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 문제에 천착해 온 봉준호답다. 그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SF 소설 「미키 7」을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고, 또다시 죽는 것이 직업인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낸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의 독특한 컨셉에 매혹됨과 동시에 원작에 내포된 노동자 계급의 서사로 “인간적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미키 17>의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또 원작의 ‘어두운 유머 코드’(봉준호 감독의 표현에 의함) 또한 그의 마음을 이끌었을 것이다.
두 작품은 위험한 일에 투입되기 위해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소모품(익스펜더블)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본 설정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생태주의와 계급론, 권력 구조를 향한 비판 의식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영화 <미키 17>이 원작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았다. (후반부의 결말도 크게 다르지만,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각자 어떻게 달라졌는지 영화 관람 시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듯하다.)
잉여인간에서 노동자로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미키 반스를 원작의 미키 반스와는 다른 청년으로 재탄생시킨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과 다르게 각색한 인물의 서사로 노동자 텍스트를 더 두드러지게 하면서 지금의 현실을 덧입힌다. 우선 그 둘의 다른 시작점부터 살펴보자. 「미키 7」의 미키는 지구가 아닌 개척 행성 미드가르드의 사람이다. (원작에서 지구는 이미 멸망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계절 변화가 크지 않은 미드가르드는 기후적으로 인간이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또 “모든 산업과 농경업이 자동화되어 있고, 수확물을 인구수로 나누어 배급”(「미키 7」, 에드워드 애슈턴, 배지혜, 황금가지, 2022, 43쪽 참조)하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를 겪을 일도 없다. 그곳에서 미키는 전혀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역사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는 장구한 인류사를 통달했지만 자신의 지식을 어디에서도 쓰지 못한다. 주어지는 생활비만으로도 먹고살기에 충분하기에 별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미키는 그런 자신의 삶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공허감을 느낀다. 그의 공허감은 자조적인 그의 독백에 잘 드러나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이런 이유로 예나 지금이나 무료한 청춘들이 으레 그래 왔듯, 나 역시 틈만 나면 사고 칠 궁리를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44쪽). 원작의 미키는 지적 능력을 갖췄음에도 사회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는 그저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할 뿐인 무료한 시간을 견디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미키 7」의 미키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안톤 체호프의 희곡 「잉여인간 이바노프」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등장한 인물 유형인 ‘잉여인간’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귀족 출신의 지식인인 그들은 지적인 능력과 비판 정신, 교양을 가졌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와 불화하면서 억압적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권태로운 일상을 보낸다. 이들은 전후 문학에서도 변용되어서 등장한다. 전후 무력한 지식인, 선량하지만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의 무료한 청년 미키의 모습에서 <기생충> 기우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미키를 권태에 빠져 있는 잉여인간에서 당장의 생존에 급급한 노동계급의 인물로 변화시키면서 지금을 덧댄다.

원작에서 역사가로 설정되었던 주인공 미키는 영화 속에서 사채 빚더미를 떠안은 자영업자로 그려져 있다. 그는 잔인한 사채업자를 피하기 위해 지구를 떠나 개척 행성단의 익스펜더블이 된다. 봉준호의 영화 속 미키는 지적인 능력을 덜어내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수다스러운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는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느라 권태로울 틈이 없다.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 정신의 결여로 마샬(마크 러팔로)과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이 고함을 치며 지지 세력을 늘려가더라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티모(스티븐 연)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의주의적 행태를 보이지는 않는다. 정당한 방법으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애초에 발 디딜 발판조차 없었던 그는 사회의 절벽에 내몰려 나고 자란 지구를 떠나 4대 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고, 쉽게 죽음에 노출되는 위험한 현장의 노동자가 된다. 봉준호 감독은 바뀐 미키의 서사로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의 문제, 노동자 소외 문제를 드러낸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익스펜더블로

「미키 7」과 <미키 17>은 신체와 기억, 정체성을 그대로 프린트한 익스펜더블이 여전히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사고실험이다. 「미키 7」에서 에드워드 애슈턴 작가는 인물의 입을 빌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철학적 사고실험인 ‘테세우스의 배’ 논쟁을 제시한다. 테세우스가 항해를 하는 동안 배는 점점 낡아진다. 배의 낡은 부분들을 교체하면서 원래 선체를 구성했던 자재는 모두 새것으로 바뀐다. 이때 ‘모든 부분이 교체된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란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테세우스의 배는 정체성과 동일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이 테세우스의 배가 바로 미키 반스다. 같은 기억과 신체를 가진 미키들은 같은 사람일까. 테세우스의 배를 독특한 서사로 재창조해 낸 에드워드 애슈턴의 철학적 질문은 영화 <미키 17>에서도 이어진다.

봉준호 감독은 에드워드 애슈턴이 제기한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기억의 총량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미키 17과 미키 18은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로 존재한다. 미키 17은 일부 기억을 업로드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미키 18이 리프린팅된다. 기억의 어긋남은 둘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미키 1과 미키 17도 같은 기억을 가진 것이 아니다. 미키 1은 미키 2~미키 16이 삶을 더 이어간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이들은 총량이 다른 기억을 가진 셈이다. 또 나샤(나오미 애키)는 미키 17에게 이제껏 자신이 겪어 왔던 미키들의 성격이 조금씩 달랐다고 말해준다. 또 다른 그들이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녔다고도 말한다. 그녀는 그들을 하나의 복제품으로 인식하지 않고, 각각의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봉준호 감독은 미키를 진정한 사랑으로 대한 나샤의 입을 빌려 익스펜더블 미키들을 모두 각각의 다른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