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동물로 변하기 시작했다면? 토마스 카일리 감독의 영화 <애니멀 킹덤>은 이 낯익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프란츠 카프카의 중편 소설 「변신」의 모티프를 빌려온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니 거대한 바퀴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처럼 영화 속 인물들도 갑작스럽게 동물로 변하는 변이를 마주한다. <애니멀 킹덤>은 동물로 변해가는 사람과 소중한 사람의 변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내린 선택의 과정을 그려낸다. 다만 <애니멀 킹덤>의 판타지는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2019년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토마스 카일리 감독은 몇 주 후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정상의 기준이 바뀐 세상을 마주한다. 영화 속 동물로 변해 격리된 사람들과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일상이 중단되었던 지난 몇 년을 떠올릴 수 있다. <애니멀 킹덤>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나와 괴물로 규정되는 타자,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드러내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것을 허물어 버린다. <애니멀 킹덤>은 1월 22일에 개봉한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는다. 사랑하는 엄마가 수인으로 변해버린 변화를 마주한 사춘기 소년 에밀(폴 키르셰). 아내를 격리 수용소에 보내고 혼자 남은 프랑수아(로망 뒤리스)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는 에밀과 함께 아내의 호전을 위해 자연에 닿은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그곳에서 에밀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마주한다. 동물이 된 사람들을 두려워하던 에밀은 자신도 그들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에밀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변화를 숨기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려 한다.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영화 속 세상은 혼란스럽다. 사람들은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변이된 괴생물체를 수용소에 격리하고, 경찰과 군인들은 그들을 마주하는 즉시 잡아넣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더 나아가 혐오하기도 한다. 반쯤은 동물이 되어 야생에서 살아 나가야 할 그들은 더 이상 존중을 받지 못하고 괴물로 추방된다. 점차 새로 변하는 픽스(톰 메르시에)는 사람들의 차별과 폭력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캐릭터다. 격리 수용소에서 빠져나온 픽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그의 얼굴은 멋대로 수술을 진행한 수용소의 의사들에 의해 일그러져 있다. 그의 망가진 얼굴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함을 표상한다. 하지만 동물이 된 그들의 권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일방적인 격리는 문제의 해결 방법이 되어 주지 못한다. 문제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그들의 가족과 같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동물이 된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애니멀 킹덤>은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와 공생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영화다.

인간이 퍼져 가는 변이 바이러스를 막지 못하는 작중의 세계는 기존 인류의 종말을 그리고 있다. 다만 감독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전형적인 서사를 쓰지 않기 위해 변화를 꾀한다. 토마스 카일리 감독은 “환경 문제에 있어서 비상사태인 작금의 상황 속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의 교감을 탐구하는 새로운 내러티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서 그는 “자기 반복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나 세상의 종말을 다루는 이야기를 다시 만들기보다는 새로운 지평을 상상했다”고 덧붙였다.
토마스 카일리의 영화는 인류의 종말을 그리면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 나아가 자연의 공생 관계에 대해 논한다. 오랫동안 인간은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해 왔다. 이러한 인간의 도구적 자연관은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했고, 지구의 지질 환경과 기후를 변하게 만든 새로운 지질시대 인류세를 초래했다. 토마스 카일리 감독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모든 이분법적인 구분을 타파하는 현대 철학인 신유물론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이번 영화를 만든다. <애니멀 킹덤>은 이분법을 타파하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인류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또한 <애니멀 킹덤>은 에밀과 프랑수아 두 사람이 직면한 변화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는다. 둘은 여정의 끝에서 성장한다. 영화는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감자칩을 먹고 있는 에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프랑수아는 에밀에게 소금과 식품첨가물이 과하게 든 감자칩을 많이 먹지 말라고 말한다. 또 그는 에밀에게 알루미늄이 많이 들어 있는 세면도구의 사용을 만류하기도 한다. 프랑수아는 책임감 있고 친구 같은 아빠의 면모를 보이지만, 지나치게 해로운 것과 해롭지 않은 것을 구분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아들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그는 아내와 아들의 변화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낡은 가치관을 바꾼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밀과 프랑수아는 에밀의 변이를 눈치챈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숲으로 향한다. 이때 에밀은 프랑수아에게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게 한다. 가족과 함께 간 스키장에서 프랑수아는 산의 정상보다 리프트의 기계적 움직임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때 에밀은 당시 프랑수아의 말을 전하며 놀라움을 뜻하는 여러 단어(예: merveilleux(불어, 굉장한, 놀라운), magnifique(불어, 장엄한, 멋진))를 두고, ‘sublime’(불어, 숭고한)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는 기계의 움직임을 보고 단순한 감정의 차원에 있는 놀라움이 아닌 숭고를 표현했다. 철학자 칸트는 숭고를 인간의 인식으로 다 헤아리기 힘든 자연의 광활함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나 감정의 개념으로 말한 바 있다. 프랑수아는 이를 자연이 아닌 기계에 대입한다. 인류는 근대를 지나면서 자연과 기계문명의 이분법을 더 두드러지게 받아들였다. 에밀의 이야기는 프랑수아 또한 과거 자연보다 기계에 더 찬탄을 하는 사람이었음을 드러낸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프랑수아는 “내가 바보였다”고 말하며 자신의 옛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그런 그는 가족의 변화를 통해 자연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시 재정립한다.

영화 속에서 변이를 겪은 사람들은 여러 인물들에 의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곧 그들에 대한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프랑수아와 동물권을 내세우는 에밀의 친구는 그들을 ‘créature’(자막 상으로는 ‘수인’)로 부르고,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bête’(자막 ‘짐승’) 혹은 ‘monstre’(자막 ‘괴물’)로 표현한다. 토마스 카일리 감독은 영화 속 타자를 ‘créature’로 부르면서 비-인간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고찰하는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의 사유를 빌려 온다. 그녀는 자신의 책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를 모두 ‘크리터’로 정의한다. 그녀의 크리터는 동물도 인간도 아닌 경계가 모호한 존재로 지구상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일컫는다. 영화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있는 그들도 마찬가지로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다. 새의 몸에 적응하지 못한 픽스가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밀과 그의 모습, 프랑수아가 에밀의 변화 과정과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은 이분법의 구분에서 벗어난 진정한 공생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