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하교한 텅 빈 학교. 쓰레기통에서 찢어진 편지 조각들이 발견된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편지는 현재 상황을 비관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로 가득하다. '(모두에게서) 빨리 잊힐 것이다'라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이것이 유서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후 상황은, 홍콩 영화이지만 어른들의 입에서 나온 그 말들은 우리가 익히 듣던 것들과 매우 닮아 있다. 요즘 아이들은 별나고 가르치기 힘들다는 불평과 대입을 앞둔 시기니 일을 키우지 말라는 회유들.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말이 반복되는 <연소일기>는 국경을 허무는 지독한 현실 구현이다. 좋은 성적이라는 금과옥조 앞, 누가 쓴지도 모를 유서 속 간절한 외침이 설자리는 없다. 이때 한 사람, 피곤한 얼굴과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던 정 선생(노진업)이 편지에 의외의 관심을 보인다. 유서와 학생들의 필체를 일일이 대조하는 열정을 보이고, 유서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아이들 개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유서의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선생은 주인을 찾는 과정에서 학생 저마다가 짊어진 슬픔을 살펴본다. 청각 장애를 이유로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빈센트의 멍든 얼굴과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하고 성실한 반장 황자의 팔뚝에 새겨진 자해의 흔적. 입시 스트레스와 교우 관계, 부모와의 관계 맺음 속에서 학생 모두는 작지 않은 우울 속에서 겨우 나아가고 있었다. 성적과 자기 가치가 동일시되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연소되어 재가 될지언정, '왜' 혹은 '어디로'라는 질문을 감히 하지 못한다. 그가 떠올린 기억 속에도 그런 소년이 하나 있다. 학업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생님, 친구들,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외면받았던 10살 소년 요우제(황재락). 바로 그의 형이다.

명석하고 피아노 연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동생 요우쥔(하백염)에 비하면 요우제(황재락)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반에서 15등이라는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 못하고 유급까지 하는 그는 집안의 수치이자 망신이다. 부모는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을 담아 지어준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하는 요우제를 동생과 비교하며 매 순간 몰아붙인다. 이제 겨우 10살. 부모가 세상의 전부인 요우제는 모든 원인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다. 매번 모두를 실망시키는 스스로가 한심해 최선을 다하지만 피아노 앞 손은 굳어지고, 시험지를 받아 든 몸은 기어코 위액을 게워낸다. 자괴감과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아버지의 매질로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잠이 부족하니 학교에서의 적응도 쉽지 않다. 부모의 기대치에 도달하기 위한 요우제의 노력은 선생님의 꾸지람과 친구들의 비웃음이 되어 허망하게 돌아온다.

폭력적인 아버지, 방관하는 어머니, 그리고 외면하는 동생까지.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요우제가 위로받는 곳은 만화책 「해적 이야기」와 피아노를 가르치는 천 선생님, 옥상이라는 탁 트인 공간이 전부다. 하지만 세상은 이 작은 위안마저도 모두 앗아간다. "힘내! 언젠가는 네가 바라던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 만화가는 세상을 떠나고, 사람마다 재능은 다른 법이라며 유일하게 요우제의 마음을 어루만진 피아노 선생은 해고당하며, 답답한 속 마음을 소리쳐 외치던 옥상은 위험하단 이유로 출입을 금지 당한다. 완전히 고립된 요우제는 우연히 홍콩대를 다니는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을 듣고 무거운 마음을 일기장에 털어놓는다. 꾸준히 일기를 쓰다 보면 홍콩대도 가고 그러면 부모님의 사랑도 받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일기는 소년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연소일기年少日记'의 앞 두 글자의 자리를 바꾸면 '소년일기少年日记'가 된다. 자신의 마음을, 뭐든 꾸준히 써보자 소년은 결심한다.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과 세상에서 소외된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다. 본인이 바라는 모습의 어른이 되길 꿈꾸며 요우제는 공책 한 권에 그의 마음을 빼곡히 채워넣는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정 선생의 현재와 과거를 팽팽히 연결한다. 형 요우제는 일기에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 칭하며 끝내 생을 마감했고, 정 선생의 반 학생도 같은 내용의 유서를 썼다. 요우제와 정 선생의 반 학생들이 몇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성적 제일주의의 병폐가 세대를 걸쳐 공명하는 뿌리 깊은 문제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전한 문제에 절망하기보다는 어른들의 바뀐 태도에서 희망을 엿본다. 과거 요우쥔은 형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정 선생이 된 현재 그는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줄 준비가 된 교육자로 거듭났다. 과거의 상처로 현재를 마주 보지 못해 아홉 살에 멈춰있던 요우쥔은 사랑하는 이에게 숨겨왔던 형의 죽음을 고백하며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한다.

열 살 소년이 남긴 과거 일기장과 학생들의 문제를 고민하는 고등학교 교사의 현재를 오가는 영화는 너무 늦게 성장한 어른들의 반성이자,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라는 불안한 질문으로 시작된 영화는 '어쩌면 홀로 남겨졌던 소년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으로 마무리된다. 아이들의 개성을 인정하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사회, 경청하는 어른이 존재하는 세상은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이다.
<연소일기>의 영어 제목은 <Time Still Turns the Pages>이다. 몇 년 전 감독의 가까운 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노래 ‘So Far Away’의 후렴구에 공감해 지은 제목이다. 가사에서 가져온 제목을 통해 감독은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신인 감독 탁역겸이 메가폰을 잡아 2023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4 홍콩금상장영화제, 2024 홍콩감독조합상에서 연이어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정 선생을 연기한 노진업 배우의 비중이 크지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건 요우제를 연기한 배우 황재락의 순수하고 섬세한 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