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24년이 간다. 영화계에서 '쉽지 않다'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 2024년도 이렇게 흘러간다. 그래도 12월은 첫째 주부터 마지막 주까지, 한 주도 빠짐없이 한국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해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보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 와중 기대 이상의 성과에 쾌재를 부르기도, 예상과 다른 반응에 씁쓸하기도 하며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각자의 결과와는 별개로, 이번 달 관객들을 만난 한국상업영화 5편을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각자의 감상으로 다시 돌아보며 2024년 12월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이하 내용은 영화의 개봉일순과 가나다순 기준으로 나열했다.

<1승> 스포츠물에 담긴 삶의 태도와 지침 _ 성찬얼
2024년 기대작으로 뽑을 당시만 해도 <1승>이 이런 영화일 거란 생각은 못했다. 신연식과 송강호란 이름을 단, 1승만 거두길 원하는 '스포츠 언더독' 서사의 영화가 이렇게 상쾌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 이상한 '배신감'은 영화가 시작하고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나 <코리아> 같은 영화를 상상했는데, <1승>은 스포츠만큼이나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데 관심을 쏟는 듯했다. <1승>의 가장 특이한 지점은 '노력'이 빠질 수 없는 스포츠물에서 그 부분을 공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승>은 '노력해서 성공하는' 성실의 메시지보다 '함께 하는 호흡을 익혀가는' 공생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피땀노력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런 쾌감을 희망한 관객에겐 참 큰 배신감이 몰아쳤겠지만 중간쯤부터 영화가 '뭔가 다르다'라고 예감한 관객이라면 이 스포츠물의 탈을 쓴 '지침서'에 도리어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1승>의 또 하나 이상한 점. 이 영화는 다양한 인물을 소개하는 데 비해 이들이 관계를 쌓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공백을 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본가로도 유명한 신연식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공백을 보다니. 꼭 언제든지 이 캐릭터들의 서사를 팬들이 채워주십사 요청하는 것 같다면 과한 감상일까.

<소방관> 그들이 보이지 않았던 뒷모습 _ 추아영
실화 바탕의 재난 영화, 신파를 활용하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곽경택 감독은 정공법으로 승부를 본다. 서사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신파를 최대한 배제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출을 선보인다. 곽경택 감독은 신파 대신에 당시 소방관들의 열악한 환경과 그동안 미디어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소방관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다루는 것에 더 주목한다. 영화 속에서 PTSD를 앓는 소방관들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신입 소방관 철웅(주원)은 소방관의 PTSD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화재로 유독 믿고 의지하던 동료를 잃고 나서 PTSD를 앓는다. 3개월의 휴직 기간을 갖고 복귀했지만, 여전히 꿈속에서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깬다. 정신적인 상처는 드러나지 않게 서서히 진행되다 발견되기도 한다. 늘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베테랑 소방관 기철(이준혁)은 동료를 잃은 슬픔과 화재 구조 현장에서 생기는 극심한 긴장감,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 탈모가 생긴다. <소방관>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그려낸다.

<대가족> 흐름의 최전선에서 의외로 '힙'한 영화 _ 김지연
혼외자, 비혼출산 등의 이슈로 떠들썩한 요즘, <대가족> 만큼 흐름의 최전선에 놓인 영화가 있을까. <대가족>은 의외로 '힙한' 영화다. <대가족>의 시간적 배경은 2000년, 즉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에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관과 새로운 가족관이 충돌하던 과도기적 시기였다. 2000년 언저리의 충돌이 낳은 변증법은 2020년대 들어 비혼출산, 정자기증 등의 또 다른 화두를 생산해냈다. <대가족>은 함무옥(김윤석) 가족의 사연을 통해 그간 한국 사회가 겪어온 가족관의 다양한 충돌들을 다층적으로 담아냈는데, 이를테면 아버지가 바라던 장남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출가한 함문석(이승기)에게서는 가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X세대'의 모습이, 정자를 기증받아서라도 아이를 출산하려 했던 한가연(강한나)의 모습에서는 미래 세대의 모습이, 실질적으로 함무옥의 아내 역할을 하지만 호적에도 못 올라가고, 같은 집안 취급을 받지 못하던 방여사(김성령)에게서는 여성관을 변화시키고 질문하기 시작하는 우리사회 여성들의 역사가 보인다. 굳건한 가부장적 가족주의는 한국사회에서 근 50년간 매우 빠르게 변화했는데, <대가족>의 양우석 감독은 한국사회의 변화를 예리한 눈으로 포착하고 미래 세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처음으로 휴먼 코미디 장르에 도전해 일면 파격적으로 보이는 양우석 감독의 선택이 그 무엇보다 가장 한국적인 영화 <강철비>와 <변호인> 시절의 고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얼빈> 압도적인 자연 속 독립군의 모습 _이진주
지난 18일, tvN 예능 <유 퀴즈 온더 블록>에 출연한 배우 현빈은 영화 <하얼빈>에 대해 ‘관람이 아닌 체험을 하셨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 지점에서 영화 <하얼빈>이 지향하는 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관객이 작품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에 압도되어 감화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 <하얼빈>은 한국 영화 최초로 IMAX 전용 포맷을 제작했고 몽골, 라트비아 등의 대자연을 아리 알렉사 65 카메라(<듄> 시리즈를 촬영한 카메라로 대형 센서를 탑재해 뛰어난 해상도와 레인지를 구현함)로 담아냈다. 여기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음악과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담은 음향이 조화롭게 뒤를 지켜준다. 이렇듯 영화 <하얼빈>은 엄청난 비주얼과 사운드로 관객의 오감을 자극한다.
한편, 이야기와 연출에서는 힘을 뺐다. <영웅>(2022), <밀정>(2016) 등 비슷한 시대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룬 타 작품에 비해 극적 재미를 위한 장치를 적극적으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내부자들>(2015), <남산의 부장들>(2020) 등 우민호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밀당’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민호 감독이 안중근과 독립군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 이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 <하얼빈>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다소 심심한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자그마한 핸드폰 화면을 보는 데에 쏟고 있다면 영화 <하얼빈>이 오히려 새로운 ‘도파민 충전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집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 속 독립군의 모습이 당신을 1909년으로 이끌 것이다.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 진중하고 유려하게 세공한 정통 갱스터의 변주_ 주성철
예상과 달리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하 <보고타>)은 정통 갱스터 장르영화의 변주였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즐겼던 것 같다. 중남미에서 패딩을 팔아 성공한다는 설정 등 이른바 ‘속옷 밀수’를 소재로 했고, IMF 외환위기 이후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야 했던 한 가족의 생존기라는 점에서 쉬이 장르성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 그렇게 최근 우리가 봤던 한국 시리즈 <수리남>이나 <카지노>, 혹은 넷플릭스 시리즈 <나르코스>와는 막연히 다른 이야기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김성제 감독은 <보고타>에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장르의 디테일을 새겨놓았다. 어쩌면 그의 전작이자 연출 데뷔작이 2009년 1월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해온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며 발생했던 용산참사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소수의견>(2015)이어서 그런 추측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고타>는 1920-3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들처럼, ‘국가 부도의 날’인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소수의견>과 그리 멀지 않은 방식으로 이번에도 역시 ‘영향 아래의 남자들’을 다룬다. 송중기가 연기하는 ‘국희’는 보기와는 달리 ‘짱돌’ 같은 단단함으로, 조직 내에 들어가 갱스터 장르의 주인공처럼 승승장구한다. 진짜 아버지는 약과 돈에 찌들고 유사 아버지와 맺는 관계도 지극히 장르적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와 맞물려 가장 먼저 촬영이 시작됐지만, 오히려 이후에 촬영에 들어간 영화 <화란>(2023)과 <로기완>(2024)보다 뒤늦게 개봉하게 됐다는 것이 그런 송중기의 변신을 덜 새롭게 보이게 만든다는 것만 빼고는, <보고타>는 꽤 진중하고 유려하게 세공하는데 성공한 장르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