는 쉽지는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빨리해야 되니까, 조건이 너무너무 이제 급한 상황에 쫓기다 보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다 못하고 막 결정해서 나가는 때가 많아지니까. 코엔 형제는 형제잖아요. 저희는 피는 섞이지 않았고요. 다만, 저희가 촬영할 때 숙소를 싱글 침대가 있는 방 하나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한 이불을 덮고 잤죠. 정말 한 사람 비용을 쓴 거예요. 그런데 저희는 너무 오랫동안 같이 많이 잤었기 때문에, 그런 게 어색하지 않고 당연했고. 어떻게 보면, 속편이어서 가능했을 것 같은 불가능한 방식의 제작이었어요. 왜냐하면, 3월에 만나서 ‘합시다’라고 하고, 7월에 촬영에 들어가서 12월에 개봉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당시 <여고괴담> 전편이 굉장히 흥행했기 때문에 (속편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던 거 같고. 그만큼 저희는 자유로웠고, 기이한 형태의 데뷔를 치르게 됐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씨네플레이

그 시기에, 이 두 감독님에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연출을 제안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랍고도 신선해요. 왜냐면 두 감독님이 호러나 스릴러 단편을 만들어서 유명세를 얻은 게 아니잖아요. 말하자면, <노매드랜드>를 만든 클로이 자오 감독에게 <이터널스> 연출을 맡기는 그런 류의 선택인 거 같아요.

 

민규동

그때는 상당히 신선한 시도였던 것 같고. 故 이춘연 대표님께서는 저희가 처음 들어오는 과정을 보고 어디서 젓가락 두 짝이 걸어 들어온다고 하셨어요. 저희가 조감독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시스템도 잘 모르고 그랬었으니까, 참 순진하고 나이브한 어떤 두 어린아이가 들어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고. 그리고 둘 다 공포심이 없는, 거의 유물론자들이어서 그런지 귀신을 잘 안 믿어서 무섭게 만드는 게 뭔 지 잘 학습이 잘 안돼 있었고. 처음 시놉시스를 쓸 때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라는 콘셉트로, ‘두 사람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모티브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여고’와 ‘괴담’ 중에서 괴담보다는 여고에 집중해 보자, 전편과는 다른 신선함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어요. 단편 <허스토리>의 모티프를 확장시켜서 Y2K의 공포의 맥락 속, 고독, 외로움, 자살, 입시에 대한 고민 이외에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던 아픔을 찾아나갔어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촬영 당시의 김태용, 민규동 감독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촬영 당시의 김태용, 민규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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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제안이 왔을 때, 감독님 두 분이 똑같이 오케이를 하셨나요? 혹은 한 사람이 반대해서 설득의 과정이 있었나요?

 

민규동

그 당시에 제가 SF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려고 경기도의 콘도에서 합숙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전화로 <여고괴담>의 속편을 한다는 얘기는 듣지 않았고, <여고괴담>의 프로듀서가 저희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는 우리에게 속편을 맡길 건가,라는 추측만 했죠. 그때는 ‘60년대 일본의 호러영화를 베껴서 흥행 좀 했다고 속편까지 만드나, 안일하다. 충무로 이런 게 문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PD님을 만났더니 속편을 만들자고 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오만하게 이런 거 만들지 마시라, 하면서 타이르고 돌아왔어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죠. 그때 저희를 짓누르던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이었어요. 한 번에 못 봐서, 졸면서 세 번 만에 겨우 완독을 한 영화. 그 길에 돌아오면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처음 한 것 같아요. 나를 영화계로 이끌었던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같은 그런 환상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될까, 아니면 대학교 때 그 큰 극장에서 본 <닥터 지바고>(1965) 같은 그 70mm, 엄청난 스펙터클을 만들어야 될까. 그전까지는 영화를 만들어서 살아간다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단지 무엇이든 만드는 것에 대한 매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데뷔에 대한 질문을 받은 거예요. 한 일주일 정도 후에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이제 1999년이고, 지구도 망할 것 같고. 세상에 뭔가 흔적을 남기면 어떨까, 어떤 물질적인 흔적 변화, 그것에 의미가 있겠다. <여고괴담>이라는 그릇은 못생겨 보이는데, 그릇이 못생겨도 술을 맛있게 담그면 되지 않을까, 해서 일주일 만에 다시 가서 ‘할게요’라고 했죠. 대신 전편과는 배우도 바꾸고, 이야기도 바꾸고. 제목도 <여고괴담 2>가 아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라고 하겠다고 협상을 했죠. 대신 그쪽에서는 세 번은 확실히 무서운 장면을 넣어서 놀라게 해달라고 했어요. 결국은 안 무서운 공포영화로 맹위를 떨치게 되죠. ‘이렇게 안 무서울 수 있나’로 놀래켰죠. 알고 보니, <여고괴담>이라는 게 못생긴 그릇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 영화의 컨벤션과 새로운 지점들을 너무 잘 활용했던 훌륭한 작품이었고 그걸 저희가 잘 못 알아봤던 거예요. 저희가 그런 장르에 대한 학습이 안 됐기 때문에. 오히려 시작하고 나서 공부를 시작했고, 뒤늦게 엄청난 공포영화를 보고 이제 ‘새로운 공포가 뭘까’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었던, 이상한 자만과 확신에 가득 찬 독특한 시절이었어요. 그 당시 발견한 새로운 콘셉트는 그거였어요. 귀신은 죽었을 때 항상 같은 사이즈로 영화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사이즈를 키운 거예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천장 귀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천장 귀신

씨네플레이

영화 속에서 학교 천장에 거대한 귀신이 나오는 게 그런 거군요.

민규동

네. 그리고 살인도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일어나고, 삐걱거리는 마루 계단이 있는 학교가 아니라 아주 세련된 도시적인 학교, 그 대신 네모로 되어 있어서 귀신이 미로처럼 갇히는 학교를 배경으로 갇힌 세계를 배경으로 했어요. 굉장히 깔끔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벌어지는 ‘귀신의 하루 놀이’라는 콘셉트를 찾아갔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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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극장에서 본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가 새롭게 느껴져요. 요즘에는 Y2K 열풍이 다시 불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시 보니, 영화가 너무 힙한 거예요. 영화에 나오는 교환일기장과 같은 스타일의 소품이 요즘 유행하기도 하고요. 남성 감독님의 입장에서, 이런 소품들을 어떻게 구상하셨는지도 궁금해요.

 

민규동

타이틀 시퀀스는 데이빗 핀처의 영화 <세븐>(1995)의 인상이 남아서 그걸 모티브로 만들었어요. 그때 창덕여고에서 우연히 교환일기를 발견했어요. 여고라는 전통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여고에서만 있을 수 있는 소통 방식이 교환일기인 거죠. 그 소통의 내용들이 상당히 내밀했었고, 보통은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원조교제 이야기도 있고, 비망록과 같은 기능을 한 거죠. 그래서 교환일기를 통해 소통을 하는 친구 이야기를 생각했고, 실제로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쓴다면 어떤 교환일기가 탄생할까 싶어서 저희 미술팀의 소품 담당이 직접 다 쓴 거예요. 글의 내용도, 영화 속 캐릭터에 맞춰서 한 사람은 계속 고백을 하고, 한 사람은 대충 피드백을 주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DVD가 나왔을 때는 교환일기를 모두 다 스캔해서 부록으로 넣었어요. 지금 그 교환일기는 영상자료원에 기록물로 보관되고 있어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속 교환일기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속 교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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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생각해 보면, 김태용 감독님과 민규동 감독님은 그렇게 체력이 강해 보이지 않는데요(웃음). 그때는 표준근로계약서가 있던 시절도 아니다 보니, 장편을 하면서 굉장히 빡빡한 일정으로 작업하셔야 했을 텐데요. 현장에서 두 분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몸 져 누우신 일도 있었을 거 같아요.

 

민규동

끝까지 만든 건 사실 그 자체가 기적이죠. 저희가 ‘99’ 였는데요. 저희 두 사람 몸무게를 합쳐서요. 당시에 영화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살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제가 50kg이었어요. 김태용 감독은 40kg 대였고요. 제가 콘티도 밤새 촬영 날 아침까지 직접 다 그렸었고, 처음 학교에서는 여름방학 동안 찍는데, 방학이 끝나면 촬영을 못하니까 안 쉬고 매일매일 찍었어야 했는데, 밤새 준비하고, 스태프들 밥 먹을 시간 동안 1시간 정도 자고, 아침부터 12시까지 찍고 와서 또 다음 날 것 준비하고. 이렇게 잠을 1시간씩 자면서 거의 한 2주 정도 촬영하니까, 중간에 제가 쓰러져서 이제 입원도 하고, 좌초될 위기가 많았었죠. 제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김태용 감독이 찾아와서 영양주사를 맞으면서 옆 침대에 누워서 같이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깨보니 김태용 감독 침대가 피로 가득한 거예요. 피가 역류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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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여고괴담’ 같은데요.

 

민규동

그래서 (배우나 스태프들이) 현장에 오면 감독을 잘 못 찾았어요. 워낙 비실비실하고, 너무나 죽기 직전의 두 얼굴이었기 때문에. 앙상한 상태로 어떻게 버텼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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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영문 제목은 ‘Memento Mori’ 더라고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시리즈물의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작품으로 비치길 원하셨던 것 같은데요.

 

민규동

맞습니다. 부제를 너무나 넣고 싶었고요. ‘여고괴담’으로 통칭되면, 전편의 공포와 비교하며 감상하게 되는데 이 영화가 독특하고 새로운 화두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릴 제목이 있으면 어떨까 싶어서 ‘메멘토 모리’라는 제목을 우겼어요. 그런데 통과를 못 했죠. 라틴어이기도 하고. ‘메멘토 모리’는 ‘네가 곧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으로, 17세기 말 수도승들이 아침마다 나누는 인사 같은 거였거든요. 욕망을 내려놓고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이제 집착도 버리고 좀 더 이제 새로운 삶에 대한 종교적 정진을 할 수 있으니까. 영화 속에서는 ‘내가 왜 죽었는지를 기억하라’라는 뜻으로 쓰인 일기의 한 문구였거든요. 그때, 비슷한 시즌에 제 동갑내기 친구 감독이 있어요. 크리스토퍼 놀란이라고. (일동 웃음) 그 당시, 파리영화제에서 놀란의 <메멘토>(2000)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처음 봤는데, 누구지, 이 친구. 내 영화랑 제목이 비슷한데,라고 했었죠. 라이벌로 조금 더 눈여겨봤어야 하는데. 기억에 관한 비슷한 모티브로 만든 영화가 있었구나. 지금은 길이 많이 달라졌지만.

 

'벡델데이2023' 포스터
'벡델데이2023'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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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님이 한국영화감독조합의 대표로 있으시면서 시행한 기념비적인 일은 ‘벡델데이’가 아닐까 하는데요. 벡델데이는 앨리슨 벡델의 ‘벡델 테스트’를 기반으로 해서, 성평등한 한국 작품들을 조명하는 행사인데요. 올해도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렀고, 꾸준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민규동

(과거에는) 한국영화들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지금은 감독조합 내에 여성 감독 비율이 조금씩 늘고 있는 상황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중적인 상업 영화도 좋지만, 작게 만들어지는 좋은 뛰어난 영화들도 많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들의 지표들을 살피고 자극도 받으면 좋겠다 싶어서 ‘벡델데이’를 기획했어요. 기존 벡델 테스트의 통과 기준은 3개인데, 저희는 7개의 기준*으로 업데이트를 했어요. 실제로 앨리슨 벡델에게 허락을 받아서 ‘벡델데이’라는 이름을 썼고요.

 

*DGK 벡델 테스트 7

①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 나올 것
②1번의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③이들의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이 아닐 것
④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⑤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⑥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⑦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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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님이 조합의 대표로 있으시면서, 창작자에 대한 공정한 보상 시스템에 대한 얘기를 줄곧 해오셨는데요. 작곡가와 달리 영화감독은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고 있죠. 국내 저작권법 자체가 1987년 개정 이후 멈춰 있는데요. 작년에는 시청각물창작자국제연맹(AVACI)의 첫 세계 총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도 했어요. 처음에 감독님이 던진 화두가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어요.

 

민규동

저작법권 개정안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인식의 제고는 이뤄지고 있어요. 감독들이 작품 개런티로만 살아가기는 굉장히 힘든 상황이에요. 개별 감독들의 삶은 불안정성 속에 있어요. 그래서 마치 음악처럼, 자신이 만든 작품이 상영이 될 때 저작권료가 들어오는 시스템들을 들여오면 어떨까 하고 고민하게 됐죠.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춰 볼 때, 우리의 시스템은 발달이 덜 된 것 같아요. 실제로 영화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는 건 지금 일부 나라에서 계약을 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전 세계에서 여러 OTT 플랫폼에 있는 우리나라의 영화들을 보고 계시는데, 감독님들 중에 큰돈을 받으신 분도 계세요. 감독님들이 작은 감동을 받으시더라고요. 어떤 감독님은 5천 원을 받은 거예요. 내 영화를 세계 어디 8000km 너머의 나라에서 누군가는 보고 있다는 것이 감동이라고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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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와 한국영화감독조합이 함께 시작한 ‘한국영화, 감독’ 인터뷰의 마지막 손님인 민규동 감독님을 보내드려야 할 텐데요. 한국영화의 감독으로서, 그리고 한국영화감독조합의 대표로서 마지막 인사 말씀 부탁드릴게요.

 

민규동

<한국영화, 감독>은 너무나 훌륭하고 좋은 기획이고, 또 다른 감독님들과의 인터뷰도 이어져서 많은 분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길 바랍니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