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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한국영화가 조우한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

씨네플레이
〈하얼빈〉
〈하얼빈〉

지난해 12월 24일 개봉한 우민호 감독의 신작 <하얼빈>은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영화다. 인간 안중근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서사를 풀어가는 와중에 긴장감 넘치는 스파이영화의 면면을 추구한다. 서사의 동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 이따금 헐겁고 정적으로 가라앉는 빈틈을 채우는 것은 화면과 음악이다. 압도적인 풍광을 아이맥스(IMAX) 사이즈로 담아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세련된 영상미, 비장함의 무게를 더해주며 매 순간 고양된 감정을 더해주는 장엄한 스케일의 영화음악이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로 켜켜이 다가와 우리를 압도한다.

〈하얼빈〉
〈하얼빈〉

​<기생충>(2019)의 홍경표 촬영 감독이 알렉사 65를 잡고 CG에 의존하지 않고 올 로케이션으로 담아낸 영상은, 어둠에 기반해 빛을 사용하는 데 탁월했던 렘브란트의 회화처럼 아름답고, 90년대부터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잊지 못할 OST를 남겨온 조영욱 음악감독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LSO)와 함께 완성한 음악은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기존 클래식 음악의 거장들을 연상케 한다. 영화 초반 펼쳐지는 압도적 규모의 한겨울 전투 씬에서 그 참혹함과 폭력성에 숨죽이고 집중하게 되는 건 무엇보다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시적 폭력성으로 가득한 배경 음악 덕분이다.

〈하얼빈〉
〈하얼빈〉

LSO는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영국 최고의 악단이다. 1904년, 그 시작부터 실력으로 자립이 가능한 음악가들이 당시 소속 오케스트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모여 만든 오케스트라로, 설립은 물론 소유와 그 운영에 이르기까지 단원들이 스스로 프로그램, 지휘자, 공연장소를 결정하고 예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며 영국의 자랑으로 자리매김했다. 한스 리히터, 피에르 몽퇴, 빌렘 멩엘베르크, 에드워드 엘가, 앙드레 프레빈,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마이클 틸슨 토마스,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이먼 래틀 등 전설적 지휘자들이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브래들리 쿠퍼가 주연과 감독을 맡은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 속 명장면, 온몸으로 표현해 내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의 피날레 장면에서 번스타인이 이끌던 오케스트라 역시 LSO로, 이들은 2012년 런던 올림픽의 개/폐막식 연주는 물론, 존 윌리엄스의 지휘로 <스타워즈>를 OST로 남겼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데뷔 음반 ‘차이코프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을 함께 한 오케스트라도 바로 이 LSO다. 1970년 5월, 대타로 섭외된 정경화는 공연을 겨우 몇 시간 앞둔 당일 드레스 리허설에서 처음 앙드레 프레빈의 오케스트라와 조우했고, 당대의 거장 이차크 펄만 대신 투입된 22살의 바짝 마른 소녀같이 어려보이는 동양인이 못 미더웠던 콧대 높은 단원들은 겨우 ⅓ 정도만 리허설에 참석했다. 그렇게 시작된 본 공연에서 정경화는 특유의 음표 하나하나마다 생생한 표정을 짓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경이로운 연주로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며 이 난곡을 연주했다. 제대로 된 리허설을 하지 못했던 오케스트라는 순발력을 발휘해 부랴부랴 정경화의 연주를 따라갔고, 이 팽팽한 긴장감 덕에 역설적으로 이 무대는 역사적 명연으로 남았다. 당시 청중과 평론가들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3주 후 데카에서 바로 레코딩이 잡힐 정도였고 정경화는 유럽 전역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녀의 압도적 실력과 음악적 탁월함 앞에 이미 인종과 국적, 성별과 같은 구분은 무의미했다.  

1970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정경화의 앨범
1970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정경화의 앨범

<하얼빈>에서 유려하게 흘러가는 물살처럼 도도하지만 한없이 자연스럽고, 산뜻하고 화사한 LSO 특유의 색채감이 반짝이는 빛을 흩뿌려주는 덕분에, 유난히 어둡고 배우들의 표정이 가려질 정도로 새까맣게 담긴 화면이 마냥 답답하거나 막막하지만은 않을 수 있었다. 배경이 되는 눈 쌓인 겨울산, 꽝꽝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 폭탄을 구하기 위해 가로질러 가야 했던 광활한 사막의 풍경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기차 내부를 칸칸이 통과할 때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적절하게 감정선을 건드리며 서사를 고조시켜주며 비장함을 보태주는 음악의 덕이다. 

〈하얼빈〉
〈하얼빈〉

드라마에서 주로 연기를 해오던 배우들의 연기를 두고, 누군가는 역시 스크린을 장악하며 압도적으로 극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들은 무리하게 과장된 톤으로 영화를 위한 어색한 연기를 하는 대신, 발성을 달리한다거나 얼굴 근육을 섬세하게 활용하는 식으로 인물을 그려냈다. 영리한 선택이다. 조연이지만 존재감 넘치는 배우들이 든든하게 안정감 있는 발성으로 빈 공간을 매운다. 박정민은 프리스타일을 선보이는 현대 무용수처럼 가장 빼어난 신체 조건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춤을 출 때, 그 움직임이 더해졌을 때 가장 육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며 시선을 사로잡듯, 자유자재로 완급을 조절하며 각기 다른 캐릭터들의 연기가 돋보이게 하는 완충지대가 되어준다. 그가 연기한 우덕순이 밀정인지 독립운동가인지 중간중간 의구심이 드는 것처럼, 그는 회색지대가 되길 자처하며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배우들의 각기 다른 연기톤을 중화시켜준다.  

〈하얼빈〉
〈하얼빈〉

다소 아쉬운 서사의 밀도를 제쳐두고 촬영과 음악의 경이로운 성취만으로도 <하얼빈>은 상영관에서 관람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며, 한국영화가 글로벌 콘텐츠로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혁신, 끝없는 진화, 예술적 탁월함을 위해 몰입하는 태도는 음악과 영화라는 장르를 불문하고 예술가라면 함께 공유하는 가치일 것이다. 한국영화는 이제 세계적 명성의 오케스트라와도 OST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위치를 획득했다. 다가올 미래에는 또 어떤 수준의 음악을 접할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