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내 진심을 때렸고, 난 아직 그 멍 그대로야!” 멍투성이로 남은 과거의 짝사랑 정화(서예화)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 숙맥 대식(이희준)이 아름다운 튀르키예를 배경으로 안녕하지 못한 여행을 하는 영화 <귤레귤레>(감독 고봉수)가 6월 11일 관객을 만난다. ‘귤레귤레’는 튀르키예어로 ‘웃으며 안녕’이란 뜻이다. 카파도니아 사막 동굴을 비롯해 인생샷 핫플에 등극한 벌룬투어까지, 눈이 즐거운 이 영화를 연출한 이는 다름 아닌 고봉수 감독이다.
맞다. 250만 원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남자들의 4중창 도전기를 담은 데뷔작 <델타 보이즈>(2017)를 만들어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그 고봉수 감독. 이듬해 2,000만 원으로 고교생 레슬러들의 땀나는 고군분투기 <튼튼이의 모험>(2018)을 찍어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수상했다. 퀵서비스 기사의 짝사랑을 다룬 흑백 무성영화 <다영씨>(2018)부터 영화감독과 국악인 커플의 사랑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 <갈까부다>(2019), 산골 마을에서 펼쳐지는 무협 이야기 <우리마을>(2018), 팬데믹 시국을 통과하는 영화인들의 생존기를 담은 <습도 다소 높음>(2021), 빚에 시달리는 부자(父子)의 소시민스러운 삶을 담은 <빚가리>(204), 그리고 올해 <귤레귤레>까지, 고봉수 감독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8편의 영화를 만들어왔으며, 8번 모두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이쯤 되면 전주국제영화제의 ‘아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데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전작들과 조금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영화다. 짠내 폴폴 나는 캐릭터들은 그렇다 쳐도, 첫 해외 올 로케이션 영화인 데다 화면 ‘때깔’부터 다르다. 게다가 고봉수 감독이 작정하고 도전한 첫 멜로영화이기도 하다. <서유기 2: 선리기연>이 최고의 멜로영화라고 생각하는 그를 돕기 위해 아내 이주예 작가가 공동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고. 고봉수랜드의 색깔을 뺀다고는 했지만, 변치 않는 고봉수사단 멤버인 신민재 배우부터 최근 사단에 합류한 이희준 배우, 여기에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연극계 출신의 서예화 배우가 펼치는 연기 앙상블이 108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운다. “이번 영화로 자신을 좀 비워내고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봉수 감독을 만났다.

<귤레귤레>는 어디서 출발한 영화인가요?
이희준 배우와 <습도 다소 높음>을 마무리 짓고 다음 영화도 같이 하면 어떨까 하며 이야기를 했어요. 카페에서 수다 떠는 와중에 멜로영화 한번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멜로영화 레퍼런스들을 쭉 훑어보는데, 둘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영화가 <펀치 드렁크 러브>(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2003)였더라고요. 남자주인공이 좀 지질하게 나온 영화였는데, 우리도 이런 멜로영화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고, 2021년경 와이프와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부인 이주예 작가와 공동 시나리오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이전 작업과는 달랐을 거 같아요.
그렇죠. 저는 멜로영화를 많이 안 보던 사람이었어요. <서유기 2: 선리기연>(감독 유진위, 1995)을 명작 멜로영화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웃음). 그런데 와이프는 멜로영화 매니아에요. 이런저런 멜로영화 소개를 해준 덕분에 많이 봤습니다. 이야기 얼개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가 과거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그 상처들과 ‘귤레귤레!’하면서 성장하는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귤레귤레’가 처음부터 제목이었나요?
네. 배경을 튀르키예로 정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부터요. 작별에 관한 이야기니까 제목으로 아예 튀르키예어 작별 인사를 쓰자고 생각했거든요. 귤레귤레 뜻이 ‘웃으면서 안녕’이래요. ‘슬프게 안녕’이 아니고요. 그래서 귤레귤레가 딱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외 올 로케이션 영화잖아요. ‘고봉수랜드’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닌가 싶은데요(웃음). 일단 수많은 나라 중에 튀르키예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주인공의 건조한, 좀 푸석한 심리상태를 표현하기에 튀르키예가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나 싶었어요. 사막도 있고 좀 세피아 느낌도 있어서요. 너무 예쁘지만 황량한 느낌이랄까요? 실제로 처음 튀르키예를 갔을 때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두 번째는 ‘귤레귤레’를 외치는 가장 낭만적인 장소가 어딜까를 고민했는데요. 땅에서 두 발이 멀어질 수 있는 곳을 상상하다 보니, 벌룬이 최적의 장소로 떠오르더라고요.

튀르키예는 그 전에 다녀오셨나요?
가고 싶었죠. 유튜브로만 보면서요(웃음). 늘 가보고 싶은 나라였어요.
촬영은 몇 회차로 마치신 건가요?
2023년에 촬영했는데요. 배우들 스케줄도 바쁜 데다 예산 제한도 있어서 열흘 정도 머물면서 촬영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배우들 이야기를 좀 해보죠. 오랜만에 ‘고봉수사단’ 대표 배우인 신민재 배우가 출연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연상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열연을 했는데, 좀 불안하진 않으셨나요? 아니면 다시 만난 신민재 배우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 있다거나(웃음).
전혀요. 민재 배우는 항상 겸손의 아이콘이거든요. 워낙에 사람이 겸손한데다 착하니 감독님들이 많이들 찾아주시는 것 같아요. 연기도 잘하지만 인성이 워낙 좋거든요.
<계시록> 때 연상호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연상호 감독이 하다 하다 이제 영화에까지 출연한다”라고 말해서 빵 터졌던 적이 있어요. 신민재 배우가 워낙 연상호 감독님을 닮아서 나온 이야기라고요. 혹시 연상호 감독님께 따로 연락 받으신 적 있나요?(웃음)
아니요. 저야 연상호 감독님께 너무 감사하죠. 가라앉아 있던 민재 배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민재 배우도 길거리에서 연상호 감독님으로 오해 받아서 인사를 많이 받았다고(웃음).

그렇군요. 이희준 배우가 연기한 대식은 운동선수 출신인데 덩치에 비해 소심함을 넘어 지질한 캐릭터더라고요. 방어기제도 많고요.
시나리오상에도 그렇게 돼 있었지만, 영화라는 게 배우와의 협업이 필수잖아요. 그동안 이희준 배우가 강한 역할을 많이 맡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대식 캐릭터에는 특히 이희준 배우가 애정을 많이 가지고 접근했어요. 현장에서 아이디어도 많이 제안했고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신다면요?
영화 초반부에 대식이 거의 말을 안 해요. 이건 이희준 배우가 캐릭터를 분석해서 제안한 거예요. 뭔가 가만히 참고 있다가 후반부에 감정을 분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해서 초반부에 의도적으로 말을 아낀 거죠. 연기를 보면서 저 역시 그런 감정이 맞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정화 역을 맡은 서예화 배우의 연기도 정말 좋더라고요. 캐스팅 비하인드와 현장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신다면요.
이희준 배우에게 어떤 여배우랑 하면 편하겠느냐고 물어봤는데, 서예화 배우랑 꼭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이 아는 배우 중에서 가장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요. 센스가 있다고 해서 캐스팅했죠. 촬영 현장에는 워낙 변수도 돌발상황도 많잖아요. 게다가 저희 영화에는 애드리브도 많고요. 처음 접하는 배우들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하드코어’한 현장인데, 엄청나게 적응을 잘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 와도 다 받아치고요. 그리고 정말 놀랐던 건, 본인 촬영이 없어도 항상 현장에 나와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메모를 하더라고요. 다음에 어떻게 연기할까를 계산하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인지 늘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았고요. 이희준 배우와는 극단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서인지, 역시나 후반부에 둘이 나오는 장면들은 좋았습니다.
말씀하신 후반부로 가면 화면이 막 리플레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상상이죠. 지질한 대식의 상상을 시뮬레이션으로 돌린 걸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웃음) 또 정화의 단호한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남편과 재결합 여행을 와서 대판 싸우고, 다시 전남편을 정리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대식과의 러브라인으로 이어지는 건 좀 무리라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더 단호한 정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어떤 장면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헷갈리도록 찍었습니다.

초보 유튜버 엄마와 딸들이 영화 속 영화 형태로 말하는 방식이 독특하더라고요. 대사도 즉흥적인 거 같고, “그럼 맥주는 쏘는 거야?” 하는 대사도 정말 일상 대화처럼 느껴져요. 일반인 배우였나요?
딸 박은영은 전문 배우고요, 엄마는 전문 연기자가 아니에요. 예전에 아내가 촬영했던 단편 <보조바퀴>(2021)에 출연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연기하시는 걸 보고 너무 잘한다고 감탄했거든요. 이번에 튀르키예에 따님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튜버 엄마 역할을 제안했어요. 수락해주셔서 탄생한 캐릭터입니다. 원래 딸 역할은 예전에 함께 작업한 윤지혜 배우에게 맡기려 했는데 임신하는 바람에 박은영 배우가 맡게 됐어요.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대사들이 정말 너무 좋았어요. 애드리브도 많았는데, 현실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캐릭터도 그랬고요.
이번 영화 역시 애드리브가 많았던 거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 영화에도 비전문 배우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많이 나와요. 가이드 이스마일부터 호텔 종업원, 낙타 호객꾼, 버스표 파는 할아버지 등 전부 즉석에서 섭외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대사를 드리는 건 의미가 없잖아요. 최소한의 설정을 설명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하는 거죠.

그런 현장은 홍상수 감독님과 비슷한데 말이죠. 애드리브를 많이 쓰는 것도요(웃음).
<빛가리>(2004)에 비전문 배우, 그러니까 일반인인 작은아버지(고성완)가 연기했는데요. 영화계 입문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한 거 같아요. 한석규 배우랑 작은아버지가 같이 연기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요.(웃음) 영화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작은아버지가 워낙 재밌으시잖아요. 한석규 배우와 한 화면에 나온다면 어떤 케미가 있을지 그런 걸 상상하는 게 즐거워요. 저는 영화에서 일반인들의 매력이 유독 더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올 로케이션 영화다 보니 튀르키예 현장에서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아요.
영화 후반부에서 대식과 병선이 싸우는 장면이 있잖아요. 카메라를 보이지 않게 숨겨서 촬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한국인끼리 싸우면 안 돼요!”라며 한국 관광객분이 외친 거예요. 카메라가 안 보이니 진짜 싸움인 줄 알았던 거죠. 그래서 이스마일이 “이거 영화 촬영 현장이에요!”라고 했던 에피소드가 기억나네요.(웃음)
하나 더 말씀드리면, 터키에 드론 반입이 안 되더라고요. 아쉽지만 부감샷은 포기해야 했죠. 그런데 낙타 투어하는 장면을 찍을 때, 직원이 추가금액을 내면 드론 촬영 서비스를 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돈을 더 내고 드론 촬영을 요청했는데, 그분이 드론으로 찍은 분량이 영화에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워낙 베테랑이셔서 정말 아름답게 나왔죠(웃음).

행운이 있었네요. 그렇지만 촬영 기간이 짧은데다 해외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어려웠던 부분은 아무래도 날씨였습니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거나,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벌룬이 못 뜨거든요. 그러면 촬영 스케줄에 지장이 생기잖아요. 배우들은 바쁘지, 예산은 한정돼 있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나올 장면인데 벌룬이 못 뜨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비가 오다가도 촬영을 시작하면 그치고 무지개가 뜨더라고요. 벌룬이 뜰 때는 바람이 멈춰줬고요. 그냥 행복했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전작들 촬영이 안 좋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요. <귤레귤레>는 화면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촬영감독님 섭외를 잘하신 것 같습니다만.(웃음)
한정호 촬영감독님이신데, CF 작업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한 감독님이 촬영한 광고를 보니 너무 예뻐서, <귤레귤레> 촬영을 함께 하면 튀르키예의 풍광을 잘 잡아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한 감독님이 와이프와 팀으로 영화의 멋진 장면들을 담아줬습니다.

감독님 부부에 유튜버 모녀 그리고 촬영감독님 부부까지 아주 사랑이 넘치는 현장이었겠군요.(웃음)
듣고 보니 그렇네요.(웃음) 좀 다른 이야기인데, 이희준 배우가 엄청 많이 도와주셨어요. “한국 음식 드시고 힘내셔야죠” 하면서 그 비싼 한국 음식들을 다 쏘셨어요. 독립영화 도와주시겠다고….
병선 역의 신민재 배우는 “고봉수 감독은 시나리오 외의 연기와 돌발적인 상황들 그리고 촬영 공간에 있는 배우가 아닌 사람들을 사랑한다. 모든 장면에서 마법 같은 순간들을 느낀다”라고 말했어요. 원창 역할을 맡은 정춘 배우는 “테이크를 다시 갈 때마다 늘 처음처럼 신선한 느낌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마치 마법 같은 분위기랄까? 배우 입장에서는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 정말 ‘고봉수랜드’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라고 말했고요. 이렇게나 배우들을 빠뜨리는 고봉수랜드의 마력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배우들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게 그저 감사하죠. 어떻게 그러냐고 노하우를 물어보는 분도 사실 많아요.(웃음) 그런데 사실 노하우라는 게 없어요. 음, 하나 말씀드리자면 촬영 전에 기도를 합니다.(웃음) 저희 현장에는 늘 비전문 배우가 있어요. 그분들이 전문 배우와 함께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연출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전문 배우와 비전문 배우의 연기 합에서 어떤 돌발 상황들이 벌어질 때 오히려 영화가 더 풍성해지는 거 같아요. 촬영 끝나고 회식 때 이희준 배우가 “감독님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나봐요”라고 말하더라고요. 독실한 불자신데 말이죠(웃음). 제가 기도하는 걸 아니까요. 뭐 저는 모태신앙도 아니고요, 꼭 교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제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좀 더 넓은 의미로.(웃음)

이번 <귤레귤레>도 그렇고, 전작들도 평균인보다 모자란, 흔히 말하는 루저 또는 소시민에 대한 감독님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끌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어요. 부모님이 중국집을 하셨어요. 자장면이 5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주방장 아저씨랑 배달원 아저씨가 중국집에서 함께 살았어요. 합숙하는데 그 아저씨들이 너무 재밌었어요. 그런 분들과 늘 지내다 보니까 익숙해진 거 같아요.(웃음) 주변에 너무 재밌는 분들도 많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영화에 소시민의 삶이 녹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귤레귤레>의 대식, 정화, 병선 모두 각자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아요. 그런데 영화는 어떤 희망과 가슴 뭉클한 따뜻함을 향해 나아가죠.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긍정성을 지향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영화 속 캐릭터 모습들이 제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최근에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생겼어요. 패트릭 스웨이지나 로빈 윌리암스 같은 돌아가신 분들요. <더티 댄싱>(1987)이나 <폭풍 속으로>(1991) 같은 영화 다시 보면서 와, 세월이 너무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스크린에서 훨훨 날던 분들을 못 보게 된 거잖아요. 세월이 이렇게나 빠르고 허무한데,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과거에 갇히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화를 계속 만들려고 하는 것 같고, 재밌는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은 거죠.

감독님이 ‘귤레귤레!’하고 싶은 게 후회라고 하셨어요. 개인적이긴 하지만 어떤 후회들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음, 제가 너무 물질이나 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았나 싶어요. 저로 살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아니, 가장 원하던 대로 사신 거 아닌가요? 만들고 싶은 대로 영화 다 만드시면서요.(웃음)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20대부터 영화를 했겠죠. 그때는 자신도 없었고요.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지? 영화잖아! 그래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거고요. 좀 더 빨랐다면, 지금 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는데, 여기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여기저기서 아이디어를 많이 주세요. 전라남도 함평에 레슬링부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인터뷰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는데, 거기 갔다가 어렵게 레슬링하는 학생들과 감독님을 보고서 <튼튼이의 모험>(2018)을 만들게 됐죠. 너무 감동적이어서 뭔가 사명감을 갖고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할 정도였어요. 조치원에서 찍은 <빛가리>(2024)는 ‘시네마다방’ 시혜지 대표의 취지가 좋았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 수준이었지만 돕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늘 지방으로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애드리브는 계속 허용하시겠죠?
두 가지 마음이 있죠. 앞으로 제가 상업영화를 찍을 계기가 온다면 현재 애드리브를 쓰는 작업 방식을 어느 정도 고수할 수 있을지 고민이 돼요. 완벽한 콘티로 상업영화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핫한 신민재 배우를 비롯해 고봉수사단 멤버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감독으로서 어떤 욕심은 없으세요?
그러니까 제가 한가락 하는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접었고요.(웃음) 그런데 너무 독립영화만 고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몸을 기자 쪽으로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와이프가 옆에 있는데 좀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제 욕심을 버리고 좀 상업적인 마인드도 좀 가지면서요. 독립영화 감독이랑 결혼하는 게 정말 큰 용기를 낸 거잖아요. 그런 선택을 좀 후회 없게 만들어주고 싶어요.(웃음)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세요?
사람들에게 좀 긍정적인 마음을 주는 영화요. 요즘 좋은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데요. 보고 나면 좀 찜찜한 마음이 드는 영화들도 있거든요. 그런 거 말고 따뜻한 영화를 만들면 좋겠어요. 웃기면 더 좋겠고요. 예전에 주성치 영화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영화들처럼 B급 영화인데 설레는 느낌으로 극장 갔던 기억이 나요. <황혼에서 새벽까지>(1998) 같은 B급 영화에서 A급 배우인 조지 클루니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재밌잖아요.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드리게즈 감독들이 B급 영화를 휘어잡던 그때가 그립긴 합니다.

2017년 데뷔작 <델타 보이즈> 이후 매년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창작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와이프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웃음) 다양한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말이 안 된다고 하시기도 합니다만, 전 영화를 만드는 게 재밌어요. 물론 현장에서는 힘들죠. 그래도 결과물이 나와서 다 함께 웃으면 보람이 있죠. 그 재미가 어마어마해요. 또 관객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감독님에게 있어서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지를 여쭙고 싶었는데, 방금 대답을 주셨네요. 그러면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지점에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세요?
음, 첫 해외 올 로케이션 영화라는 의미가 일단 있고요.(웃음) 전작들과는 달리 정말 제 취향을 철저히 내려놓고 대중을 생각하면서 만든 영화라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관객이 보시기에 제 취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저로서는 대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의 시작인 영화라고 할까요? 그래서 시나리오도 처음으로 와이프와 공동으로 썼고요.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요.
요즘에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이 있으실 텐데요. 개인적이나 사회적인 염려, 근심이 있다면, 극장에서 <귤레귤레>를 보는 두 시간 만큼은 그런 걱정들과 ‘귤레귤레!’ 하시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영화 감상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