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야쿠쇼 코지와 빔 벤더스 감독은 모두 수십 개의 필모그래피를 보유한 베테랑 영화인이다. 그들의 영화 취향은 일정 부분 겹치기도 하는데, 바로 일본 영화에 대한 사랑이 그 교집합일 것이다. 그 교집합이 빚어낸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최근 국내에서 5만 관객을 돌파했다. 독일 감독 빔 벤더스 연출, 일본 배우 야쿠쇼 코지 주연이라는 이 독특한 합작은 마치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작품력을 인정받은 덕분에, 분명 소박하고도 의미 있는 흥행을 거뒀다.
미국의 DVD, 블루레이 제작사 ‘크라이테리온 컬렉션’(criterion collection)은 그들의 유튜브 채널에 ‘Closet Picks’(서가 픽)이라는 콘텐츠를 업로드하는데, 이는 감독과 배우 등 영화인들이 DVD(혹은 블루레이)가 가득한 서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꼽는 콘텐츠다(유사한 콘텐츠로 프랑스의 ‘Konbini’에서 진행하는 ‘Video Club’이 있다). 그렇다면, 야쿠쇼 코지와 빔 벤더스가 담은 영화를 알아보자.
야쿠쇼 코지
구로사와 아키라의 <붉은 수염>(1965) <살다>(이키루, 1952)

일본의 베테랑 배우로서, 구로사와 아키라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쿠쇼 코지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붉은 수염>과 <살다>(원제는 ‘이키루’이지만 국내 개봉명은 ‘살다’)를 집어 들곤 그와 관련된 추억을 회상했다. 그가 어렸을 때, <살다>를 막 보고 온 그의 형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고, 자신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야쿠쇼 코지가 마침내 자신도 어른이 되어 관람한 <살다>는 그의 형이 들려준 이야기와 정말 똑같았다고 하며, 그의 형이 영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음에 놀랐다고 한다.
<할복> (고바야시 마사키, 1962)

‘하라키리’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영화 <할복>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무라이 영화다. <할복>의 주연은 배우 나카다이 타츠야가 맡았는데, 나카다이 타츠야는 야쿠쇼 코지의 첫 연기 스승이었다. 야쿠쇼 코지는 <할복>을 담으며 “그가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며 나카다이 타츠야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야쿠쇼 코지는 <할복>의 리메이크작인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미이케 다카시, 2011)에 출연하기도 했다.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1997)

“내가 이 영화에 나온다”라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큐어>를 집어 든 야쿠쇼 코지는 “사람의 심리에 접근하는 굉장히 무서운 영화”라고 영화를 요약했다. 그러면서 “영화 내내 섬뜩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정말 무섭다.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영화다. 정말 추천한다”라고 덧붙였다. <큐어>는 국내에서 지난 17일 재개봉했다.
<시티 라이트> (찰리 채플린, 1931) <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 1984)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말이 없다. 말보다는 눈빛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특히나,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장면에 담긴 야쿠쇼 코지의 얼굴은 백 마디 대사보다 많은 것을 표현한다. 그런 그가 무성영화 <시티 라이트>를 집어 든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를 두고 “몇 번이나 봐도 좋은 영화”라고 말한 야쿠쇼 코지는 “영화에서는 대화가 중요하고, 말이 가진 힘이 크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이 아닌 비주얼에 의존한다”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야쿠쇼 코지는 서가에서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를 집어 들며 “내가 빔 벤더스 감독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파리 텍사스>를 통해서였다”라며, 정말 아름다운 영화라고 평했다. 더불어, 그는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굉장히 적다. <퍼펙트 데이즈>에서 나(히라야마)도 굉장히 대사가 적었다”라며 빔 벤더스와의 작업을 회상했다.
빔 벤더스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 이야기>(1934), <부초>(1959)

빔 벤더스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은 닮아 있다. 아니, 빔 벤더스가 오즈 야스지로를 너무나 사랑해 그를 닮고 싶어 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의 신작 <퍼펙트 데이즈>는 오즈 야스지로를 향해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작품이기도 한데, 빔 벤더스는 이전부터 작품을 통해 오즈 야스지로를 향한 존경심을 표현해왔다. <도쿄가>(1985)는 빔 벤더스가 오즈 야스지로의 발자취를 따라 도쿄로 향한 다큐멘터리다. 그런 그가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의 서가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을 집어 든 것은 당연할 터. 물론, 빔 벤더스는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 이야기>(1934)와 <부초>(1959)를 보곤 “이미 집에 있으니 다시 가져가진 않겠다”라며 덕후다운 면모를 뽐냈다.
<다운 바이 로>(짐 자무쉬, 1986) <아름다운 직업>(클레어 드니, 1999)

지금은 거장이 된 많은 영화인들은 맨 처음 빔 벤더스의 보조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빔 벤더스는 짐 자무쉬의 <다운 바이 로>를 두곤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one of my all-time favorites)라고 말했는데, 짐 자무쉬는 빔 벤더스와 인연이 깊은 감독이기도 하다. 빔 벤더스는 짐 자무쉬의 장편 데뷔작 <영원한 휴가>를 매우 인상 깊게 보고는, 짐 자무쉬의 두 번째 장편영화 <천국보다 낯선>을 완성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2016)과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가 사소한 일상의 반복이라는 공통된 테마를 지닌 것은, 그들이 아마 비슷한 취향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아름다운 직업> 등을 남긴 거장 감독 클레어 드니 역시 빔 벤더스의 보조로 영화를 시작했다. 빔 벤더스는 클레어 드니가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 조감독이었다고 밝히며, “과장하는 게 아니라, 두 영화 모두, 클레어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클레어 감독에게 공을 건넸다.
<카게무샤> (구로사와 아키라, 1980)
“거부할 수가 없네. 구로사와 아키라는 장인이다!”라며 홀린 듯 <카게무샤>를 집어 든 빔 벤더스. 물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은 많은 영화감독들이 즐겨 찾는 참고의 대상이지만, 빔 벤더스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날씨를 어떻게 영화에 담는지를 공부하라면서,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특히 영화에 눈이나 비 등을 담고자 한다면, 구로사와 아키라를 모두 보기 전에는 하지 마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세상 끝까지>(빔 벤더스, 1991)

빔 벤더스가 꼽은 자신의 최고작은 무엇일까. 빔 벤더스는 자신의 작품 <이 세상 끝까지>의 감독판을 집어 들곤 “항상 말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것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 중 하나다. 내가 평가할 수 있겠냐마는”이라고 말했다. 다만, SF 영화 <이 세상 끝까지>는 다소 엇갈린 반응을 낳은 작품이기도 하다. 빔 벤더스는 배급사의 요청에 따라 러닝타임을 줄인 극장 개봉 버전의 <이 세상 끝까지>를 탐탁지 않아 했고, 개봉 2년 후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에서 무려 287분(약 4시간 30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이 세상 끝까지>의 감독판을 발매하게 됐다.
<당나귀 발타자르> (로베르 브레송, 1966)

‘평생 딱 하나의 영화만 볼 수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한 빔 벤더스의 답은, 바로 <당나귀 발타자르>다. 한편, 빔 벤더스는 ‘Closet Picks’라는 코너명도 정립되지 않았을 시절, 그러니까 2012년에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의 서가에 방문해 많은 DVD(당시만 해도 블루레이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를 담아 갔다. 그러나 으레 많은 수집가들이 그렇듯, 이미 DVD로 보유한 작품이더라도 블루레이 버전까지 수집하고픈 욕구는 빔 벤더스에게도 동일하다. 빔 벤더스는 <당나귀 발타자르>의 DVD, VHS까지 다 있다면서도 “여기서 마침내 세 번째로 블루레이를 들고 간다”라며 흔한 수집 덕후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