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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 노동자에게 바치는 상" 아메리칸드림에 가려진 미국의 민낯을 들추는 션 베이커의 영화들

추아영기자
션 베이커 감독
션 베이커 감독


2024년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광은 미국의 션 베이커 감독에게 돌아갔다.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Anora)는 거장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노라>는 그의 전작 <탠저린>과 같이 성 노동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미국의 성 노동자 여성 아노라가 러시아 올리가르히(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신흥재벌로 떠오른 세력)의 아들과 결혼할 계획을 세우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상황을 다루는 로맨스로 유쾌하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선보인다.


국내에서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널리 알려진 션 베이커 감독은 줄곧 하층민에 속하는 이민자와 성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왔다. 그들이 주인공인 리얼리즘 드라마 또는 코미디 영화는 미국인의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기념하며 전작들을 돌아보았다.



<스타렛> (2012)
 

〈스타렛〉 포스터
〈스타렛〉 포스터


제인(드리 헤밍웨이)은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에 사는 금발의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스타렛’이라는 이름의 치와와를 기르며, 친구 멜리사와 함께 그녀의 남자 친구 마이키의 집에서 살아간다. 멜리사와 마이키는 매일 마리화나와 게임에 빠져 살며, 자신들의 싸움에 제인을 자주 끌어들인다. 어느 날, 제인은 동네의 벼룩시장에서 괴팍한 미망인 할머니 세이디(베세드카 존슨)가 팔고 있던 오래된 보온병을 구매한다. 집으로 돌아온 제인은 보온병을 씻다가 병 안에 들어있는 만 달러의 지폐를 발견한다. 곧장 세이디의 집을 찾아가서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세이디는 “환불은 안 된다”며 그녀를 문전박대한다. 얄팍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제인은 세이디를 위해 돈을 쓰려고 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여성의 우정이 시작된다.
 

(왼) 제인 / 세이디
(왼) 제인 / 세이디


제인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는 미국의 포르노 제작의 중심지다. 영화는 중반에 이르러서야 제인이 포르노 배우임을 일러주며, 그전까지는 이에 관한 단서를 곳곳에 흩뿌려 놓는다. 제인이 키우는 치와와의 이름 ‘스타렛’은 스타를 꿈꾸는 신진 여배우를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의 젊은 여성들이 포르노 스타를 꿈꾸며 샌 페르난도 밸리에 몰려들었듯이 제인도 그중 한 명이다. 그곳에서 제인과 같은 일을 하는 멜리사, 마이키 또한 전적으로 포르노 산업의 톱니바퀴로 존재한다. 그들은 대체로 제인처럼 무기력하고 삶의 목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거나 멜리사와 마이키처럼 중독에 의지한다. 그들에게 포르노 제작은 돈벌이 외에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가 1970년대 포르노 산업의 흥망성쇠를 다루며 그 밑바닥을 전면적으로 드러냈다면, <스타렛>은 세대가 다른 두 여성의 드라마 속에서 넌지시 드러낸다.



<탠저린> (2015)
 

〈탠저린〉 포스터
〈탠저린〉 포스터


자신이 쓴 대본을 연출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션 베이커 감독은 직접 쓰지 않은 영화에 고용된 감독으로 일하는 것을 꺼렸다. <스타렛>에 이어 <탠저린>도 그가 직접 쓴 각본으로 트랜스젠더 매춘부의 세계를 담았다. 자금 조달이 충분치 않았던 <탠저린>은 <스타렛>에 들어간 예산의 절반도 안 되는 비용(117,500달러 미만)으로 제작했다.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고가의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에는 어려웠고, 션 베이커는 촬영 방법을 고심한 끝에 영화를 iPhone 5s의 카메라를 개조하여 촬영했다. 이 혁신적인 촬영 방법으로 인해 <탠저린>은 가장 적합하고 개성 있는 룩을 입게 되었다.
 

(왼) 알렉산드라 / 신디
(왼) 알렉산드라 / 신디

 

트랜스젠더 여성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는 감옥에서 출소한 지 24시간 만에 드라마 한 편을 찍는다. 감옥에서 28일을 보내고 나온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도넛 가게에서 그녀는 절친 알렉산드라(마이아 테일러)로부터 남자 친구 체스터(제임스 랜슨)의 소식을 듣는다. 바로 신디가 없는 동안 체스터가 “진짜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을. 분노한 신디는 당사자를 잡아서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LA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신디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LA 다운타운은 온통 술렁인다.


<탠저린>은 201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 후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두루 받았다. 아이폰 촬영으로 인해 카메라 장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고, 이러한 자유로운 촬영 방식은 신디가 LA 다운타운 곳곳을 누비는 스토리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또한 <스타렛>에 이어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LA 다운타운을 드러냈다. 션 베이커 감독은 10단 자전거를 타고 배우들 주위를 빙빙 돌며 촬영하며 현란한 카메라워크를 선보인다.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에 에너지를 더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디의 성격을 살려주기도 한다.


<레드 로켓> (2021)
 

〈레드 로켓〉 포스터
〈레드 로켓〉 포스터


션 베이커의 시선은 <스타렛>의 포르노 여배우, <탠저린>의 트랜스젠더 매춘부의 세계를 거쳐 LA에서 쫓겨나고 은퇴한 포르노 남자 배우에게로 옮겨 간다. <레드로켓>은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고향 텍사스에 돌아온 전직 포르노 배우 마이키(사이먼 렉스)가 다시 재기를 꿈꾸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LA에서 빈털터리가 된 채로, 고향으로 돌아온 마이키는 별거 중인 아내 렉시와 장모 릴을 찾아간다. 그는 월세를 분담하는 조건으로 방을 내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한다. 렉시와 릴은 마지못해 마이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의 텍사스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키는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10대 소녀 레일리(수잔나 손)에게 빠지게 된다. 그는 그녀를 이용해 다시 LA에서 재기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왼) 레일리 / 마이키
(왼) 레일리 / 마이키


<레드 로켓>에서 션 베이커 감독은 이제껏 성 노동자들에 대해 취해왔던 관용적인 태도를 감추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션 베이커 감독은 하층민의 삶을 살아가는 홈리스나 이주민, 매춘부의 일상을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왔고, 그들의 삶에 섣불리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관조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그의 영화는 살아갈 기반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는 취약한 인물의 모습으로 미국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레드 로켓>에서도 이어가지만, 상식과 윤리를 상실한 주인공 마이키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LA에서 쫓겨난 그가 다시 돌아온 고향 텍사스는 다시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만난 10대 소녀 레일리에게 흑심을 품고, 그녀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며 끝내 인간성을 상실한다. 마이키는 벌거벗은 채로 텍사스에서 쫓겨나고, 정유 공장을 지나 레일리에게로 달려간다. 그의 뒤편으로 멀어져 가는 정유 공장은 마이키가 블루칼라 계층에도 속하지 못하며 사회에서 추방당할 것임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