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자가 체육관에 들어선다. 근육을 과시하는 남자들 사이를 관심도 없다는 듯 휙 돌아선 그 여자 데이지의 시선은 화장실에서 우악스럽게 변기를 뚫고 있는 루에게 향한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이렇게 데이지의 등장으로 막을 연다. 영화의 주역은 루(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일지 모르지만, 안나 바리시니코프가 연기한 데이지를 놓쳐서 안되는 이유는 영화 첫 장면부터 명명백백하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딸에서 이제 한 명의 배우로 거듭난 안나 바리시니코프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만나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데이지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행동부터 외면까지 모두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감독님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궁금하다.
데이지에 대한 설명은 대본에 완벽하게 적혀 있었다. 아주 섬세한 디테일까지도. 예를 들면 누런 이라던가 우유를 마시는 것이라던가, 행동이 매우 들떠있는 것까지. 데이지라는 이름도 전형적인 이름이다. 그렇게 대본에서 적힌 데이지가 있는데, 거기에 제가 더하고 싶은 건 이 아이가 살아온 인생 비하인드 같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그런 느낌, 그래서 사랑에 목말라 있고 루에게 굉장히 집착에 가까운 사랑에 빠져있고. 예측불가에 위험한 아이라는 그런 설정에 힘을 줄 수 있도록 표현하려고 했다. 병적이면서 사랑스러운 아이(sickly sweet child)의 이미지를 원했다.


데이지로 출연하는 장면은 대부분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호흡을 맞춘다. 그와의 작업은 어땠는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모두 알다시피 훌륭한 배우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로 활동했기에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지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같이 일하고 싶은, 전혀 까다롭지 않은 동료였다. 꼭 마술을 부리듯 우리가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어서 굉장히 많이 웃으면서 촬영했다. 크리스틴은 당구를 잘하고 전 못하는데 그런 걸로도 분위기를 띄우고, 제가 하는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줬다. 그래서 좋은 케미스트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시간이 있었나?
이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 해보는 연기가 많았다. 이전엔 액션 연기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줘야 하는 몇몇 기술적인 연기에 긴장하곤 했다. 첫날 촬영이 시체로 누워있는 장면이었는데, '그냥 누워있으면 되겠지' 했지만 크리스틴이 모니터를 보고 꼭 해변에 누워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게 해변스럽지 않고 죽은 사람스러운 모습일지 여러 동작을 시도해 봤다. 로즈 글래스 감독님도 그런 부분에 정확한 디렉션을 줘서 도움이 됐다. 또 토하는 연기도 처음 하는 것이었는데, 스태프가 주는 뭔가를 입에 물고 있다가 내뿜기만 하면 되지만 그럴듯하게 카메라에 나와서 이런 게 영화의 마술이 아닐까 싶었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어떻게 보면 사랑 때문에 모든 게 뒤바뀐 사람들의 얘기이다. 사랑 때문에 인생에서 내린 결단 같은 게 있다면. 우정이나 가족애 등을 포함해서.
사랑에 대한 느낌을 이 영화에서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재키가 거인이 되는 그 장면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게 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데이지도 자신이 그렇게 큰 사람이라고 느끼는 장면이 있다. 그것들이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한 첫사랑을 생각나게 했다. 이 사랑은 세상에서 나만 하는 사랑인 것 같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느끼게 했다. 데이지하고 루의 관계를 보면, 데이지가 루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하고 몰두했는지 보인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뭘 해도 정당화될 것처럼 느끼는데, 그게 제가 첫사랑 때 느꼈던 몰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인물들은 뭔가 끊지 못하고 의존하는 것이 있다. 담배나 약 같은. 예를 들면 저도 일할 때 초콜릿에 의존한다. 본인에게도 이런 것이 있는지.
저로선 작다고 할 수 없는 집착이 있는데, 연기에 대한 갈망과 갈증이다. 무대에 서면 더 많은 아드레날린, 이런 것을 갈구하게 된다. 의존적이라기보다 시들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지속적인 갈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인정이나 긍정, 그런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곤 한다. 그것 말고 작은 의존이라면, 저도 초콜릿을 좋아한다. (일동 웃음) 그리고 커피도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이번 영화 전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고른다면?
좋아하는 장면이 너무 많아 고르기 어렵다. 지금 생각나는 장면은 루의 언니와 루가 어떤 사실 때문에 막 싸우다가 루가 "언니 사랑해!" 하고 소리지는 장면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데, 정말 이상한 장면이다. 감정이 고조돼 있으면서 두 자매가 하기 어려운 대화를 주고받다가 분노에 차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그런 농담 같은 순간이 낄 분위기가 아니기에 그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코미디로 완성됐다. 영화가 인물들의 감정적인 진실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그 과정에서 이렇게 재밌는 순간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그렇게 훌륭하게 완성한 데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에 나온 노래 중 평소 좋아했다거나 촬영 후 좋아진 곡이 있을까?
촬영하는 동안 80년대 곡을 많이 들었다. 로즈 글래스 감독의 영리한 선택 중 하나가 전형적인 80년대 곡을 많이 피해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을 풍성하게 사용하면서도 진부한 느낌이 없다. 개인적으로 예고편에 들어간 '스몰타운 보이'(브론스키 비트의 곡)이다. 80년대적이면서 퀴어한 느낌을 주는 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터뷰가 끝나면 '메가토크'로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여기 오게 돼서 정말 감사하다. 한국 관객분들이 영화를 사랑해 주시길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만난 한국 관객들은 정말 열정적이다. 한국은 특히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일부가 된다는 게 기쁘고 영광스럽다. 그분들이 이번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혹시 영화가 마음에 안 드셨더라도 마음에 왜 안 드셨는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기대돼 들뜬다. 개막식 때도 느꼈지만, 이런 장르 자체가 한국 영화감독님들이 잘하시는 장르다. 그래서 관객분들도 조예가 깊을 것 같다. 그런 식견으로 영화를 봐주실 텐데, 그 기준에 만족하는 영화가 되길 바라고 있다.
영화제에서도 상영을 하지만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관객들이 어떤 부분을 좋아할지, 인사말과 함께 전해달라.
한국 관객들에게 특히 어필할 포인트라면 아무래도 이 장르 영화의 매력, 이 스토리가 숨기고 있는 반전들, 그런 것에 반응하시지 않을까 싶다. 제 지인들도 영화를 보면서 놀라는 포인트가 몇몇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같이 봐야 더 재미있는 영화다. 함께 놀라는 포인트가 있는. 그런 재미들을 꼭 즐겨주셨으면 좋겠고. 한국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예술 분야의 열정적인 분위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같이 보는 새로운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서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있고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