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침내, 강림했다. '마블 예수'를 자처한 데드풀이 울버린과 칼에 칼을 맞대고 돌아왔다. 7월 24일 개봉한 <데드풀과 울버린>은 2016년 <데드풀>과 2018년 <데드풀 2>의 속편이자, 20세기폭스가 디즈니에 인수된 이후 처음으로 제작한 데드풀 실사영화다. 자연스럽게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합류하는 내용일 줄 알았건만, 데드풀답게 20세기폭스를 떠나보내는 고별식을 멋대로 치르는 모양새다. 이번 영화는 20세기폭스에서 제작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온갖 요소를 넣어 애정을 표하고 있으니, 오래전부터 20세기폭스표 마블영화를 본 관객으로선 '안너드'인 관객들에게 이것들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슈퍼히어로영화는 MCU만 본 관객에게, 왜 옆자리 안경 쓴 관객(이라고 돌려 말하는 나)이 혼자 히죽히죽거렸는지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당연하게도 아래 내용은 <데드풀과 울버린>의 관련 내용을 일부 포함하며, 웬만한 관객들은 다 봤을 <엑스맨> 유니버스 작품들은 다루지 않는다(<로건> 포함).
<엘렉트라>

누군가 그랬다. 망하는 것도 제대로 망해야 기억된다고. <엘렉트라>가 그런 케이스다. 여성 슈퍼히어로를 내세운 영화 중 정말 크게 망한 작품이 있어서, <엘렉트라>의 실패는 거의 20년이 지나자 많이 잊혔다. 슈퍼히어로영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DC와 마블은 비슷한 시기에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2004년 <캣우먼>(DC)과 2005년 <엘렉트라>(마블)다.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큰 그림은 훌륭했지만 두 영화 모두 처참하게 망한 탓에 저변을 확대하려던 영화가 여성 슈퍼히어로영화의 씨를 말려버리고 말았다.
사설이 길었는데, 그렇기에 <데드풀과 울버린>이 엘렉트라(와 제니퍼 가너)에게 보내는 애정은 사실 놀라울 정도다. 다른 몇몇 슈퍼히어로야 엑스맨에 몸담고 있다던가 나름의 팬덤이 확실한 편인데, 엘렉트라는 영화부터 <데어데블>의 스핀오프였기에 상대적으로 관심도나 인기도 낮은 편이었다. 그런 그를 이번 영화에서 꽤 중요한 조력자로 묘사하고, 버려진 변종으로서 서사를 일단락 지은 것은 배우에게나 팬들에게나 무척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극중 언급하듯 데어데블, 벤 애플렉이 나오지 않은 건 다소 아쉬운 지점. 추측하자면 벤 애플렉이 히어로영화의 실패를 떠올리기 싫어서, 혹은 최근 제니퍼 로페즈와의 재혼으로 제니퍼 가너와의 출연이 망설여져서 거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블레이드> 시리즈

정말 몇몇 관객들에겐 이 캐릭터의 등장이 뜬금없었을지 모른다. 반면 이 캐릭터가 걸어들어오는 순간 환호를 참지 못한 관객도 있었으리라. 블레이드, 웨슬리 스나입스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이어진 <블레이드> 시리즈에서 블레이드로 활동했다. 블레이드는 반인반흡혈귀로 태어나 뱀파이어의 약점 햇빛과 마늘을 극복한 초인적인 뱀파이어 사냥꾼이다. 당시 영화만으론 알 수 없지만 <블레이드> 또한 마블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다. 현재 MCU는 마허살랴 알리를 새로운 블레이드로 기용해 신작을 준비 중인데(<이터널스> 쿠키에서 관련 떡밥도 있었다), 팬데믹과 파업 등으로 현재까지 제대로 촬영도 시작하지 못했다. 이런 시점에 <데드풀과 울버린>에서 웨슬리 스나입스 블레이드를 보니 더욱 반갑고 기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웨슬리 스나입스가 MCU의 영화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건 라이언 레이놀즈가 <블레이드 3>에서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3편에서 라이언 레이놀즈는 블레이드의 조력자 한니발 킹으로 합류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데드풀 같은 캐릭터를 하고 싶어서 한니발 킹 역을 맡았던 건가 싶을 만큼 수다쟁이에 능청맞은 캐릭터. 이렇게 시리즈의 마지막을 같이 한 두 배우가 정확히 20년 만에 영화에서 얼굴을 맞댔으니, 팬이라면 터져 나오는 박수를 참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갬빗


<데드풀과 울버린>은 팬들을 위한 영화이지만 동시에 20세기폭스가 남기고 간 미련을 해소해주는 영화이다. 어떻게 보면 라이언 레이놀즈가 멀티버스 설정을 토대로 동료들의 한풀이를 해준 셈인데, 특히 채닝 테이텀이 한풀이를 제대로 했다. 채닝 테이텀은 이 영화에서 레미 르보, 보통 갬빗이라고 부르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갬빗은 <엑스맨> 캐릭터인데, 시리즈를 다 봤어도 그의 등장이 낯설었을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채닝 테이텀의 갬빗은 매번 논의만 됐지, 실제로 나온 적이 없으니까.
때는 20세기폭스와 <엑스맨> 시리즈가 건재하던 2010년대,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 갬빗(테일러 키취)을 출연시킨 20세기폭스는 갬빗을 주인공으로 한 단독영화를 기획했다. (당시만 해도 울버린 같은 단독영화 기획이 많았는데, 그중 매그니토 단독영화가 훗날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기획으로 활용됐다) 티켓파워를 고려했는지 테일러 키취 대신 채닝 테이텀을 갬빗으로 발탁했고, 테이텀 또한 제작에도 참여하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유로 제작 일정이 계속 밀렸고 디즈니의 20세기폭스 인수가 진행되면서 전면 제작 중단됐다. 채닝 테이텀 입장에선 거듭되는 제작 연기에도 반드시 참여할 것이라고 애정을 보였으니, 더욱 뼈아픈 무산이었을 터.

그래서인지 <데드풀과 울버린>은 처음 등장한 캐릭터인 채닝 테이텀의 갬빗을 카메오로만 쓰지 않고 활약할 시간을 줬다. 라이언 레이놀즈도 <엑스맨 탄생: 울버린> 촬영 당시 캐릭터가 망가지면서 하차한 전적이 있으니, 맡고 싶은 캐릭터를 만나지 못한 아픔에 공감했는지 모른다. 설령 MCU에 갬빗이 나온다고 해도 이제는 채닝 테이텀급 배우를 쓰지 않을 테니, 그의 갬빗을 기다렸을 팬들에겐 <데드풀과 울버린>이 귀인처럼 느껴질 듯.
<판타스틱 4> 프랜차이즈

극중 데드풀과 울버린이 보이드에 떨어진 직후 만난 동료는 휴먼 토치라는 히어로명을 쓰는 조니 스톰이다. 크리스 에반스가 등장해 깜짝 반전을 선사하더니,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휴먼 토치로 나와 한 번 더 반전을 선사한다. <판타스틱 4>(2005), <판타스틱 4: 실버 서퍼의 위협>(2007)에서 휴먼 토치를 연기한 크리스 에반스는 캡틴 아메리카를 맡기 전까지 이런 이미지가 강했다. 배우의 본래 성격이 쾌활한데다 다른 영화에서도 이런 유의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기 때문. 어쩌면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휴먼 토치로 출연 요청을 받았을 때, 크리스 에반스 본인이 가장 즐거워했을 지도.
사실 판타스틱 4의 진짜 비극은 본편에 나오지도 않았다. 바로 2015년 공개한 <판타스틱 4>다. 2007년 영화로 시리즈를 문 닫았지만, 당시 마블에게 판권을 임대하고 있었던 20세기폭스는 판권 연장을 위해 리부트를 선택했다. <크로니클>의 조쉬 트랭크 감독을 필두로 마일즈 텔러, 케이트 마라, 제이미 벨, 마이클 B. 조던 등을 캐스팅해 화려한 라인업을 구성했다. 문제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부터 완성본까지 전부 흑역사가 됐을 뿐. 조쉬 트랭크는 설정부터 작중 분위기까지 원작과 다른 노선을 취했는데, 평단과 관객 모두 이 어색한 각색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거기에 조쉬 트랭크가 현장에 약이나 술에 취한 상태로 나타나 제대로 현장을 지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비난을 받았다. 결국 영화는 흥행도, 평가도 최악을 기록했고 이번 <데드풀과 울버린>에서도 관련 농담조차 나오지 않는 흑역사가 됐다. (그래도 엔딩 크레딧 삽입영상에선 나왔다)
참고로 덧붙이면 현재 MCU는 <판타스틱 4>를 제작하고 있다. 2025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이며 페드로 파스칼, 바네사 커비, 조셉 퀸, 에번 모스배크랙가 MCU판 판타스틱 4를 맡는다. <완다비전>을 연출한 맷 샤크먼의 첫 장편 연출 데뷔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