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피엔드>에서 가장 짠한 인물 중 하나는 바로 교장 선생이다. 오랜 꿈이었던 노란색 스포츠카 닛산 페어레이디를 사자마자 불량한 학생들로 인해 세로로 세워졌으니, 아무리 교권이 추락했다지만 너무 지나친 일 아닌가. <분노의 질주: 도쿄 드리프트>(2006)에도 등장한 이 차는 2인승으로, 렉서스나 롤스로이스 같은 대형 세단이 아니라 닛산 페어레이디를 좋아하는 교장은 꽤 흥미로운 캐릭터다. 자, 그런데 ‘닛산 페어레이디를 좋아하는 교장’이라는 설정은 그를 연기한 배우가 사노 시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오타쿠 배우’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거꾸로 세워진 닛산 페어레이디를 보고 가장 고통받을 만한 중견배우가 누구일까, 떠올려 보면 바로 사노 시노다.

영화배우로서 사노 시로의 과거는 1980~1990년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하야시 카이조와 기타노 다케시라는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감독의 영화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로 그 두 감독의 데뷔작에 모두 출연한 것. 1955년생인 사노 시로는 미술학교 출신으로 극단 활동을 통해 전업 배우가 됐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하야시 카이조의 장편 데뷔작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1986)로 그 역시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유괴당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 딸을 찾아다니는 우오츠카 탐정 역할이었는데, 필름 누아르 스타일과 몽환적인 흑백 화면으로 무성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이 영화에 수많은 씨네필들이 열광했다. 일본 고전영화의 팬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 같은,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기모노를 입은 여성을 등에 업고 벚꽃이 날리는 거리를 걷는 아름다운 흑백 장면의 주인공이 바로 사노 시로다.


역시 기타노 다케시가 주연과 연출을 겸한 장편 데뷔작 <그 남자 흉폭하다>(1989)에서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여동생을 둔 아즈마 형사(기타노 다케시)의 상관인 경찰서장 요시나리로 출연했다.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즈마 형사에게 “내가 이곳에 근무하는 동안만이라도 말썽 피우지 마!”라며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한국영화에도 출연한 적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2011)에서 타츠오(오다기리 조)의 아버지가 바로 그였다.


1992년과 1993년 각각 TBS 드라마 <쭉 당신을 좋아했다>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를 통해 일약 대스타가 된다. 두 드라마는 <쭉 당신을 좋아했다>에서 조연이었던 캐릭터 후유히코(사노 시로)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자, 이야기 전개를 바꿔서 아예 사노 시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속편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가 만들어지게 된 것. 점잖고 말쑥해 보이는 얼굴 뒤로 광기를 숨긴 그 특유의 연기는 이후 그의 캐릭터를 대표하는 것이 됐다. 가령 <해피엔드>에서도 학생들이 교장실을 점거했을 때, 교장이 학생들에게 스시 도시락을 건네는 장면을 보면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혹시 독약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은 바로, 앞서 얘기한 것처럼 오타쿠 배우로서의 면모다. 일단 그는 일본 연예인 중에서 대표적인 ‘고질라 광팬’으로 통한다. 실제로 <고질라 2000 밀레니엄>(1999)의 CCI(위기관리국) 미야사카 교수, <고지라 모스라 킹기도라 대괴수총공격>(2001)의 방송국 부장 등으로 시리즈에 출연하기도 했다. 심지어 1954년 만들어진 최초의 <고지라>에 관한 연구 도서에 고지라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혼다 이시로 감독과 대담을 진행했을 정도다. 그 외 <울트라맨>이나 <20세기 소년> 시리즈, 그리고 전대물과 특촬물의 팬으로서 <해적전대 고카이저 VS 우주형사 갸반>(2012)을 비롯해 <기사룡전대 류소우저 더 무비: 타임 슬립! 공룡 패닉!!>(2019)에서 최종 보스 발마 역을 맡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괴수나 요괴, 더 나아가 괴담과 SF 소설 등에 해박하여 관련 예능 프로그램의 패널로 자주 출연하기도 한다.

2007년 시작한 후지TV의 인기 드라마 <갈릴레오>도 빼놓을 수 없다.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신참 여형사 우츠미 카오루(시바사키 코우)가 기이한 사건을 풀어나가는 추리 드라마인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에 더해 한국에서도 <용의자X>(2012)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용의자 X의 헌신」 등을 더해 ‘갈릴레오 시리즈’라 부른다. 혹시 사노 시로가 이 시리즈의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했냐고? 그게 아니라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유카와 마나부 캐릭터를 만들 때 사노 시로를 모델로 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탐정 갈릴레오」의 문고판 서평을 쓴 사람이 바로 사노 시로다. 그 외 그는 음악도 한다. 기타리스트로서 자신의 밴드와 함께 후지 록 페스티벌에도 참가한 적 있을 정도로, 현재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sanovabitch) 프로필 사진이 바로 기타를 든 모습이다.


2021년 4월에는 건강 악화로 TBS 드라마 <리코카츠>에서 안타깝게 하차하는 일도 있었다.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증 진단을 받으면서 출연 중이던 드라마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 다행히 치료에 전념하여 같은 해 12월에 퇴원하면서, 2022년 3월에 공개된 록밴드 쿠루리의 ‘러브리스’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복귀를 알렸다. 이후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며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해피엔드>다. 내한 당시 씨네플레이와 인터뷰를 가졌던 네오 소라 감독의 이야기에 따르면, <해피엔드>의 ‘오타쿠 교장’으로 그를 캐스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영화의 전체 톤이 푸른색, 푸른 세상이니 눈에 띄게 노란색 스포츠카로 갔어요. 교장 선생님 역을 한 배우분이 좀 어린애 같은 부분이 있거든요. ‘울트라맨’을 좋아하세요. (웃음) 그래서 교장 선생님 같은 권력자들도 알고 보면 그 안에 어린애 같은 부분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