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풍자. 블랙코미디. 노동. <미키 17>을 관통하는 수많은 키워드 중 봉준호 감독은 이 단어를 선택했다. 사랑.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 관련 공식 석상에서 공공연하게 이 영화를 “사랑 이야기”라고 명명했다. 처음에는 왜일까 싶었는데, 영화를 보니 왜인지 알 수 있었다. 미키가 그 힘든 익스펜더블(소모품) 인생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나샤였고, 반대로 나샤 역시 미키가 둘이건 셋이건 상관없이 “모두 내 것”이라고 외치니까. 영화의 시작이 (인생 대다수를 지탱하기 위해 하는) 노동이라면 그 과정은 사랑이었으며 결말 또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샤와 미키의 사랑이 정말 사랑일까. <미키 17>에서 나샤의 사랑이 조금은 괴상하게 비치는 반면, 나의 눈은 조용히 미키를 살펴보고 그 곁을 한결같이 지키는 도로시를 쫓고 있었다.

미키 17이 죽음을 앞두고(스포일러 아니다, 이게 영화의 시작이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관객은 미키(로버트 패틴슨)와 나샤(나오미 애키)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영화는 나샤가 마치 딴마음이 있는 것처럼 은근슬쩍 암시한다. 가난한 노동자에 익스펜더블이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미키를 나샤는 적극적으로 플러팅하고, 심지어 미키가 실험체가 돼 죽는 순간들까지도 모두 함께 한다. 체위를 개발(?)하면서 낄낄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커플 같으면서도 그래도 선내에서 권위가 있는 나샤를 하나하나 챙겨주는 미키를 보면 어딘가 삐뚤어진 관계가 아닐까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나샤의 사랑은 결코 어떤 꿍꿍이가 아니라 ‘찐’사랑인 것이 드러난다. 일찌감치 미키에게 관심을 보인 카이(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가 ‘하나 내놔’라는 식으로 협상을 시도하자 나샤는 ‘미키는 모두 내 것’이라며 윽박을 지른다. 아, 이런 노빠꾸 사랑. 썸이니 플러팅이니 밀당이니 하는 현실의 연애와는 달리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는 사랑은 영화에서도 참으로 귀한 것이라 심장이 뛴다. 문제는 그 뛰는 심장이 정말로 ‘사랑’의 설렘인지이다.

나샤가 미키 17과 18 모두 사랑한다는 건 일견 “있는 그대로의 널 사랑해”라는 이상적 사랑의 선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미키 18는 리프린트되는 도중 일종의 오류로 원본 그대로가 재현되지 않은 ‘불량품’이다. 그는 우물쭈물 우유부단한 17과 달리 절제심이 부족하고 다소 폭력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17과 18은 같은 육체, 같은 기억,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만 판이한 인격이다. 관객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에서 이미 다른 사람처럼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나샤는 두 사람을 같은 사람 취급하고, 심지어 둘 다 사랑할 수 있다는 듯 말한다. 미키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면서.

물론 사랑이란 범위와 정의는 특정하기 어렵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처럼 외면에 끌렸으나 평생 사랑을 지속하기도 하고, 반대로 다르기에 서로 안 좋게 의식하다가 그 다른 점을 긍정하며 점차 가까워져 사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랑의 형태는 모두 제각각이다. 하지만 ‘똑같은데 다른 사람’이란 가정이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단 점을 차치하더라도, 나샤의 사랑은 미키라는 외면을, 반대로 미키의 성격을 사랑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미키라는 개체에 대한 맹목적 애정. 사랑이라기엔 오히려 광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그럼에도 <미키 17>(과 봉준호 감독)은 이 사랑에게 가장 이상적인 결말을 안겨준다.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끝내 서로와 함께 하는 삶. 심지어 기존의 한계까지 완전히 타파하고 더 긍정적인 미래를 바라보는 삶. 잘 됐네 잘 됐어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앞선 장면들에서 보여준 나샤의 집착 같은 면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봉준호 감독은 비이성적이고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 수반이 돼야 사랑을 이룩할 수가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연인의 사랑이라면 때로는 맹목적이고 광폭해야만 위기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다소 낯 뜨거운 사랑론만 있는 건 아니다. 미키를 사랑하는 시선은 나샤뿐만이 아닌데 동성 연인이 있던 시절에도 미키에게 관심을 보였던 카이와 연구실에서 그 누구보다 미키를 상냥하게 대해준 도로시(팻시 페런)가 있다. 미키를 두고 ‘협상’하는 카이가 나샤와 비슷한 궤라고 치면, 도로시는 극중 소모품 취급받는 미키를 가장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는데 적극적으로 접근하진 않으며 짝사랑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 또한 ‘예상 수명이 10분에서 15분이 됐다’는 말을 기쁘다는 듯 전하는 괴짜이지만, 프린트를 거듭 반복하는 미키의 안전을 신경 쓰는 유이한 인물이다. 이런 묘사를 보아 <미키 17>은 적극적인 사랑의 표상으로 나샤를 두고 그 반대편에 도로시의 사랑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즉 나샤가 관계로서 사랑의 이상적 형태라면, 도로시의 사랑은 사랑이란 그 마음 자체의 이상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도로시가 상징하는 이상적 사랑은 두 생명체 간의 사랑을 넘어 사랑 그 자체에 가깝다. 관심 있는 대상의 삶과 죽음에 반발하지 않고, 타생명체의 특징마저 세심히 지켜보며, 더욱 공고해져 넘볼 수 없게 된 타인의 사랑마저 긍정하는 태도.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자칫 무감각해지거나 냉소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그 받아들임을 긍정하고 있기에 모두와 함께 최후의 미소 짓는 자가 되기까지. 도로시는 그렇게 넉넉하게 자신만의 사랑을 쌓아 결정적 순간에 미키를 돕는다. 거기에는 어떤 대가나 바람이 없이, 그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표준국어대사전)이 있음이다. 주연급 인물들에 비하면 분량도, 활약도 많지 않은 도로시라는 캐릭터가 유독 인상 깊게 남은 건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의 형태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