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서울 영등포의 한 카페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계시록>의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을 만났다. <계시록>은 넷플릭스 코리아가 2025년 가장 먼저 선보이는 오리지널 영화. 새해의 문을 연 감독이 바로 ‘연상호’라는 사실은, 그에게 오랫동안 따라붙은 별명 ‘넷플릭스의 아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연상호 감독은 앞서 열린 <계시록> 제작발표회에서 이 작품을 “내 모든 작품의 응축판”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연상호 작품 중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면 <계시록>을 추천한다. 일종의 필모그래피 요약판 같은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2016년 첫 실사 영화 <부산행> 이후 10년 가까이 형식을 넘나들며 쉼 없이 달려온 연상호. 그의 영화 인생의 ‘Summary(요약)’ <계시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계시록>으로 2025년 첫 작품을 선보였어요. 원래 <계시록>은 극장 개봉을 할 예정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어떻게 넷플릭스로 공개하게 되었나요?
맞아요. 처음에는 극장 개봉용으로 기획을 했어요. 다만 <계시록>이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이야기다 보니까, 당시 극장 투자 시스템이 경직돼 있는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 같아요. 넷플릭스는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려는 니즈가 있었고, 그런 점에서 방향성이 맞았던 것 같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유추지만요.
‘K-장르의 아버지’라는 호칭도 따라붙습니다. 이 수식어는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아버지’라는 말이 좀... 물론 집에 가면 아버지이긴 한데요. (웃음) 어느덧 제가 데뷔한 지도 꽤 오래됐고, 돌이켜보면 그냥 일하면서 40대를 훅 지나버린 느낌이에요. 독립 애니메이션 시절부터 영화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지 알다 보니, 주어진 기회에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것뿐이에요.
끊임없이 작업하시는 한국 감독 중에 한 분이시잖아요.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기회가 언제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르잖아요. 독립 애니메이션을 오래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생기죠. 그래서 지금은 “할 수 있을 때 많이 하자”는 생각을 해요. <부산행>이 흥행했을 때도 ‘이건 왜 됐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런 성공은 개인의 역량이나 운 만으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사회 분위기, 극장 시스템 같은 복합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요즘 정치,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시국이잖아요. 오늘 인터뷰 장소도 원래 종로였는데 갑자기 변경되기도 했고요. 영화 <계시록>이 지금, 이 시점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인간은 자기 욕망이 생기면 원하는 것만 보게 돼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도 마찬가지죠. 자기가 보고 싶은 앵글대로만 세상을 해석하게 되는 거예요. <계시록>은 그 현상을 포착하고 싶었던 작품이에요. 이 영화는 지금 사회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지금 이 시점에 <계시록>이 공개되는 걸 보면, 이건 그냥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지금 시대가 잉태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감독님은 개인적으로 '믿고 싶은 것'이 있나요?
저는 제 작품들을 되게 좋아해요.(웃음) 많이 보기도 하고, 솔직히 제가 제 영화를 제일 재미있게 본다고 생각해요. <염력> 같은 작품도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좋아해요. 아마 그 영화가 잘 됐으면 더 그런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어요.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 흔히 '연니버스'라 불리는 그 틀에만 머무르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그 성을 견고하게 쌓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진짜 성이 아니잖아요. (웃음) 저는 오히려 그 틀에서 탈출하고 싶어요. 그래서 일본어로 된 영화, 유튜버처럼 싸게 만들 수 있는 영화, 저예산 시리즈 같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 해요. 그렇게 해야 제 안의 창작 의지도 계속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작품을 만들 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90년대 영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제 영화는 그 자장 안에 있는 건 분명해요. 다만 그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계속하려고 해요. 넷플릭스에서 일본어 작품(넷플릭스 재팬 오리지널 시리즈 <가스인간>)을 만들게 된 것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에요. 지금은 진짜 개개인의 취향이 콘텐츠를 지배하는 시대예요. 그런 흐름 속에서 창작자는 계속 다른 걸 시도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올해는 이런 걸 해보자’, ‘내년엔 저런 걸 해보자’라고 큰 맥락을 정해두면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저는 늘 그렇게 앞으로 나가고 있어요.

이번 작품에서 신현빈 배우가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었는데요. 신현빈 배우가 맡은 이연희 캐릭터는 기존 형사와는 다른 결을 가졌어요. 어떻게 탄생한 캐릭터인가요?
이연희는 형사라는 직업보다 죄책감에 짓눌려 있는 상태가 중요한 인물이에요.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불안한 감정 상태요. 신현빈 배우가 그 감정을 고요하게 따라가다가 후반부에 토해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그 배우만이 표현할 수 있는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류준열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질문이 정말 많은 배우예요. 심지어 걸음걸이 하나까지 고민해요. 질문 하나하나가 구체적이고 명확해서, 면피용 답변이 안 돼요. 그런 배우는 같이 영화의 톤을 찾아가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실제로 함께 하면서 많이 배웠고, 되게 진지하고 열정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그래비티>와 <로마>로 잘 알려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총괄 제작을 맡아 화제였는데요. 함께 작업하며 인상 깊었던 점은요?
이 프로젝트가 넷플릭스에 가기 전에 이미 알폰소 쿠아론 감독님과 협업이 예정되어 있었어요. 알폰소 쿠아론 감독님은 감독의 비전을 굉장히 중시하는 분이에요. 편집, 마케팅까지도 디테일하게 챙기시더라고요. 알폰소 쿠아론 감독님이 <계시록>에 대해 카메라가 ‘의지 없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런 지점을 잘 봐주셔서 감사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